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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안 Jan 26. 2020

평범하게 애상한 명절

잘고 가느다랗고 선명한_200125

 또 G와 FS가 없는 명절이다. G는 시댁에서 올라오는 중이고, FS는 내일 휴가를 받아서 나올 것이다.


 친할머니는 구강암에 걸려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이제 항암제 투여만 남겨놓고 있다. 절제 수술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그를 제외한 남은 요법을 다 이행한다. 오늘 친할머니 댁에 가서 그녀를 봤는데 풍채가 다 어디로 가고 없었다. 목이 다 드러나보일 정도였다. 홀쭉해져서 미녀가 되겠다고 농담하는 양을 보아하니, 걱정이 그나마 조금 덜어지긴 했다. 친할머니를 걱정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냥, 뿌리가족 구성원이 다 떠나고 세상에 혼자 남겨질 기분을 언젠가 느끼게 될 아버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사는 내내 내게 잘해주진 않았지만 잘해준 기억을 많이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고 아버지의 타고난 다정의 결을 내가 발견한 적 많았기 때문에 그의 실수나 사뭇 짜증스럽고 무정한 구석을 발견하더라도 굳이 왜곡하거나 나쁘게 해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버진 혼자서 친할머니 댁을 방문하려고 하셨지만 내가 같이 가보자고 한 마디 거든 덕분에 온 가족이 걸음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가 마음에 응어리를 남기지 않게 되는 좋은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내게 네가 말을 잘했다고 얘기했다. 나는 가족들과 있으면서 대본이 없는 긴장감 넘치는 연극을 하고 있구나, 라고 가끔 생각하는데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가 찰떡처럼 맞아 떨어져서 아무도 불행하지 않은 길로 슥- 들어섰을 때 생각한다. 이건 대본이 좋았나보다.


  우리 집에는 방이 세 개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공부방은 서재라고 불러도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책이 많다. 다른 방에는 옷과 화장대가 있고, 다른 한 방은 안방이다. 옷과 화장대가 있는 방을 내 마음대로 파우더룸이라고 부르자면, 파우더룸에는 방문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다. '나는 매일 나아지고 있다.'라는 메시지가 주로 담긴 A4 용지가 붙어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종이로, M이 거의 조증에 걸려서 쓰다시피 한 종이이다. 우리 가족은 매일 나아지고 있고, 잘 될 거라는 메시지가 여러 줄에 걸쳐서 쓰여있는 글이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지만 가끔 빈 방을 나설 때 그 종이를 보면서 그 당시 M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간절한 기원을 저런 식으로 표현했구나. 매일 한 톨이라도 우리 가족의 삶이 나아지기를 저 나름의 방식대로 염원했구나.


 나는 책상 위 앨범에 이런 말들을 적어놨다. 저번에 기억이 안 나서 못 적었는데, 이번엔 눈 앞에 두고 있어서 그대로 옮겨적을 수 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산다.

 직장인 →  전문인 →  지역 유지  →  국회의원  →  (대통령)


 관심과 사랑 그리고 존중 받는 아내가 된다.


 남의 눈과 평가보다는 내면의 소리와 진정한 가치에 초점을 둔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내일 죽을 수도 있으며, 내가 살았던 것으로 인해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또 잔뜩 적어놨다 싶다가도, 목표가 구체화되지 못해서 이렇게 삶이 좌초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직장인 단계에 있고 그 이후 단계부터는 도대체 왜 단계별로 적어놨는지 알 수 없는 조합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텐데. 꼭 전문인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을 거고. 경험의 폭이 너무 좁다보니 이런 걸 갖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나는 보통만큼만이라도 잘 살고 싶다.


아침에 늦잠(나는 늦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고 늦은 아침 먹고 (이 사이에 많은 대화) 빠른 점심 먹고 준비해서 가족끼리 영화보러 갔다 왔다. 외할머니 댁과 친할머니 댁을 차례로 들렀고 집에 와서 각자 방 안에서 책을 읽거나 잠에 바로 들거나 청소를 하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반쯤 심심하고 반쯤 과거를 반추하면서 뭘할까 고민하거나 하다가 이 시간이 되었다. 다들 이제 자러갔고 나는 목이 칼칼하여 꿀물을 타서 한 잔 마시고 있다. 명절에는 살이 찐다던데 삼시세끼 다 챙겨먹고 갈비 먹고 떡국 먹고 고깃국 먹고 곶감에 배 사과 귤 레드향까지 있는 거 없는 거 다 집어먹어서 그런 것 같다. 팝콘을 영화관에서 샀는데 한 톨도 안 먹었다. 대신 밤을 먹었다.

 스타벅스 커피를 두 번이나 먹었는데, 마트에 가서 장을 보면서 (마트 이름이 농민이어서 난 여기 어민이나 광부는 없냐고, M과 S는 귀족은 없냐고 하며 박장대소 했다) 또 커피를 사왔다. 아마 내일 먹게 될 것이다.


 랍상소우총과 포트넘 메이슨 퀸 앤, 피치 티를 얻어와서 오늘은 랍상소우총을 난생처음으로 마셔보았다. DD는 이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티라고 했다. 가족 중에 신문물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이 S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맛들은 본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제 나이에 결혼해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남들 느끼는 즐거움 다 느껴보라고, 28살이면 이제 가야한다고 M에게 얘기하며 넌 늦었다고 하신다. 아버지 저도 옆에 있는데 말입니다, 라고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나는 상처받지는 않았고 그냥 생각했다.

 M의 예전 직장 동료가 레즈비언인데 동성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린다. 카톡 프사를 웨딩 스냅으로 해두었는데 둘 다 여자이다. 전에 M에게 만나자고 얘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진 이 대화 타래를 전혀 이해 못하는 눈치였고 M은 신기해하면서도 약간 무서워했다. 나는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S는 신기하다고 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느꼈다.

 세상이 많이 바뀌는 김에 그럼 결혼 안 하는 것도 괜찮을 지 모른다고 말하는 내게 아버진 내 눈을 보며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다가는 너 시집 못 가,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냥 못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러고선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한 사진작가가 찍은 웨딩 스냅사진들을 열심히 구경했다. 한 20분째 구경하고 좋아요를 잔뜩 눌러놓고선 생각했다. 아, 이거 아니지. 나는 인생의 중요한 결단들을 내리고 싶은데 아직도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아직도 지나간 사람들을 미련맞게 못 잊어 하면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 유령들을 잔뜩 껴안고서 기도하겠다고 앉아있는 꼴이다. 명상이 될 리가 없잖아. 공부가 손에 잡힐 리가 없잖아. 어머니가 내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물어서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나 스스로에게 상처 받았다.

 

 나는 나 혼자만 돈에 구원 받고 싶은 건가, 나만 이렇게 솔직하지 못한 채로 지그재그인건가 싶어서 서글펐다. 찬 바람이 들어오는 방을 만든 사람들도 버젓이 잘만 살아간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멀어져 간 사람들도 다 결혼하고 애 낳고 잘만 산다. 내 인연의 끈을 함부로 나눠주어서 내게 남은 게 쭉정이 실 뿐이다. 이걸로 뭘 이을 수 있을까? 나는 특히나 절망에 빠져있고 이런 절망을 그렇게 티 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꾸 파도처럼 덮쳐오는 실의에 넋 놓고 당한다. 소나기처럼 울고 나면 괜찮은데, 이 답답함이 언제 해소될 진 모르겠다.


 보고 싶다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보고 싶다는 말이 없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보고 싶다는 말 대신에 되도 않는 요구를 하는 사람은 차단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래 전에 했어야 했는데. 나한테 제일 가까이 와서 내 인생의 물꼬를 바꾸게 하고선 제일 멀리 멀어진 그 사람을 차단했듯이, 바로 차단해버렸어야 하는데. 차단이 너무 늦었다. 나는 내가 알기로는 보통만큼만이라도 잘 살고 싶다.


 외할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제 친할머니가 암에 걸렸고, 국가에선 암 환자들을 곧잘 지원해주는 편인가보다. 우리 집 기둥 뿌리 네 개 다 뽑을 줄 알았는데 한두 개 정도면 어떻게 해볼 만도 하겠더라. 살아봐야 아무 좋은 것도 없는데 일단 살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것, 그게 참 애상했다. 아프면 결국 건강하기를 원하고 늙으면 건강이 더욱 소중해지고 건강이 전부가 되는 것 같다.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간결하고 값진 말은 아마도 '건강해라'일 것인데, 그 건강이 사실 참 쉽지가 않다. 몸 건강, 마음 건강 모두 챙기기가 쉽지 않다.


 만화 추천을 받았다. 언제 챙겨 읽어봐야지.


 일단 몸 건강을 위해서... 더 쓰고 싶지만 컴퓨터를 꺼야겠다.

 떡국, 갈비, 곶감, 사과와 배, 커피, 영화, 팝콘, 꿀물, 시금치, 도라지, 더덕, 김치, 김.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틀니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 애상함이 꽤 평범한 것 같아서 안심도 하면서. 일단 잠을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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