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 이렇게 주체적인 입장으로 와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장례식장에 갔었고, 그곳에 있어봤자 고작 1시간이 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달랐다. 나는 3일장 내내 이곳에 있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나는 친가 식구들 입장에서는 귀한 손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친족 중 누군가가 죽어야만 볼 수 있는 그런 귀한 손님.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실컷 보고 난 후 나는 휴대폰을 충전하기 위해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귀한 손님인 나는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장례식장을 마음껏 누빌 수 있었는데, 그래봤자 나는 일상 가용 면적이 한 평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구석에 조용히 처박혔다.
장례식장은 아주 큰 규모였다. 할아버지가 당신 아내를 보낼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런지 일단 제일 좋은 것만 고집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인데 이상하게도 로맨티시스트이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자신 때문에 병원에서 떠났다며, 자신 때문에 객사했다고 울고 계셨다. 할머니와 동갑인 할아버지도 연세가 90이니, 정말 옛날 사람이긴 했다. 병원에서 죽었다고 객사라니. 그래서 죽어가는 할머니를 굳이 집에 데려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고집보다 할머니가 빨리 떠나셔서 결국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놓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의 마지막 모습은 가장 좋은 것으로만 해 주려고 장례 지도사를 만나 계속 잔소리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다. 하지만 상주는 남편이 될 수 없다. 놀랍게도 상주는 장남이었다. 나이가 마흔이 가깝도록 장례 문화 자체를 몰랐던 나 자신에게도 놀랍지만 아버지가 상주인 것을 모든 가족이 참고 견디고 있는 모습이 더욱 놀라웠다. 사실 아버지가 상주인 줄 알았다면 아마 나는 할머니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도리’를 다해야 하니 아마도 왔을 것이다. 아마 알았다면 오는 길이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무지로 인해 잠깐의 안심을 얻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할머니 살아생전에 그렇게 속을 썩이던 아버지가 상주라니. 아이러니하다.
할머니는 물질적인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남기지 못했다. 할머니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고,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을 90 평생 갖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신다고 해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남겨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할머니의 유품이나, 그녀가 자손인 당신들에게 남겨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고, 그것을 굳이 물어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나의 할머니는 말 그대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하신 것이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신 것. 물론 모든 죽음이 다 그러하겠지만 할머니는 살아 계시면서도 자신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이 가벼웠을 것이란 걸 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무거웠고 시끄러웠다. 그녀의 삶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건 그녀가 낳은 3남 3녀의 자녀였고, 자신을 너무 사랑했지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던 동갑내기 남편이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시집와 부딪히며 배워야 했던 집성촌에서의 삶이었다.
처음으로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할머니가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면 할머니의 삶은 어땠을까? 그 당시에는 당연했던 조혼의 압박이 할머니의 목을 조르지 않는 시대였다면, 계속된 출산과 육아로 자기보다 타인을 우선시 둬야 했던 삶이 할머니의 20대에 없었다면 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갖고 세상을 보았을까?
할머니는 여자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딸 낳아봤자 뭐에 쓰겠노?”
할머니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는 갓 태어난 당신의 딸이 허무하게 죽었을 때도 슬프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할머니는 3남 3녀를 낳으셨지만 그중에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3남 2녀였다. 나에겐 고모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이름도 없는 그 고모가 태어나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어린 고모는 죽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답답한 이유였다. 갓 태어난 고모와 아직 3~4살 밖에 되지 않았던 막내 삼촌이 함께 낮잠을 자다가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아기 고모는 숨이 막혀 죽었다고 했다. 정확히 이불로 얼굴을 덮은 것인지, 배에 발을 올린 것인지, 손으로 목을 친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고모는 세상을 떠났다.
“할매는 그때 안 슬펐어요? 주야 아재가 밉고 막 그러지 않았어요?”
“에이, 딸 그거 있어봤자 뭐 할끼라꼬. 슬프고 밉고 그런 거 없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아기 고모의 이야기의 결론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내가 10살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정말 할머니가 고모도, 손녀들도 미워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할머니와 정을 붙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서서 할머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어설프게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할매는 고모 삼촌 몇이나 낳았어? 우리 아빠랑, 성이 아재, 주야 아재, 숙이 고모. 미야 고모 이러면 아들 셋 딸 둘이가?”
“아이다. 그 사이에 여슥아 하나 더 있었다.”
질문자는 나였다. 너무나 얄밉고 미웠던 미야 고모가 아빠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오빠가 하나뿐인데, 미야 고모는 오빠가 셋이나 있고 언니도 있었다. 신기했다. 가족을 모두 열 지어 소개받은 적이 당연히 없는 나로서는 할머니가 낳은 아기가 다섯이나 되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그래서 도대체 할머니는 얘를 얼마나 낳은 거지? 명절에 보지 못한 삼촌이나 고모가 또 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진짜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만나지 못할 고모가.
사실 없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할머니는 내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당신의 갓난쟁이 딸에 대해 알려주셨다. 할머니는 그 고모를 잊으신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흔한 말이 있다. 부모는 먼저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가슴에 묻어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딸깍 딸각 걸리는 가시처럼 아프게…, 아프게… 심장을 긁어 댄다는 것을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내가 할머니께 이 질문을 던졌을 나이가 할머니 나이가 육십을 바라보던 때였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 세월 동안 계속 가슴에 고모를 넣어놓고 꺼내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고 생각을 해보니, 할머니는 다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슬픔과 기쁨을 타인에게 늘어놓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다. 그건 할머니가 과묵한 성격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을 제대로 성장시키기 못한 것 같았다. 특히 본인 내부에서 생성된 감정은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고, 혹시 그런 감정이 내부에서 생성된다고 해도 할머니는 외면하거나 거친 말로 짓눌러 버린 것 같았다.
부잣집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 잘한다, 잘한다 칭찬받아오던 할머니가 시집온 곳은 사연 많고 나이도 많은 동서들이 셋이나 있는 집성촌의 시댁이었다. 나이가 부모 뻘로 차이나는 큰 형님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는 신랑을 기다렸고, 자기보다 10살은 많은 작은 형님은 할머니를 놀리는 맛으로 살았던 것 같았다. 물론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몸과 재물만 갖고 온 어린 동서를 반길 이들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굳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곰살맞은 짓을 하지 않아도 사랑만 받아오던 할머니는 나이차이 한참 나는 세 형님이 무서웠을 것 같다. 그리고 시어머니보다 더한 형님들의 시집살이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새댁은 당해 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여자로 태어난 자신의 인생을 덧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아도, 결혼으로 생활의 터전이 바뀌고 나면 화려한 왕실에서 도도한 공주로 살다가 갑자기 관비가 돼 비천한 삶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니 말이다.
문득 엄마가 나를 낳고 울었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 엄마도 같은 기분이지 않았을까? 나와 같은 삶을 살아갈 딸에 대한 연민. 그래서 나는 나름 재밌는 삶을 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시대가 날 재밌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많이 변해줬다. 어머니는 변화하는 시대에 내가 뒤쳐지지 않도록 교육에 아낌없는 지원을 쏟아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처럼, 엄마처럼 여러 가지 엄숙한 억압에 눌려 살지 않고, 시대를 잘 배워 나름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다.
“다 내 탓이다.”
할아버지의 눈물 섞인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할아버지는 문상객과 대화를 나눌 때면 늘 저 말을 하고 계셨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도 했고, 다른 친척들이 왔을 때도 했다. 그런데 이제 곧 자정을 지나 다음 날이 돼 가는데, 늦은 시간에 문상을 온 사람이 아직도 있었다. 새벽까지 장례식장에 있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밤손님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어쨌든 손님이 오자 잠잠하겠거니 했던 할아버지의 염불 같은 구슬픈 자책의 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렸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자신을 떠난 할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계신 듯했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72년을 같이 산 사람이 갑자기 떠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60년을 사시고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는 게 지겹다.”
그 지겨운 삶을 할머니는 무려 12년을 더 이어 살다 노년에 맞은 코로나로 생을 마감하셨다. 물론 코로나로 세상을 떠나신 것은 아니고, 코로나 이후 몸이 급속도로 약해지셨다고 했다.
“내가 마실 갈라꼬 슬슬 나서는데, 할마이가, 내가 몸이 쪼매 이상한 거 같아예라더니 같이 나서자고 하더라고. 그질로 병원에 왔는데 갑자기 저리 갔삤다. 내 잘못이다. 코로나도 내가 옮긴 기다. 내 잘못이다.”
코로나는 잘 이겨내셨지만 뜬금없이 찾아온 합병은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셨던 것이었다. 코로나가 노인들에게 특히 위험하다는 말도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장례식장 포화 상태란 말이 기사로 나오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삶은 그저 그 시대, 시대에 몸을 맡긴 삶이 아니었을까.
태어날 때도 여자 아이라, 그저 살아만 주길 바라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조혼을 하는 시대라 조혼을 했고, 시집살이를 내팽개치고 집으로 도망갈 수 없는 시대라서 견뎌야 했고, 가정을 위해 노동력으로 살아야 해서 남편이 일하지 않는 부분까지 다 감당해야 했고, 시대가 코로나 시대라서…?
할머니가 생각하는 여자의 삶이 이와 같다면, 할머니의 말이 맞다.
“(이런 시대에) 딸(로) 낳아봤자(살아봐야) 뭐에 쓰겠노(어떻게 행복하게 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