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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 Oct 08. 2024

004_할머니의 장례식(4)

  밤은 깊은 어둠을 끌어와 세상을 검게 물들이고, 시간은 할머니와의 마지막 날만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의 밤을 차지한 우리는 밤의 온도보다 냉랭하고 어색한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삼촌과 고모들은 우리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뜨거운 분통을 터뜨리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사실 삼촌들이나 고모들이 왜 언성을 높이고 대화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것이 싸움인지, 반가움 인지 혹은 어머니를 보내는 마지막 밤을 보내는 그들 나름의 애도인지.


“역시… 쉼 없이 시끄러우시네.”


나는 우리의 냉랭한 분위기를 다독이려 어색한 몇 마디를 툭 던져 보았다. 그러자 이 테이블에 모인 여덟 명 모두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그러게요~’를 연발하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엄청난 내향형 집단. 부모와 상반되게 큰 아이들. 어쩌면 다행이다. 부모님들이 언성을 높이는 모습이 보기 싫었으니, 다들 서로의 반대로 큰 게 아닌가. 어쩌면 삼촌이고 고모들이 아이들을 잘 키워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여기 앉아서 뭐 하면 되노?”


나는 2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벌어진 나의 혈족들에게 급하게 친한 척을 해보았다.


“모르겠어요. 근데 저 언니 누군지 기억이 가물가물 해요.”


나의 사촌이 나를 수줍게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는 뭐…. 저기 할머니 큰 아들 딸이고…. 나는 근데 요기 막내 빼고는 다 기억나는데? 선이랑 정이랑 둘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갖고, 한 자리에 눕히면 안 된다고 내가 누워있는 너거들 볼라고 맨달 왔다리갔다리 했다이가.”


  이젠 아가씨가 다 돼서 아름다운 눈매를 가진 두 아가씨를 보고 나는 20년 전 어느 한 때를 떠올렸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두 아기가, 명절을 맞아 시골에 왔었다. 작은 고모의 딸과, 둘째 삼촌의 딸. 작은 고모에겐 첫 딸이었고, 삼촌에겐 둘째 딸이자, 숙모에겐 첫째 딸이었다. 그렇게 딸은 필요 없다고 하시던 할머니는 작은 고모의 딸보다 삼촌의 딸이 낫다며 삼촌의 딸 곁을 지키셨다. 할머니는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재혼한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시집간 막내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얄미운 차별에 나도 두 아이를 차별했다. 사실 시집가기 전 작은 고모의 만행을 모두 알고 있었단 나로서는 그녀의 딸이 예쁠 리가 없었지만, 할머니의 차별은 미운 고모의 딸조차 예뻐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엄마의 품을 떠나면 잠을 못자던 삼촌의 딸은 아침이 되면 내 배 위에 올라와 잠을 자야 했다. 시댁에 온 며느리인 숙모는 부엌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딸을 내 배 위에 올려두고 가버렸던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막 중학생이 됐을 무렵이니, 나는 명절 이틀 동안 배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아기와 함께 잠을 깨야만 했다.


 “20년 전이면 우리 완전 애기 땐데 어떻게 기억해요.”


정이는 조용조용하면서도 말이 많은 아이로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선이는 말수가 극히 적은 아이로 컸다. 나는 그저 눈을 껌벅이며 이들이 내뱉는 첫 언어를 들었다. 아기들이 말을 하는 신기한 기분.


“그렇지. 그때는 당연히 내만 기억하면 된다. 근데, 어쨌든 할머니 장례식장인데, 너거는 뭐 할머니 기억하는 거 없나?”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치 쇼프로 진행을 하듯 주제를 하나 던졌다.


[할머니에 대한 각자의 기억]


사실 이 주제가 오늘의 밤에 가장 어울리는 주제 같았다.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 12시간도 남지 않았으니, 살아 있는 사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가 기억하는 할머니니에 대한 모습을 공유하는 것뿐일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사실 살아있는 이거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자리에 있는 할머니의 손주들은 눈물이 지나치게 무거운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그 무거운 눈물을 끌어올려서 눈두덩을 넘게 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신기한 일이다. 소심하면서 눈물도 무겁다니. 다들 엄청난 내공의 아이들이 아닌가. 어쨌든 나 또한 누군가의 눈물을 보는 것이 달갑지 않은 사람으로, 우리의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계속된 어색한 고요 혹은 담담한 대화뿐일 것이리라.


“할머니요…. 그냥 시골 오면 있는…”


나의 사촌들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 입장에서 막내 손주가 태어난 때가 할머니 나이가 일흔이 넘었을 때이니, 그 아이가 할머니를 제대로 기억할 때쯤이면 할머니가 여든을 행해 가고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할머니도 이 어린 손주들에게 기억되기엔 에너지가 부족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구나. 그렇겠다. 아무래도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훨씬 젊고 건강하셨던 거 같아. 그래서 어린 오빠랑 나랑 집에 남겨두고 그렇게 마실을 다니셨어. 할머니가 집에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할아버지 못지않은 외향형 인간으로 집안에 가만히 붙어있는 분이 아니셨다. 그러면서 아이를 키웠던 기억이 너무도 오래되어서였을까? 교통사고로 아빠는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엄마는 아빠 병시중을 들어야 해서 오빠와 내가 조부모님 댁에 있어야만 했을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빠와 나를 돌보지 않으셨다.    


  오빠와 나는 자식의 안부를 묻는 엄마의 전화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고, 엄마의 전화가 올 때마다 배가 고프다며 울어댔다. 시골의 작은 방에 초코파이가 몇 개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오빠와 나는 엉엉 울며 엄마와 전화를 끊었고, 그때면 앞집 할머니가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셔서는 우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앞집에서 밥을 먹이셨다.


  그때 앞집 할머니가 상당히 화가 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오빠와 나에게는 나름 다정했던 것 같았다. 그때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기는 했지만 앞집 할머니가 너무 무서워서 배만 고프지 않으면 다시는 이 집 안 찾아올 거라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손주새끼들 내팽개치고 두 부부가 놀러 다니는 꼴에 앞집 할머니가 상당히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심지어 손주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말이다.


“참 불쌍타…. 참 불쌍해…”


그러고 보니 앞집 할머니가 자주 오빠와 나를 더러 불쌍하다 했었다. 맞다. 그때 나와 나의 오빠는 참 불쌍한 처지였다. 교통사고로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고, 우릴 양육할 사람이 없어서 이라도 제대로 먹여 달라고 시골에 보낸 것이었는데, 아이의 조부모는 그럴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만 살아계셨어도 오빠와 나는 불쌍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의 할머니를 떠올리다 보니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한창 학습 두뇌를 발달시켜야 할 나이의 아이들을 시골집에 버려두고 어딜 그렇게 즐겁게 다니셨을지. 사실 엄연히 말해서 아동학대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당신네 큰 아들이 죽어가는 데, 그렇게 놀러를 다니고 싶으셨을까?


  나는 다시금 내가 왜 할머니와 정이 없는지 떠올렸다. 늘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다섯 아이를 키우셨지만 다행히 모두가 외향형이었고,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할머니를 붙들고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내향형인 손주들은 할머니에게 익숙했던 방법으로 애정을 갈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제대로 된 감정이나 행위를 주지 못하셨다.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하셨을 때, 앞집 할머니의 손주들은 방학이면 할머니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몰려와서 한바탕 재밌게 놀고 갔다고 했다.


“우째 그래 우린 정이 없노. 앞집에는 그래 우루루 몰려와서, 할매, 할매 해샀는데, 우리 손주들은 앵겨들지를 않노.”


  할머니에게 안겨들기엔 나는 할머니에게 너무 오랜 시간 방치를 당했었다. 앞집 할머니 외에도 큰집 할머니에게 찾아가 밥을 동양 했고, 불을 켜는 스위치가 너무 높아 불도 켜지 못한 채 어두운 방에서 닭과 돼지가 뛰어다니는 것에 벌벌 떨며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에 오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나중에 머리가 크고 나서는 할머니가 못 배운 시대의 여성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학대쯤은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었다. 물론 그것도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라, 다 자란 나이니까 가능한 일었긴 하지만…….



  결국 사촌들과의 토크타임에서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할머니와의 기억을 미화할 것은 찾을 수 없었고,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방치의 기억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바라보고 있는 수면실에 들어가며 한참을 서서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쳐다봤다.


‘그때 왜 그러셨어요?’


  할머니는 당연히 답이 없으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든지, 할머니의 귀신이 보인다든지 하는 그 어떤 불가사의 한 현상도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몇 시간 전처럼 웃퍼 보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진짜 할머니와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할머니에게 남은 앙금을 떼 내는 시간.



무지는 폭력이다.


  할머니를 통해 나는 그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오빠와 우리를 방치라는 학대에 던져두었던 할머니는 한글조차 배우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나는 속상했다. 한글도 모르는 사람에게 당한 방치라는 학대로 오랫동안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기 때문이었다. 아동발달학적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자극을 받지 못한 상태로 유년기의 일부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살짝 멍청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나의 상태가 보통의 친구들과 비슷하게 올라왔을 때, 나는 다시는 나를 그런 안갯속에 던져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내 인생과 내 시간을 남에게 맡기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설령 피를 나눈 가족일지라도, 나에 대한 양육의 의무를 나눠지고 있는 누가라 할지라도, 나는 나를 멍청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 덕에 개인의 무지가 타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자가 그랬다. 바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그건 아마도 어떤 상황이든, 어떤 누구에게도 인생에 지침이 되는 것들을 습득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니 어쩌면 할머니와 나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할머니라는 명사는 애틋함으로 무장한 단어임엔 틀리 없다. 나 또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검정을 할머니라는 명사에서 느끼고 있다.


  하지만 나의 할머니에게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의 어머니라는 점도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물들인 주범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실 머리가 멍한 아이가 학교에서 겪는 일이란 게 뻔하지 않는가. 집단 따돌림이 아니면 은근한 따돌림. 나는 그 시간을 견뎌왔다. 나는 30년도 더 묵은 앙금을 오늘 떼 내보려 한다.


아마 할머니가 완전히 이 세상을 등지는 탈상이 되면, 나 또한 할머니에 대한 이 앙금을 탈탈 털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그러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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