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켜야 할 것
2024년 12월 3일 화요일 밤.
제출 기한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연구재단의 개인연구자 지원사업에 접수할 연구계획서 수정에 여념이 없었다. 계획서를 접수하는 사이트가 마감 시간 근처에 접속이 어렵기로 악명이 높아서 주말 전에 접수를 마치겠다는 계획이었다 (1). 10시 반을 넘긴 시간, 갑자기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마다 당혹스러운 메시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자들을 싸잡아 카르텔로 몰며 연구비를 일괄 삭감하고, 그에 항의한 카이스트 학생을 자신의 학위 수여식에서 끌어낸 몰상식의 결정체가 불법 비상계엄을 발동했다. 국회에 모인 시민들과 국회 내에서 무장 계엄군과 대치한 국회 실무진들, 그리고 신속히 계엄 해제를 결의한 190 명의 국회의원들.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밤마다 다시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내란 수괴와 그 공범들, 방조범들의 소름 끼칠 정도의 반민주, 무논리, 무지성, 뻔뻔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는 다시 연구계획서 앞에 앉았다. 두 달 후면 지난 몇 해 동안 수행해 온 연구에 대한 지원이 끝난다. 연구를 지속하려면, 우리 실험실 학생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하고, 연구 재료를 사고, 분석료와 논문 게재료를 내고, 출장을 가려면, 연구비가 필요하다. 주말 전에 접수를 마치고 토요일에는 시위에 나가려고 더욱더 박차를 가했다. 순간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시국에 계획서를 쓰고 있는 나를 보니 그 이상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학생들과 작업을 계속하면서, 내년 연구비 선정을 진심으로 바라면서도 마냥 긍정 회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올해 정부가 법적 근거도 없이 아무렇게나 삭감한 연구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연구자들이 너무 많았다. 신규 선정 과제 수가 크게 줄어서 많은 연구 책임자들이 지원과 탈락을 반복했다. 연구비를 수주하지 못한 연구자들이 누적되면서 올해 과제마다 경쟁률이 치솟았다. 내년 R&D 예산의 총액을 올해에 비해 늘렸다고는 하지만, 정부가 드라이브하는 일부 사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면서 다양한 소규모 기초과학 연구는 여전히 고사 위기다. 연구자들이 연구에 쏟아야 할 시간과 에너지가 연구비 확보를 위한 서류 작업에 소진되었다(2). 경제적 보상이나 명예를 바라고 기초 과학을 하는 것이 아닌데, 국가가 최소한의 지원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가능성들이 사라졌다.
예산 삭감에 마주한 현장의 과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도 연구자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리는 뉴스들이 계속 들려왔다. 예산 삭감을 주도한 전 차관은 자기 집 근처에서 회의비를 인당 수십만 원씩 쓴 것으로 보도되었다 (3). 기초과학자가 제안하고 이를 지원하는 작은 규모의 연구과제사업을 통으로 날린 정부에서는 무용 전공자가 349억 규모의 연구사업을 수주해 연구비 배분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4,5). 정부가 나눠 먹기라면서 없앤 소규모 연구과제는 연구자들이 짬짜미로 연구비를 나눠먹는 과제가 아니다. 자신의 연구 주제를 제안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과제이다. 349 억의 연구비는 1억의 연구비가 필요한 기초 연구자 349 명의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349 가지의 가능성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와 자기 주변을 기준으로 세계를 본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특활비를 마음껏 쓰고, 규정을 무시한 회의비를 쓰고, 거짓을 말하고, 카르텔을 공고히 쌓으며 그 안에서 실력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온 인사들은 세계를 그렇게 볼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내 데이터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이다. R&D 예산은 한칼에 날려 버린 자가 국회가 대통령실 특활비 등을 삭감한 데 분노하여 이 시국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어처구니없다. 부정선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내란을 일으킨 극우 유튜버의 앵무새와 그 주변의 사악한 인간들이 지난 몇 년간 국가를 좌지우지했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비극이고, 대한민국 과학의 비극이다.
내 과학은 지속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은,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지속하고 있는 과학이라는 작업은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일까? 탑 저널에 논문을 내는 과학자가 아니라면 그 과학은 불필요한 것일까?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은 언제든 중단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난 2년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들이다. 연구비를 삭감하고 연구 사업을 통째로 날려도 과학자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기초 과학은 정부 이외의 펀딩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삭감된 예산이라는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당장 연구가 중단된다. 선정률이 낮아도 누군가는 연구비를 받기 때문에, 연구비를 수주하지 못하면 내 능력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이런 심정으로 내일 지구가 망해도 각자 사과나무를 심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게 옳은 것인지, 지난 2년 동안 나는 의심했다. 과학이란 그런 것인지. 그저 누군가의 지적 사치라면 왜 근대 이후 국가는 기초 과학을 지원하는 것인지 계속 묻고 싶었다.
2024년 12월 첫째 주의 주말. 계획서 접수를 마치고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탄핵 표결을 지켜보았다. ‘민주주의’, ‘자유’, ‘헌법’, ‘기본권’의 수호가 내란 부역자들에 의해 미루어지는 것을 분노하며 보았다.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시민이 발언하고 시민이 외쳐야 함을 보았다. 이 나라에서 시민으로, 과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동료들과 어깨를 겯고 목소리를 높여야 함을 다시 배웠다. 과학 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공기와도 같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참고자료
(1) IRIS 장애 발생 과제 접수 연구자들 큰 불편
홍재화, 헬로디디, 2024.2.4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103321
(2) R&D 예산 삭감으로 과제수 ‘반토막’ 제안서 작성에 매몰된 연구자들
박정연, 동아사이언스, 2024.4.30.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65167
(3) [단독] 과기정통부 “연구비로 식비 쓰지 마” 차관 ‘한 끼 수십만 원’ 쓰는데 연구자 식비 제한령 송복규, 조선비즈, 2024.1.17.
(4) R&D 카르텔은 가까이에 있었다. 임소형, 한국일보, 2024.12.5.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0515590000755?did=NA
(5) [PD수첩] 349억 원 연구비와 교수님, MBC, 2024.12.3
https://www.youtube.com/watch?v=MFEN38BCb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