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그와트 1학년들의 수업 시간. 둥실둥실 깃털을 공중으로 띄우려면 필요한 것은? 정확한 악센트와 부드러운 손목 스냅! 레비오싸~ 아. 니. 죠. 레비오우사~. 어설픈 론 위즐리에게 한 수 알려주는 허마이오니 그레인져의 야무진 발음에 미소가 지어진다. 마법 교실에는 예습을 하고 온 게 아닌가 싶게 한 번에 성공하는 모범생 허마이오니도 있지만, 번쩍하는 스파크와 함께 깃털과 눈썹을 태워 먹는 꼬마 마법사 셰이머스도 있다.
마법사들에게 지팡이, 연주자들에게 악기가 있다면 과학자들에게는?
장비가 있다. 장비,라고 하니까 중후 장대 하게 느껴지지만 과학자들이 분석이나 관측에 사용하는 많은 과학적 도구 (Instrument, equipment, apparatus) 들을 장비라고 부른다. 생물학자의 현미경, 화학자의 NMR 분광기(Nuclear Magnetic Resonance spectrometer, 핵자기공명분광기), 질량 분석기 (mass spectrometer), x-ray 빔라인과 분광기, 천문학자의 전파 망원경처럼 맨 눈으로는 볼 것이라 꿈도 꿀 수 없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작은 것들을 관측하는 데 사용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아니지만, 각 장비마다 관련된 노벨상 수상자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인류의 지식과 노하우가 응축된 자랑스러운 발명품들이다. 대체로 매우 비싸고 매우 귀중해서 비싼 분석료를 지불하거나, 여러 과학자들이 알차게 시간을 나누어 사용하기 위해 계획서를 제출하고 실험을 한 다음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호그와트 1학년 학생들처럼 초보 과학자들은 장비를 다루는 법을 열심히 익힌다. 수업이나 세미나를 통해 장비에 대한 이론들을 공부하지만 실제로 장비를 능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실습이 필요하다. 소중히 만든 시료를 장비에 고정하고 장비를 가동하는 순간, 그때부터 볼 수 없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두구두구! 내가 주로 사용했던 장비는 NMR 분광기인데, 허리가 아프거나 무릎이 아플 때 한 번씩 찍게 되는 MRI (Magnetic Resonance Imaging)와 같은 원리로 분자(molecule)를 구성하는 원자(atom)들의 정보를 정확히 얻는 도구이다. MRI 촬영실 앞에 ‘금속물질 반입금지’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본 적 있을 것이다. NMR 은 그보다 더 강력한 자석을 사용한다. 자석 가까이 갈 때는 크레디트 카드나 손목시계등은 금물이다. 병아리 대학원생 시절, 머리에 똑딱 핀을 꼽고 자석 근처에 갔다가 누군가 내 머리채를 은근히 잡아당기는 느낌에 깜짝 놀랐던 적도 있다. 그때의 나는 대체로 론이나 셰이머스 쪽이어서, 한 번에 둥실 깃털을 띄워낼 재주가 없었다. 선배들에게 실험을 배웠지만 혼자 해보면 여지없이 뚝딱거렸다. 비싼 장비를 고장 낼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고, NMR실의 규칙적인 기계음과 약간의 산소 부족이 나를 평소보다 조금 더 멍충이로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저런 경험을 쌓으면서 조금씩 나도 아무렇지 않게 원하는 스펙트럼을 얻고 후배들에게 실험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 NMR 은 화학자들의 필수품이지만 사실은 물리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개발된 도구이고, 전자제품!이다 보니 양자역학이나 전자기학에 대한 이해도 조금은 필요하다. 화합물의 구조연구에 필요한 다른 도구들은 카메라처럼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반면, NMR 은 악기처럼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자석으로 에너지장을 만들고 시료를 넣으면 시료 안의 수소 원자핵(스핀) 들이 자기장의 방향으로 나란히 선다. 마치 연주를 시작하기 전 잘 정렬된 오케스트라 단원들 같기도 하다. 지휘자의 신호에 따라 연주자들이 악기를 울려 어떤 주파수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NMR에서는 펄스 (Pulse)라는 전자기파로 핵스핀의 방향과 에너지 상태를 제어한다. 대극장의 관객들이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낸 음악을 듣는 것처럼, 컴퓨터 앞의 실험자는 자석 속에 밀어 넣은 투명하고 얇은 튜브 안 분자들의 핵스핀들이 여러 주파수로 공명하면서 내는 신호를 수신한다. 이 주파수는 실제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지만 그래프로 표현된 신호를 보면서 나는 원자들이 내는 소리를 상상하곤 한다. 화합물 안에서 같은 수소 원자라도 결합의 성질에 따라 조금씩 다른 주파수를 내고, 핵스핀들은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면서 분자 구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준다. 다양한 악기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풍부한 소리를 들려주듯이 복잡한 분자의 복잡한 스펙트럼은 나에게 풍부한 정보를 들려준다.
ChatGPT 에게 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원자들을 귀엽게! 그려보라고 했더니 만들어낸 이미지. 귀여운지 잘 모르겠다...
튜브 안에는 물, 세포 안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조금의 염, 그리고 내가 공들여 만들어 낸 단백질 분자들이 들어 있다. 용액 내에서 단백질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구르고 있다. 마치 쉬는 시간의 중학생들 같이 활발한 단백질 분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도 NMR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 NMR 실험의 또 다른 매력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도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단백질 분자들 중 고작 1~2% 만이 다른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그 희귀한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 마치 시끌벅적한 중학교 교실에서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소수의 여린 학생들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선생님처럼. 단백질 분자들이 잠시 머무는 이런 마이너 상태 (minor state) 들은 생명 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과학의 도구는 우리가 평소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하지만 꼭 필요한 순간들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도움을 준다.
Pixabay 에도 펩타이드 구조 그림이 있네? (이미지출처: WikimediaImages on Pixabay)
“제 말씀은, 엑스레이 카메라가 마치 내 눈의 연장인 것 같은,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사물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는 초능력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 있으신가요?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 같은 세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초능력 말입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박사님도 그러실 거라 생각합니다.”
(51번 사진, Anna Zigler 지음/이시연 옮김)
51번 사진으로 DNA 이중나선을 관측한 로잘린드 프랭클린에게 엑스레이 카메라가 그러했듯이 현대의 과학자들도 자신만의 도구를 통해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진실과 순간에 다가가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탐구하는 이들 덕분에 과학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마법이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