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 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중)
시간표에 정해진 수업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전공 실험은 끝이 안 났다. 어느 과 실험 시간이 더 긴지 남모를 경쟁이라도 하는 걸까, 이 건물, 저 건물 학부 실험실들의 불빛은 밤바다의 오징어 조업선 등처럼 꺼질 줄 몰랐다. 화학과도 여기서 빠지면 서운할 터. 합성하고, 칼럼 하고, TLC(Thin Layer Chromatography) 찍고, 성능이 좋지 않은 후드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땐 잠시 복도에서 숨을 돌리고, 실수하고, 다시 하고, 용매 좀 빨리 날리려다 스프링클러에선 물이 쏴. 실험보고서에는 낮은 수율에 대한 이유가 가지가지.
우여곡절 끝에 실험이 끝나면 어김없이 친구들과 “오늘 몸속에 쌓인 화학물질은 삼겹살 기름으로 씻어내야지!”라며 늦은 밤 학교 앞 고깃집으로 향했다. 대패삼겹살에 쓴 소주를 마시면서, ‘아, 아무래도 이걸 계속하기는 어렵겠는걸’, 마음속 경고등이 깜박거렸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이도 저도 아닌 학생은 처음인가요~ (이미지출처: bgphotographyllc on Pixabay)
대다수 화학과 학생들이 선호하는 유기합성, 무기합성을 전공하는 큰 길을 벗어나면 수줍게 숨겨져 있는 오솔길들을 만나게 된다. 아쉽지만 나에게는 유용한 작은 분자들을 합성할 능력도, 관심도, 취미도 없었다.
그렇다. 나는 화학과의 소수 민족이다.
그 대신 단백질이나 DNA, RNA 같은 큰 생체 분자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궁금했다. 가끔 세미나에서 멋진 연구 내용을 들으면 복잡한 생체 분자들에 대한 질문, 나름의 답 모두에 경외심이 들었다.
아예 생물학으로 방향을 틀까? 하는 생각에 유전학을 수강하기도 했다. 그런데, 숙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현실이라면 너무나도 비극적일 복잡한 가계도의 유전병 확률 계산 숙제를 공책에 빽빽이 풀어가기를 몇 주. 난 ‘완전히 붕괴’되었다.
게다가 생물학 전공 실험에서는 쥐를 잡아야 한다! 꼬리를 잡아당겨야 하다니. 앗. 물렁한 몸에 물렁한 정신머리였던 나에게는 차라리 화학과 합성실험이 나을 것 같았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유전학과 쥐 실험이라는 걸림돌을 넘지 못한 채 화학과에 남아 생화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물게 인자하신 교수님과 처음 면담을 한 날 “우리 랩에선 이런 걸 해요.” 라며 보여주신 아름다운 단백질과 핵산의 3차원 구조 사진이 아직도 마음속에 살짝 떠오른다. 매직 아이 보듯이 사진을 보니 입체적인 단백질 구조가 둥실 떠오르고 난 작은 앨리스처럼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ChatGPT 로 그려보았다. 앨리스, 앞 날이 밝아 보이네.
휘발성 유기용매 냄새 대신 대장균 먹이로 쓰는 배지 냄새가 은은히 맴도는 생화학 실험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순한 냄새와는 다르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결코 쉽지 않고 덜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는 폴리아크릴아마이드는 신경독성이 있다고 하고, 원심분리기의 로터는 번쩍 들었다가는 허리 디스크가 튕겨 나갈 것 같은 무게였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연구하다 보면 나도 뚝딱 멋진 구조를 알아낼 날이 오겠지.”
“에헴. 이 단백질 좀 보십시오. 요렇게 생겨서 조렇습니다!"
하고 멋지게 발표할 날이 오겠거니 했지만 현실은 내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제대로 된 결과를 처음 발표할 수 있었던 건 실험실에 들어가고 나서 무려 5년쯤 지난 후였다. 사소한 부주의에 의한 실수부터 원인을 찾으려고 무수한 시도를 반복해야 했던 실패들까지, 많고 많은 에피소드와 흑역사가 랩노트를 가득 채운 뒤에야 내 쥐구멍에 조금씩 볕이 들기 시작했다.
한참 골똘히 몰두할 때면 머릿속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단백질만큼이나 작아져 분자를 마주 보는 것만 같았다. "이건 대체 왜 이러지?" 그때의 뇌구조를 그리면 왜? 라고 쓰인 부분이 가장 넓었을 것이다. 조금씩 새로 얻게 된 결과들은 모두 함께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나누고 어려움을 돌파할 용기를 주신 교수님, 동료들과 더불어 만든 것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기초과학을 하게 될까? 내가 과학을 해서 큰돈을 벌 것이다!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빅뱅이론> <영쉘든>의 쉘든까지는 아니지만 머릿속에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지닌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설명하기 힘든 어떤 것을 관찰하고 도대체 왜 그런지 끙끙대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궁리와 실험을 하고. 그러다 결국
“실험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이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호프 자런, 랩걸 중)
을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들. 그러다가 나만 아는 자연의 비밀이 생기면 그 자체로 잠깐 행복해지는 사람들.
망한 날도 흥한 날도 같이 머리를 맞대며, 혼자서는 이겨내기 어려운 시간을 함께 이겨내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