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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Sep 09. 2024

십자가와 초승달 (제2화)-이슬람 꾸란과 기독교 성경

이슬람 경전 '꾸란'

우리가 어릴 적 이슬람 경전을 '코란'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는 이란 식 발음이다. 아랍어로는 '꾸란'이다. 

'꾸란'은 무함마드에 의해 옮겨진 유일 신인 ‘알라(신)의 말씀’ (계시)를 집대성한 것인데,「’ 알라(신)’는 편의상 무함마드라는 '예언자'의 입을 통해 신이 말하는 형식이거나, 혹은, 무함마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자들에게 저주나 조소, 질책 등 감정을 표시하였다는데, 풍자도 있고 유머도 있다고 한다. 절대로 1인칭으로 말하지 않고, 무함마드를 2인칭으로 항상 칭하였다.」 


이처럼, 꾸란은 ‘무함마드’가 무아상태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구술했다는 데서 유래된다. 무함마드 계시 당시의 말씀은 거의 20여 년이나 조금씩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는데, 이 말씀들이 그대로 획 하나, 점 하나 틀리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므로, 무슬림들은 이를 진정한 '신의 말씀'으로 알고,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여기에는 종파 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러다보니, 꾸란 책 자체를 신성시하므로 이를 훼손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왼손으로 만져서도 안 된다. 여차하면 무슬림에게 죽을 수도 있다.


꾸란에는 ‘알라(신)께서 무함마드에게 책을 내려 주셨다’라는 구절이 등장 (꾸란 3:7, 18:1) 하지만, 정작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까지 ‘꾸란’이라는 책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함마드 생존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꾸란 사본이 2015년 7월, 영국 ‘버밍엄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어떤 이는 ‘무함마드는 글을 쓸 줄 몰라’ 그가 계시를 받으면, 그의 첫 아내 ‘카디자’가 그의 구술을 받아 적었다는데, 그게 꾸란’이라는 설도 있다. 


이슬람 경전 '꾸란', 신약성격만 하다.

또 다른 설은, 「제1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가 무함마드의 제자들이 나뭇잎이나 돌 등에 새겨놓고 암기하였던 언행록을 모두 수집하여 책으로 묶으려 했지만, 이들은 ‘알라(신)가 좋아할지’ 여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AD 653~4년 경이되어서야, 비로소 제3대 칼리프인 ‘우스만’이 무함마드의 생전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 ‘말씀을 기록한 책 (‘꾸란’의 의미가 ‘낭독’한다는 뜻)’이라는 뜻인 원본을 만들었다. 그 후, 원본 꾸란은 차츰 보완을 거쳐 9세기 경에야 비로소 발간되었다」


꾸란의 크기는 신약성경 크기만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꾸란을 편집하다 보니, 역사적 흐름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장 (章, 수라)의 길이에 따라 기계적으로 배열하였다. 즉, 제1장을 제외하고 제2장부터는 제일 긴 장을 먼저 기술하고 제일 짧은 장을 맨 나중에 배열하다 보니, 장의 순서에 따라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기독교의 구약성경이 연대기에 따라 작성되지 않은 것과도 유사하다) 따라서, 20여 년이상 계속된 알라(신)의 계시가 무함마드의 위상과 입장에 따라 영향을 미쳐 작성된 이 경전을 이해하려면, 각각의 장의 절이 계시된 절대적인 연대와 전후관계 및 배경파악이 중요하다. 


예컨대, ‘메카’ 시절의 계시는 어려움과 핍박이 많았으니 아무래도 평화로운 계시가 많았고, ‘메디나’ 시절의 계시는 통치자의 신분으로서 대적자를 제거해야 하는 위치여서, 과격한 내용이 많았다. 그러므로, 동일한 사인이더라도 관점이 다른 내용이 계시된 모습도 보인다. 꾸란은 비록, 여러 가지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은 알라(신)의 영감이 무함마드의 계시를 통하여 구술된 것으로 믿는다. 그만큼 꾸란은 절대적이다. 


AD 7세기의 '무함마드'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고 (무함마드 사후 800년이 지난, AD15세기에 처음으로 유럽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 설령 수기로 쓰인 성경책이 있었더라도 유대어(히브리어)로 쓰였지, 아랍어로 된 성경은 없었을 것이고(?) 무함마드 자신은 아무런 글을 몰랐으니, 직접 성경책을 읽어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성경적 지식은 당시 ‘메디나’에 살고 있던 유대교의 유태인들과 접촉하며 주워 들어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래도 구약 성경적인 기술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은 그런 부분조차도 알라(신)의 계시를 받아 무함마드가 구술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비해, 꾸란의 내용은 성경과 달리, 그 내용이 매우 엄격하고 그 계시를 벗어나면 처벌이 따를 만큼 '율법적'이다.


그러나, 꾸란은 내용 면에서 많은 자기모순과 혼돈을 보이고 있는 내용도 있다. 「여기에는 ‘질문 금지령’과 ‘교리의 취소(만수크)’, 그리고, ‘교리의 위장(타키야)’ 등이 대표적이다. ‘질문 금지령(꾸란 5:101)’은, 동일한 사안(예를 들면, 성경이나 기독교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메카에서 내린 계시와 메디나에서 내린 계시가 180도 다르다라며, 이에 대한 질문이 계속 나오자 무함마드는 ‘알라(신)의 계시’라고 하며 질문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러고도, 사람들의 궁금증이 해소가 되지 않으니, 이번에는 ‘두 구절이 모순이 있을 때는 이전 계시는 나중 계시에 의해 취소되는’ 계시를 내려 주었다 한다. 이것이 ‘교리의 취소’(꾸란 2:106)이다. 그리고, ‘교리의 위장’(꾸란 2:225)은, ‘안전을 위해서는 진실을 숨기고 위장해도 좋다’는 것인데, 알라(신)는 ‘비 의도적인 맹세는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필요하다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거짓말을 하도록 허락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알라(신)의 영감이 무함마드의 계시를 통하여 구술된 것이니, 당연히 ‘완전 무결한 책’이라고 말한다. ‘이 꾸란은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인하여 있을 수 없으며, 이전에 계시된 것을 확증하고, 그 성서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계시되었으니, 이는 만유의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의심할 바 없느니라.’고 그 존재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아, 가령 너희들이 내 종교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있어도, 나는 알라(신)를 제쳐 놓고 너희가 숭배하고 있는 것을 숭배하지 않는다…’(꾸란 10: 104)


하지만, 경전의 한 점, 한 획에 집착하는 ‘문자적 신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말씀이 ‘우상’이 되게 한다. 어떤 종교는, 우상으로 인해 교파 간의 불화와 갈등이 조장되었고, 말씀의 논쟁으로 평화를 잃어버렸고, 신이 아니라 종을 섬기는 꼴이 된 종교도 많이 있었다. 


특히, 꾸란은, ‘7세기 아랍어’를 고집하면서 번역을 금하였고, 아랍인은 문맹률이 높아 많은 무슬림은 자신이 믿고 있는 꾸란의 내용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원래 원본만을 고집하던 이슬람은, 최근 번역을 허용하여 각 나라, 지역의 맞춤형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렇지만, 아랍어외 다른 언어로 번역된 책들은 원래 계시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거나 미화하여 번역하는 등, 번역본의 해설서로는 본래의 의미를 모를 수도 있는 구조라고 한다. 사실, 한글판 번역본도 ‘김용선 역', ‘최영길 역’, ‘파하드국왕 꾸란 출판청 한글역본’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같은 장의 같은 절이더라도 번역자에 따라 번역내용이 다소간에 상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슬람은 아무나 꾸란의 내용을 읽고 각자의 생각대로 해석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반드시 ‘이맘’이나 이슬람 학자들의 입을 통하여 해석된 것만을 믿도록 하고 있다. 즉, 누군가가 꾸란을 읽다가 '불신도 등에게 잔인한 행위를 가하는' 등의 구절을 읽고 '내가 믿는 종교가 이런가?'라는 의심이 든다면, 그런 생각을 버리고 ‘이맘’이 해석해 주는 구절을 바로 따르는 게 바른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중세 서구에서 어려운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사제들만이 읽고 이를 일반 신자들에게 해석해 준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꾸란과 성경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구약 성경'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선지자의 관점에서 여호와와 관련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정작,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이 불경이라고 여겨서, 원래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자음은 놔두고 모음을 바꾸어 불렀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지칭하는 ‘야훼(여호와)’라는 단어였다. 이에 비해 이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라(신)’라고 칭하였다.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 성경'은 선민의식에 가득한 유대인들이 따르는 율법적인 부분과, 야곱의 자손인 12지파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헬라'어로 쓰인 '신약 성경'은 그런 율법이나 혈통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공생애와 제자들의 전도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이 나올 당시의 중동은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아서, '땅끝까지'의 이방인에 대한 전도에 비중을 두었기에 '헬라'어로 쓰였다. 

기독교의 성경은 AD15세기에 처음으로 유럽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고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독일어 등 각국 언어로 번역되고 보급되었다. 'Bible Gatway' 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읽혔다는 성경책은 현재 기준으로 인터넷상에서만 약 50여 개의 언어로 쓰인 150여 개의 버전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이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사용하다 보니, 기독교도의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결국 다양한 분파로 분화되었다. 신앙에 혼동이 오는 이유이다. 우리 기독교도, 한글개역판이 나오기 전 사용되었던 옛 성경책의 경우, 중국에 있던 독일어 선교사가 중국어로 만든 성경을 다시 한국인이 아닌 선교사가 한국어로 번역하였다는 설도 있으니... 아마도, 상당한 번역상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애매할 때는 헬라어가 안 되면 영어버전이라도 읽어보는 게 더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성직자는 그런 한글 성경의 자귀 하나하나를 외우며, 그에 대한 심층 깊은(?) 해석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슬람은 그들 스스로 기독교와 그 뿌리가 같다고 말하지만, 조상은 같을지 모르겠으나, 꾸란과 구약 성경의 부분 부분을 비교해 보면, 어떤 주제는 같으나 구체적인 내용에서 그 기술이 완전히 다른 것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경위가, 구약성경은 형제가 팔아넘기는 것이지만, 꾸란은 우물 속에 던져버려 진 뒤, 지나가던 대상이 우연히 발견하고 (꾸란 12: 19) 또, 눈을 먼 ‘야곱’이 눈을 다시 뜨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꾸란 12: 93-96). 번제의 경우, 꾸란은, 당시 열 살이던 ‘이스마엘’을 메카 근처에서 번제로 드리려 했다고 하지만, 구약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생자인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기술한다. 또한, 꾸란은 ‘예수’의 존재에 대해, 신비로운 출생 (꾸란 3:45)과 친척관계, ‘마리아’의 수태고지, ‘예수’가 행한 이적과 십자가 사건 (꾸란 4:157) 그리고 승천 (꾸란 3:55) 등을 여러 개의 장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선지자 중의 한 명으로 보고 있다 (꾸란 5: 75). 


특히, 기독교에서 (삼위일체론 등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적 사실을 강조하지만, 꾸란은 하나님을 다른 어떤 존재와 연결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 (꾸란 5: 72-73)며, 이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 알라(신)께서 ‘아들을 두셨다’니…? 이 얼마나 불경한 말인가? 알라(신)께서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다…’, ‘… 알라(신)께 거짓을 날조하면 번성하지 못하리라…’ (꾸란 10: 68-69) 등등으로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아주 질이 나쁜 죄악’이라고 수많은 구절에서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성경 원문이 변조되었기 때문이라 주장하면서, 무함마드를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성경책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는 바이든 대통령

이슬람과 달리, 기독교도는 강한 어조로 무슬림과 그 조상부터 전혀 다르고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알라는 여호와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알라(신)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꾸란 5:73),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며 (꾸란 5:75),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고 (꾸란 4:157), 유대교와 기독교를 적으로 간주하며 (꾸란 5:51),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며 (꾸란 4:3), … 비무슬림들이 무슬림이 잔인하다는 것을 알도록 싸우라 (꾸란 9:123)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적 차이는, 두 종교 간에 상호 불신의 계곡을 만들어, 공존은 바로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슬람은 기독교를 공격하고, 기독교는 이슬람을 이단으로 단정하여 오랫동안 종교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책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미국은 기독교 국가 임이 분명하며, 무슬림들의 경계대상이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인샤알라(신의 뜻)'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자신이 불리하다 싶으면, 언행 불일치나 계약 위반 등을 밥먹듯이 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외국인은 이 말을 가장 무서워 하는데.. 이런 무슬림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말은, "알라께 맹세코...?" 혹은 "꾸란에 맹세코...?"이다. 그들에게 알라나 꾸란은 절대적이다.  


쇠퇴하는 서구의 교회(출처: 기독일보)

이처럼, 무슬림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지만, 서구의 기독교는 점차 쇠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서구가 한때 그토록 열성껏 믿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제 그 영향력이 미미하고, 종교적 관심도 예전 같지 않다. 예컨대, 건립되는 교회 수가 많지 않고, 교회에 가보면 주일 예배나 미사 시간조차 좌석이 듬성듬성하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종교대신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회는 자연스레, 무슬림 등 주변인의 종교적 행위에 별다른 존중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저들의 의상인 '히잡조차 이슬람의 상징으로 알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비록 한뿌리에서 왔다지만, 이제, 두 종교의 간극은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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