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알라(신)’께 복종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추구하는 종교라고 주장한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꾸란은, 이슬람교도들에게는 현세의 보상과 내세의 보상, ‘지옥 불’ 등을 언급하며 ‘착하게 살라, 바르게 살라, 그리하면 알라 신의 관용과 자비, 그리고 사랑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무슬림의 경건한 생활도 어찌 보면 이처럼 보상에 대한 기대와 무서운 ‘지옥 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구인들은 이슬람의 확장을, ‘꾸란이냐, 칼이냐?’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이는 이슬람의 급속한 세력 확대에 놀란 이슬람에 대한 공포’(이슬라모포비아)'의 시각이다. 일반 서민들에게 이슬람의 '호전성'을 경계하도록 한 것인데... 그런데, ‘한 손에 꾸란, 한 손에는 칼’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무슬림은 오른쪽과 왼쪽 손의 용도가 확실히 구분되는데 만약, 오른손에 칼을 들었다면 왼손에 코란을 들었다는 의미인데, 신성시하는 코란을 왼손에 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실이다. 이 표현은, 아마도, 개종이냐? 정복이냐? 의 관점에서 ‘정복당해 개종당하기 싫으면 싸워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은 것 같다.
실제, 이슬람은 어느 국가나 부족과의 전쟁 전에 반드시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기존체제를 유지하게 해 준다는 외교적 협상안을 제시한다. 물론, 세금납부와 군사적 종속은 당연한 조항이고... 하지만, 만약, 상대가 협상에 불응하면 '전쟁'이라는 수단을 적극 활용했다. 이슬람 제국이 단기간에 급팽창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사막의 유목민 전사인 '모함마드'가 검을 앞세우고 창시한 종교로서, 종교의 경전인 꾸란에서도 당연히 군사적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유일신을 믿는 무슬림들은 꾸란이 ‘신의 말씀’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꾸란의 모든 가르침은 이들에게 절대적이었다. 만약에, 꾸란 자체가 이교도나 상대에 대한 배려와 포용이 전제되어 있다면 충분히 화합과 상생을 통하여 피할 수 있는 폭력조차도, 유일신을 믿는 이들은 ‘알라(신)'께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즉, ‘이슬람을 믿지 않는 자’를 개종시키거나, ‘거부하는 자’를 다 죽이라고 하는 계시에서 출발하므로 폭력만이 유일한 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꾸란의 폭력적 내용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범위가 ‘전부가 제거 대상’이라는 점이고, 이는 여느 종교와 사뭇 다른 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이교도 배척의 교리는, 이 계시가 나온 모함마드 당시의 메카나 메디나 지역에서 당시 토호세력이던 유대인들과의 투쟁에서는 불가피하였으나, 모함마드의 사후, 이슬람 제국의 확장기에는 소수의 아랍인들로서는 절대다수의 정복지역 피지배인을 이교도라고 무조건 척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한 듯, 앞서 이슬람의 관용성이나 포용성에 대한 여러 가지 예와 '살라딘'에게 항복하였던 십자군 왕과 기독교들을 석방한 예에서도 보았듯이, 비이슬람교도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꾸란의 계시에 따라, 개종하는 자에게 커다란 관용을 베푸는 한편, 항복 후에도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인두세 등의 방법으로 이를 허용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위장전술' 탓일까? 근세 들어 이슬람의 과거 영광을 재현하려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특히,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꾸란의 계시를 한 획, 한 점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따르자면서, 이런 부분을 확대 해석하여 ‘이교도, 불신자 제거, 이슬람 법이 없는 영토의 정복’ 등 극단적인 사상으로 무장하여, 원리주의 왕정의 지원을 받아 중장비까지 갖추고, 아랍 형제국들은 물론, 타 종파인 시아파조차도 제거 대상으로 삼아 공격하는 극단성까지 보이고 있다.
사실, 꾸란에는 이교도에 대한 살인 등 과격한 폭력을 명령하는 계시가 다수 있다. 이슬람이 이교도 처단을 합리화하는 것은 ‘이교도 배척 계시’와 ‘공격적인 교리’ 때문인데, 이와 관련되는 계시들에는, 불신자나 이교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종교의 경전에 저런 내용이 기술될까?' 싶을 정도로 아주 공격적이고 잔인한 표현도 많이 나온다.
예컨대, 꾸란 9장에는, 이교도와 불신자에 대해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서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지상에 소란과 커다란 부패가 만연하게 될 것이다.(꾸란 9:73, 김용선 역). ‘너희들 가까이 있는 불신자들과 싸워라.’(꾸란 9:123) ‘…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려라…’(꾸란 9:5)등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고, 상대가 ‘…. 이슬람으로 개종을 반대하면 처형을 의무화하고 있으며, 십자가 또는 손과 발을 절단하는 처형을 가하거나 추방할 것을 명령….’하고 있고(꾸란 5:33), ‘… 참된 종교를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인두세를 낼 때까지 싸워라.’(꾸란 9:29)며 강제 개종을 강권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 평화란 상대가 이슬람을 받아 개종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전혀 의미가 다르다.
꾸란에서 이교도나 불신자를 배척하라는 계시의 또 다른 예는, ‘너희들을 대적하는 사람들과는 알라의 길을 위하여 싸워라.’(꾸란 2:190), 또, ‘알라(신)'께서는 계산이 아주 빠른 분’이라며(꾸란 3:199), ‘살게 하는 일이나 죽게 하는 일이나 모두 알라 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꾸란 3:156)고 하며, ‘내 길 때문에 상하고, 죽은 사람들, 이런 자들이 어떤 나쁜 일을 하였다 해도, 이것을 사면하여 내세의 낙원으로 들여보내겠다.’(꾸란 3:195) 즉, ‘신’의 곁에 있게 하겠다고 계시한다.
꾸란은 이교도 중에서도 특히, 반유대 정서를 가르치고 있는데, ‘…. 무슬림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을 친구로 삼지 마라. 그들은 서로의 친구라. 누구든 그들과 친분을 구하면 그들의 무리가 될 것이며 신은 잘못을 행하는 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꾸란 5:51), ), ‘…. 그대는 믿는 자에 대해 더 심한 적의를 가진 것이 유대교도와 다신교도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꾸란 5:80) 이처럼, 이슬람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극단주의자들이 서구인에게 비인도적인 테러를 가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선량한 무슬림들은 폭력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교리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슬람은 또한, 이교도들에게 무력을 사용하여 정복과 개종을 병행하였지만, 불신자 - 종교가 없는 사람들 – 들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은 ‘불신자’들을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는 ‘예측 불가능아’로 바라본다. 어떤 면에서는, 무슬림들은 이런 불신자보다 오히려 이교도를 더 신뢰하는 편이다. 어떤 종교라도 종교를 믿는 자를,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자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교도 배척’의 계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는 모든 이교도를 죽이고, 제거해야 할 테러의 대상으로만 해석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나, 무슬림들은 누구나 꾸란을 암송하고 이를 생활 속에서 따르기 때문에, 선량한 일반 무슬림들도 ‘이교도 배척’ 계시를 암송하다 보면 이런 행위들이 별생각 없이 받아들여져 테러 등으로 이어질까 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종교적 가치관의 왜곡된 구조와, 폭력성은 어느 국가, 테러 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교일치를 지향하는 국가 모두 같은 연장 선상에 위치해 있다.
경건한 신앙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며 종교를 부정하였던 불신자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와는 상극이랄 수도 있겠다. 냉전시대에는 무신론자들과 특히, 아프간을 침입한 소련 등 공산주의자와 적극적으로 싸우기 위해 많은 나라에서 자원자가 들어왔다. 이들은 냉전이후에는 서구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로, 하나님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불신자’로서 자신들 마음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무신론적 서구인의 세속적인 모습에 대해 경멸이나 분노를 넘어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테러가 자행되는 이유이다.
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자신이 약할 경우, 이슬람을 공격하는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신의 뜻을 위한 성전’이라는 ‘지하드’의 개념을 적용하였다. ‘지하드’도 처음에는 이슬람을 공격하는 자에 대응하기 위한 소극적인 개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교리때문에 이교도나 불신자와 싸우는 것을 ‘신성한(?)’ 전쟁이라며, 이 와중에 숨진 테러리스트를 ‘지하드(성전)’를 수행하던 ‘무자히딘(전사)’으로 추앙하였고, 이들은 알라(신)의 계시로 구원되는 지름길로 간다며, 자극적인 용어로 ‘지하드’ 론에 힘을 실어 줬다.
게다가, 꾸란은 전투에서 도망치거나, 불신자와 교류하거나, 배신자나 이교도에 대해서는 ‘말살’ 등의 격한 표현으로 알라(신)의 감정을 일일이 적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적대감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물론, 상당수의 선량한 무슬림도 공유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부정적인 ‘이슬람적 서구관’을 가지고 있는 무슬림 중 누군가가 ‘불신자’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더라도 아무도 이를 비난하지 않는다.
꾸란의 전체 6,236개 절 가운데, ‘전쟁과 관련한 구절’은 109개나 된다고 한다. 약 2% 가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비중이다. 그런데, 군인이라면 누구나, 꾸란의 계시 중 일부 내용은, 종교의 성서이기 이전에 ‘전쟁터의 교범’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전투와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성경에서도 물론, 많은 전투를 다루었다. 하지만,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고 언급하고 전쟁의 과정이나 결과만을 언급하는 데 비해, 이슬람은 전투수행 방식까지도 세세하게 지도하는 등 매우 구체적이다.
특히, 꾸란의 ‘메디나 계시’는 전쟁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는데, 제8장 ‘전리품의 장’이 그 대표적이다. ‘전리품의 장(제8장)’은, AD 624년 무함마드가 그의 숙적인 메디나의 대상을 약탈하려다가 메카군과 충돌하며 치른 ‘바드르’ 전투를 중심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 장은 마치 군인들이 훈련을 실시하고 나면 한 국면, 한 국면을 되돌아보고 사후강평을 하는 것처럼, ‘알라(신)’가 당시의 전투 상황을 언급하고 계시를 내리고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다음은, 제8장 ‘전리품의 장’에 나온 내용의 일부이다.
꾸란에는, ‘… 믿지 않는 자들이 진군해 오면 그들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다음 싸움 준비를 한다든가 다른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서라면 별 문제지만, 그날의 적에게 등을 보이는 자는 반드시 알라(신)의 노여움을 사고, 무서운 지옥의 불로 떨어진다. 너희가 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알라(신)께서 그들을 멸망케 하신다.’ (꾸란 8: 15-17) ‘…. 그때, 양쪽이 맞붙어 싸울 때 너희들 눈에는 저쪽이 소수로 보이고, 그들의 눈에는 너희를 아주 작게 보이게 하시었다. 그것은 알라(신)께서 처음부터 … 정하신 일에 대해 최후의 맺음을 맺기 위해서였다. 모든 일은 결국 알라(신)께 돌아간다.’ (꾸란 8: 44)
그리고, ‘전리품을 나누는 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으며’ (꾸란 8: 41), ‘적군을 만나면 몸가짐을 단단히 하고…. ‘(꾸란 8:45) 또, ‘믿는 자들을 모아서 전쟁터로 향하게 하여라. 너희 중 인내심이 강한 자가 20명이 있으면, 200명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만일 너희가 100명이 있으면 믿지 않는 자 1,000명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꾸란 8: 65)
또한, ‘그대가 전시에 믿는 자 가운데서 예배를 드릴 때 일부는 무기를 소유한 채 적을 향하여 경계하도록 하고, 그 일부가 예배를 마쳤을 때 다른 일부를 그들의 위치로 오게 하여 그대의 후미에서 경계하도록 하고... 적을 추격할 때 약한 마음을 갖지 말라. 너희가 어려움을 느낄 때 그들도 너희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느니라…’ (꾸란 4: 102)
꾸란의 불신자와 이교도에 대한 이런 전투적 가치관은, 식품과 물이 모자라는 사막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시에는 남의 것을 뺏는 방법밖에 없다는 당시 사막의 율법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이슬람 국가들은 군사력 건설에 매우 공을 들인다. 실제로 이들 국가에서 군인의 비율은 서구의 그것에 비하여 월등히 높고, 인접국가와 문제라도 발생하면 언제든 군사력 동원을 내세울 정도로 호전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