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말, '이슬람 공포증'을 극복한 서구 기독교 사회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터키'의 동 로마제국 함락에 이은 이슬람과 기독교(구교) 세력의 세 번째 대결이, 서구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현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벌어졌다. 유럽 한가운데 위차한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유럽 역사의 큰 부분이다. 비록, 흘러간 제국의 영광이지만 '음악과 예술'의 도시만큼이나 '비엔나'(빈)의 역사 관련 볼거리, 알 거리는 방대하다. 유학생이 많아서였겠지만, 우리나라에도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잘 아는 분이 꽤 많은 것 같다... 잠실(신천) 등 서울 여러 곳에 가다 보면 '1683'이라는 이름의 비엔나식 커피숍이 많이 있다. 1683은 비엔나의 영광이니까...
1683년 당시, '비엔나'는 유럽 문명의 주류였던 로마제국의 계승자인 게르만족 ‘프랭크’ 왕국의 후예로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자처하며, 로만 가톨릭(천주교)이 국교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였다. 한때, 합스부르크 왕가는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대제국을 이룬 적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으로 벌어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인하여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1683년은 오스트리아의 역사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발칸반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이슬람군이 서구의 기독교의 심장인 ‘비엔나’까지 진출하자, 전 서구 기독교 사회가 이슬람 공포증(‘이슬라모포비아’)에 떨었고, 이슬람은 한껏 서구에 대한 우월을 과시하였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면적은 무려 520며만 평방 Km로 세계 최대였고, 투르크군 군세는 서구 전체를 압도할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서구는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구호로 이슬람의 호전성에 강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 구호는 아마도, 서구인이 목숨처럼 여기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항복해서 개종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신념을 심어주기 위한 심리적 선동이 아니었나 생각되지만, 서구 기독교 사회는 이를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한 정신 무장 탓일까? 유명무실한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슬람이 ‘비엔나’를 포위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에 서구 각국은 극도로 긴장하였다. 덕분에, 공포에 떨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의 권위를 내세우며 폴란드 등 주변국과 서구 기독교(구교) 연합군을 결성하였고, 이들은 이슬람과 9번의 전투를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비엔나'에 진입한 이슬람교도 투르크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퇴각하는 투르크군을 추격하여, 발칸반도의 상당한 영토까지 확보하면서 새롭게 게르만 문화를 기반으로 '보헤미아'와 '슬라브' 문화를 융합하여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하였고 서구는 안정을 되찾았다. 250여 년 전 1453년 서구가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동로마를 외면하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기독교도가 결속하였다. 서구의 결합으로 이슬람에 승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100여 년간 융성을 누렸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에서 패하여,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을 따르는 ‘라인동맹’에 의해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나폴레옹 패망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오스트리아는 '비엔나' 체제( 왕정복고 구체제 반동체제)로 유럽 역사를 주도하였고, 게르만족인 자신과 보헤미안, 슬라브족 등 자기 왕국을 구성하는 족속들을 묶어 대독일주의를 표방하였다.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 인가? 흩어졌던 영주국가들을 통합하여 순수 게르만족의 소독일주의로 대항하던 프러시아(독일)와 맞붙은 한바탕 전쟁(1865, 보-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신성로마제국은 ‘비스마르크’와 빌헤름 황제의 독일제국으로 계승되었다. 1865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보-오) 전쟁’에서 프러시아(독일)에 패배한 이후,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를 병합하여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갔지만, 계속되는 패전의 불운에 휘말렸다. 더불어, 1683년에 당한 패배의 총격 때문일까?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은 1683년 패퇴 이후부터 계속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서구 각국의 공세에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승리의 흔적을 역사에 남겼다. 수도 '비엔나'의 중심에서 왕궁과 더불어 비엔나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고딕양식의 거대한 ‘스테판스 돔’ 성당의 외벽에 포획한 터키군의 포판을 박고 그 위에 개머리를 조각하여 매달아 놓았다. 또한, 이슬람이 패퇴하며 남기고 간, 대포를 녹여서 큰 종을 만들어 달았다.(아래 이미지) 이것은 동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트루크’가 정복지 교회의 종을 수거하여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 대포의 탄환으로 사용한 것을 설욕한 것으로, 모두가 ‘이슬라모포비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도, '비엔나'외곽의 고급 주택가 근처에는 ‘터키 요새 공원’으로 부르는 거대한 공원이 있다. 1683년 당시 16만여 명의 투르크군이 진을 쳤던 지역으로,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이 공원에는 성곽형 망루와 이슬람식 문양이 새겨진 우물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지금도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 이 물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