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따르면, 유대왕국이 AD 70년에 로마에게 멸망하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Israelites, 이스라엘의 땅)로부터 쫓겨나 190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흩어져 '방랑 생활(Diaspora)'을 하게 되었다. 우리 조상도 경험하였지만 나라를 잃고 타국을 유랑하게 되면, 신변 안전이나 생계유지 등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해답은 돈이었다.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고리대금업이나 금 취급 등 돈과 관련되는 일을 하였고, 언제든 현지 상황이 악화되면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 덕분에, '베니스의 상인' 등 소설에서 '살 1파운드'를 베어내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지독한 모습을 보여 굉장히 나쁜 이미지로 묘사된다.
이런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은 야심 찬 정치가에게는 훌륭한 민심 잡기 방법이었다.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돌린 '히틀러'가 그랬다. 물론, 시간의 차이도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서구 각국에서도 그런 감정이 일정 부분 존재하였다. 그리고, 무슬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교도와 불신자를 배척하라'는 꾸란은 이교도 중에서도 특히, 반유대 정서를 가르치고 있다. 꾸란은 ‘…. 무슬림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을 친구로 삼지 마라. 그들은 서로의 친구라. 누구든 그들과 친분을 구하면 그들의 무리가 될 것이며 신은 잘못을 행하는 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꾸란 5:51), ‘…. 그대는 믿는 자에 대해 더 심한 적의를 가진 것이 유대교도와 다신교도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꾸란 5:80). 이처럼, 이슬람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수용하지 못하기에, '...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개종하지 않으면 그들을 죽이든지 세금을 내게하라...'(꾸란 9:29)고 가르친다.
꾸란이 이처럼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것은 많은 유대인들이 이슬람의 확장에 기여했으나, 유대인들이 모함마드를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모함마드 당시, 메디나의 유대인들은 이슬람에 협조적이었으나, 고리대금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민심을 잃었다(꾸란 $:161). 과거, 고리대금업은 도덕적 측면에서 살인, 간음 등과 동일시하거나 더 끔찍한 죄악으로 인식하였기에, 이슬람이 지금껏 실물 경제와 연계되지 않은 '리바(이자)'를 부정한다. 이는 중세시대 서구의 교회법도 '이자'를 부정한 것과 유사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십자가'의 나라가 아니다. 여호와를 섬기지만 구약을 따르는 그들에게는 '시온의 별'이라는 육각형 별이 상징물이다. 그런데, 굳이 '십자가와 초승달'의 이야기에서 이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서구 각국이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항상 이들의 편에 서서 아랍에게 승리를 거두게 하였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전 세계 각지에서 조국을 찾아 몰려든 자칭 유대인들 중에서, 과연 ‘누가 유대인인가?’를 정의해야 했었다. 이때, 종교적 선민의식에 잡힌 그들은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유대인의 정의’를 정하였는데, 그 답을 모(母)계에서 찾았다. 그들의 율법인 ‘탈무드’에 따라, ‘유대인인 어머니의 훈육을 받은 자’는 피부색깔이나 언어에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인정하였다. 유대인 '선민사상'의 현 모습이다.
그렇다면, ‘아랍인의 정의는 어떠할까?’ 유대인과 항상 대립 각을 세워 온 ‘아랍인’도 이런 관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즉, 아랍인의 정의는,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믿고 따르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아랍의 문화와 풍습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피부색과 인종에 무관하게 형제로 인정하며, 서로 칼을 겨누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이 공유하는 아랍의 문화와 풍습은, 의식주는 물론, 사고체계와 삶의 방식까지 매우 유사하다. 그 때문에, 아랍 22개국이 '아랍 연맹'으로서 비록 ‘모로코’로부터 ‘시리아’에 이르기까지의 광활한 지역에서 흩어져 살아가지만, 이들 모두는 아랍인으로서 의식구조나 전통적 가치관 등에서 동일한 국가처럼 그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중동전쟁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아랍 각국은 독립하였고, 곧이어 독재, 인권, 테러, 종족분쟁, 종파갈등, 팔레스타인 난민촌, 이스라엘 정착촌, 방벽 등과 같은 주제어가 중동과 동의어로 간주될 정도로 분쟁과 혼란 속의 부정적 이미지들이 난무하였다. 분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아랍 국가를 결정적으로 분노하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의 건국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독립의 중심지였던,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지역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성경에서 괴력의 선지자로 등장하는 ‘삼손’의 연정을 받은 ‘데릴라’도 ‘블레셋(‘팔레스타인’이라는 뜻) 여인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지역에는 또한 나사렛 예수의 탄생지가 있기도 하다. 이같은, '팔레스타인'이란 용어는 유대를 정복한 로마황제 Titus가, 이스라엘이란 이름대신 'Philistine' (성경에서 이방인으로 나오는 ‘블레셋 사람의 땅’이라는 의미, 오늘날 Palestine)으로 고쳐 부르도록 한데서 유래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와 아랍사이 갈등의 씨앗을 심은 국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곳을 지배하던 영국이었다. 유댁계 자금지원을 받은 영국은 1917년 이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벨푸어'선언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유대와 압랍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채 물러났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라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세계 각지를 방랑하던 유대인들은 가혹한 시련에도 자신의 조상과 종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이 물러서자 대신 미국 등 유엔이 나서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의 56% 영토를 유대인에게, 나머지는 아랍인 영토로 구분하는데 합의했다.
1948년, 유대는 자신들이 그토록 그리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전후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 영국 내 유대인의 강력한 지원이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을 근거로, 많은 종교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조상의 땅에 살고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영토밖으로 쫓아냈다. 그 이전까지만해도, 팔레스타인은 약 2,000여 년간 대대손손 살아오던 자신들의 땅에서, 조금씩 이주해 오던 유대인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이 서구의 지원을 등에 입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는, ‘성경에 의하면 이곳은 우리 땅’이라며, 자신들을 내쫓으니 아랍 형제들과 함께 분노하였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독립하자마자, 아랍 각국은 곧바로 ‘반유대주의’를 결성하여 서구와 이스라엘에 저항하였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그 탄생과 함께 곧, 중동과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다. 오랜 갈등을 반복해 온 이슬람과 서구를 대변하는, 새로운 전쟁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아랍의 분노는 이집트가 주축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등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포위,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이집트 등 아랍은 약 1억이라는 인구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약 1백만의 군대로 이스라엘을 압박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특유의 단결력과 미국과 서구의 지원 아래 매번 ‘일점 양면’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오히려 전쟁 시마다 그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오랜 '방랑'의 결과 체득한 '나라 없는 설움'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으로 독립이라는 생존 전략을 철저히 구사한 데 비해, 아랍은 정체된 가운데 '이슬람'이라는 동질적이고 획일적인 사고에만 안주하며 가문 등 겉치레적인 '체면'을 중시한 것이 전쟁에서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아랍국이 대동단결하여 벌였던 전쟁이고,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은 서구와 이스라엘을 압박하려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와 관련된 전쟁이었다. 제1, 2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아랍제국들이 평화조약 체결을 거부하여 이스라엘의 국경선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았다.
특히, 2차 중동전쟁에서 패퇴한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등 3개국은 1960년대 초,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까지 똑같은 만든 '통일아랍공화국'을 결성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4차례의 중동 전쟁 중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이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시나이 반도 남부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해상 통로인 ‘티란’ 해협 봉쇄를 선언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곧바로 전군 동원령을 내렸고, 요르단과 시리아도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대이스라엘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제, 이스라엘의 국가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이었다. 아랍의 맹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가까이 있다보니, 제3, 4차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 쪽 전쟁의 주요 무대는 ‘시나이’ 반도였다.
대략적으로, ‘시나이’ 반도의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작은 6.1만 평방 킬로미터이고 동서 210Km, 남북 약 385Km에 이르는 삼각형 모양의 반도로 거의가 사막지대이다.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2개 대륙을 잇는 가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시나이 반도의 동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접경하며, 서쪽으로는 수에즈운하, 북부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가면 ‘라파’를 거쳐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있는 ‘가자’ 지구로 연결된다. 중앙에는 ‘기디’ 령(패스), ‘미틀라’ 령 등으로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홍해와 접해 있다. 종교, 역사적으로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이끌고 탈출한 ‘출애굽’으로, 38년간 광야를 헤맨 곳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 산’과 ‘불붙는 떨기나무’가 있는 ‘성 카트리나’ 수도원도 이곳에 있다.
전략적으로는, 국토의 종심이 얕은 이스라엘로서는 적이 선제공격을 가하면 전 국토는 순식간에 유린당한다. 이 때문에, 아랍 국가들에 포위된 이스라엘로서는 ‘내선 기동’의 이점을 살려야 했고, 선제공격과 속전속결이 중요하였다. 이에, 이스라엘은 아랍의 주력인 이집트를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공군력을 이용하여 주요 거점 제압과 제공권을 장악한 뒤, 일부 부대가 요르단, 시리아 군을 견제하는 동안, 주력인 기갑부대는 이집트 군의 주요 요충지를 격파하고 수에즈 운하까지 신속히 전진한 다음, 다시 시리아를 격파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스라엘 공군은 250여 기에 불과한 가용 전폭기를 이용하여, 아랍군의 공군기지 28개 소 중에서 미그 21기 등 이스라엘 공군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공군 기지 11개 소를 우선 타격목표로 정하였다. 그리고, 6월 5일 아침 7시 45분에 이들 기지를 동시에 타격할 수 있도록, 비행거리와 이스라엘 첩보기관이 제공한 이집트 공군의 조기경보 체계가 잠시 중지되는 시간대와 아침 안개가 걷히는 시간을 고려하여, 각각 기지에서 발진하였다. 동시 기습 간 가장 어려운 적의 레이다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각 기지당 4개 편대가 15분 간격으로, 약 50미터 정도의 저공비행으로, 지중해 상공으로 돌아서, 일제히 비행장에 계류된 이집트 공군기들을 제파식 공격으로 폭격하였다. 이스라엘 공군의 우수성을 과시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이 초전의 기습공격은 이스라엘군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성공적이어서 공격개시 3시간 만에 이집트의 가용 전투기 340기 중 300여 기가 파괴되었고, 공군기외에 같은 시간대에 출근하던 이집트 주요 육군 사령부의 지휘관들도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태반이 넘게 희생되어 개전과 동시 이집트군은 지휘부의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버렸다 (지금은 지휘관과 부지휘관을 같은 계급으로 두어 지휘관 유고 시 즉각 대체한다). 마치, ‘다웟’의 ‘돌팔매질’ 한 방에 거구의 ‘골리앗’이 쓰러진 것처럼 … 사실상 전쟁의 승패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6일간의 전쟁 기간 중에 아랍공군은 416기를 상실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겨우 25기를 상실하였다. 그나마 이들도 모두 소련제 대공화기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주력기였던 프랑스의 ‘미라주’ 전투기는 일약 세계적인 전투기로서 그 명성을 날렸다.
육군도 공군이 공격한 지 15분 후인 오전 8시에 이스라엘군의 3개 기갑부대가 세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미국제, 영국제의 이스라엘 전차는 이집트의 구소련제 T-54, 55에 비해 성능이 매우 떨어졌으나, 이스라엘은 장갑 두께를 늘리고 주포의 구경을 키워 성능을 개선하였다. 한편, 이집트처럼 기습을 당하여 시리아와 이라크가 제대로 협공도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 시나이 전선의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빠른 속도로 시나이 반도를 질주하여 수에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반대편에 있는 시리아군을 격파하고 골란고원마저 점령하였다. 그야말로, 전쟁사에 길이남을 속전속결이었다.
전쟁 개시 불과 6일 후, 1967년 6월 8일 저녁, 이집트의 낫세르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UN의 휴전 중재안을 수락하고, 전쟁 종결을 선언하며, 이집트 군의 전력 80%가 상실되었음을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이집트의 발표에 따르면 전사 12,000명, 포로 5,500여 명이었고, 9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포획되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대이집트 전의 피해만 전사 275명, 부상 800명에 불과했고 총 61대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그렇지만, 속전속결로 큰 전과를 올리며 6일 만에 끝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느꼈을 승리감에 비해, 아랍이 느꼈을 열등감과 패배감은 깊은 상처가 되어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전쟁이후, 이스라엘군은 정신전력, 전술전기 등 모든 면에서 세계 군사 전문가들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마사다(요새)'가 자연스레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마사다(요새)'는 정신전력의 상징어가 되었다. 제3차 중동전 쟁간 이집트군의 초급장교들은, 대학출신이나 귀족출신 등 엘리트였지만 정작 부하들에게만 돌격을 명하고 자신들은 대부분 소리 없이 도주해 버릴 정도로 정신상태가 형편없었다. 공부를 많이 하였고, 가문이 좋다고 해서 훌륭한 지휘자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수십 배의 전력을 가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완벽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군의 승리는 치밀한 작전계획과 장병들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용전분투가 조화를 이룬 결과였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군의 정신력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아랍을 압도하였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남쪽,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진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해발 434m의 분지형 바위산으로,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 둘레 1,300m이다. 거대한 바위 절벽 위에 자리 잡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펑퍼짐 한 진흙땅으로 된 거칠고 메마른 분지형 지역으로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모양 같이 생긴 고대 요새이다. 이곳은, AD73년 로마군에 항전하던 유대군 전원이 자살로 장엄한 최후를 마친 곳으로, 이스라엘로서는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지만, '마사다'를 정복한 로마군인이 약 40년쯤 머무런 뒤, 수백 년 동안 수도사들이 그곳을 이용하였지만, 이슬람이 유대지역을 정복하자 수도사들도 모두 떠나버렸다. 그리고,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약 1,900여 년동안 세계 여러 곳을 방랑하는 사이,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적대적인 아랍국들에 둘러싸여 생존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 수년 전부터 ‘모세 다얀’ 국방 장관의 주도 아래, ‘마사다’의 신화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정신전력 고양에 활용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군에 입대한 군인들은 반드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군을 한 뒤, 밤에는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식을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이런 행사는 지금 껏 이어지고 있으며, 요즘도 이스라엘의 중, 고등학교(7-12학년) 학생들까지 ‘셀라흐’라는 프로그램으로 ‘나라사랑’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는 1주 1시간 강의와, 한 달에 6시간 및 1년에 2박 3일은 현장체험 교육을 하며, 마사다 등 전적지의 방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3차 중동전쟁 이전에, 이러한 '정신적 세뇌' 움직임에 대해 일부 이스라엘군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정치·교육·군사 지도자들이 마사다를 이용했다. 그들은 군대 창설 과정에서 용기와 결사항전의 본보기로 마사다를 내세워, 국민에게 패배의 참혹함을 보여 주어 전쟁에 지면 모두가 죽는다는 생각을 심어 주려 했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광신과 집단 자살 이야기를 어떻게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가? 마사다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면서, “이제 마사다는 잊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논란의 관점과 무관하게, 그로부터 수년 뒤,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전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비판에 호응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일본군 전사 기록에서 “죽어서도 조국을 돌보는 영혼이 되겠다...”는 다짐들을 볼 때, 최후의 1인까지 저항을 독려하거나 최후의 순간에 그들이 자결을 감행하였던 것은 전장에서의 명예심이나 영웅심의 발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개인의 이성적 의지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 다분히 집단의 일원으로서 집단이 결정한 행동에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르는 행위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최근에 군국주의 잔재 일부 인사들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유품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고 까지 하니 과히 전쟁병자들로서 그들의 망동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쯤,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이집트, 시리아가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 10월 전쟁’ 혹은 ‘욤키푸르(속죄일, Yom Kippur)’ 전쟁이라고 부르는 제4차 중동 전쟁이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아랍제국은 이스라엘에 패했다는 불명예와 자존심 실추로 국민적 사기가 말이 아닌 상태였다. 6일 전쟁의 패배로 '홧병'으로 죽은, ‘나세르’에 이은 ‘사다트’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바로 군 장교 조직을 숙청하고 새롭게 개혁한 것이 일반 국민의 지지를 받고 먹혀 들어간 측면이 있다.
'사다트' 대통령의 제4차 중동전 준비는 과거의 전쟁과 달리, 치밀하고 엄격하게 진행되었고, 군 개혁으로 군대의 후진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며 군사력을 훌륭히 재건하였다. 또한 작전적 측면에서도, 완벽한 보안으로 과거 이스라엘이 하던 방식으로 불시에 기습을 감행하여, 초전 3일 동안에 군사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이집트군이 공격 작전을 전개할 때 발생된 1군과 3군 간의 간격을 포착한 이스라엘군이, 이 간격 사이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역기동으로 이집트 제3군을 수에즈 지역에 고립, 포위하였다. 이 때문에 순식간에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된 아랍 측이 유엔을 통하여 정전을 요청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은 종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승리였지만, 이집트는 미국이 위성장비를 이용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등 서방 측의 개입 때문이었다며, 전쟁 자체는 자신들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지금껏 패배를 부정한다. 사실, 이집트는 선전하였다. 육군은 Sager 대전차 미사일을 이용하여 3차 중동전에서 이름을 떨친 이스라엘 전차대를 거의 괴멸시켰고, 이집트의 대공미사일 SAM-6는 이스라엘 공군기 114기를 격추했다. 물론, 아랍 공군은 그보다 많은 모두 442기를 잃었지만... 전사자도 이스라엘이 2,700여 명이었는데, 아랍연합은 19,000여 명을 잃었다. 하지만, 아랍이 크게 밀린 것은 아니었다.
종전 이후, 이집트는 해마다 ‘10월 6일 전승기념일 행사’를 국가와 군의 주도로 성대하게 거행한다. 최근 우리의 일산 신도시처럼 새로 건설된 도시 이름도 ‘6th of October City(10월 6일 도시)’라고 명명하여 제4차 중동전의 전승을 기념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왜, 확고하게 자신들의 승리라고 주장할까?’ 이집트인들은, “만약, 미국의 도움 없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면,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순순히 양보했을까?”라고 반문한다. 이것이 아랍인들의 관점이다. 실제로 전쟁 초전 3일간의 이집트와 시리아의 파죽지세는 이스라엘을 국가소멸의 위기까지 몰고 갔었었고, ‘6일 전쟁’의 영웅이었던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국방상도 초전 실패의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스라엘도 이집트의 승리를 함께 인정해 준 셈이다.
양측의 견해가 어떻든, 제4차 중동전 초기에 이집트가 보여 준 치밀한 전쟁 준비와 초기작전 그리고 헌신적인 전투행동과 눈부신 전승은, 제1차 전쟁에서부터 제3차 전쟁까지 보여 주었던 이집트 군의 무기력한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집트가 한때 이스라엘을 멸망 직전의 위기로 내몰기도 하였으니, 이스라엘도 더 이상 이집트를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4차례의 전쟁 끝에 이집트와 요르단 두 나라는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하면서 구소련과 결별하여,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적대 관계를 종식하였다.
협정에 따라, 이집트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에서 대패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회복하였다. 수에즈 운하는 연간 50~60억 달러 이상의 통행료 수익을 보장하며 국제사회의 경제 활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집트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또한, 이 협정 이후에,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국교 수교와 상호 승인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10억 달러의 경제원조도 받는다. 경제원조에는 밀가루가 많다. 빵값이 비싸지면 민심이 흉흉해진다. 이집트인의 주식인 '에이쉬'빵은 1달러에 6장을 살수 있다. 빵값이 너무 저렴하니 굶어 죽을 사람은 없는 셈이다. 군사정부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에 대한 영토권을 보장받고도 군의 주둔을 수에즈 운하 서쪽에만 국한하려는 국제사회의 요구로, 이스라엘과의 접경지역에 군사력을 배치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나이 반도는, 정치적으로는 이집트 영토이지만, 군사적으로 중립화하여 이집트군의 주둔을 제한하는 대신 미국 등 13개국의 병력 2,000여 명과 연간 5,000만 불 상당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다국적군(MFO: Multinational Forces Organization)’이 주둔한다. MFO는 이 지역을 시나이 반도를 4개의 소구역으로 나누어 양국군의 동향을 감시한다. 이제, 시나이 반도에서 대규모 열전(熱戰)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특히, 대규모 전차 기동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집트는 휴전의 항구화로 잃었던 영토의 회복, 그리고,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 수혜를 받게 되어,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였지만, 이 협상으로 인해 향후 중동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아랍제국의 종주국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이스라엘 간에는 형식적이나마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요르단을 제외한 나머지 아랍 연맹국가들은 이집트를 변절자로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원조는 독이 되었다. 미국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각각 군사 및 경제원조를 제공하였는데, ‘약자에게 더 큰 떡을 주는 건가?’ 항상 이스라엘에 조금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외 군사무기 판매 대상국에도 이스라엘은 항상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지만, 이집트는 늘 후순위에 있었다. 미 의회가 이스라엘에는 판매를 승인하면서도 이집트에게는 판매를 거부하거나 인도를 지연시킨 무기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50여 년이 지났다. 이집트는 이제 더 이상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카이로에서 시나이 반도에 가려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가르는 수에즈까지 약 100Km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차량으로 약 1~2시간이면 갈 수 있다. 수에즈 시에는 이집트 제3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이 부대가 4차 중동전 당시에 이스라엘로부터 포위를 당했던 부대인데, 사령부 본청에는 북한 화가들이 4차 중동 전쟁을 그려 준 대형 걸개벽화가 여기저기 걸려있어, 바라보는 필자로서는 약간 어색하고 거북하였다. 군사령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들이 고립되는 바람에 패전하였다는 생각 때문에, 이집트군에게 다소 유리하게 과장해 놓은 게 흠이긴 하지만, 4차 중동전 당시의 상황을 잘 유추해 볼 수 있도록, 실지형에 맞추어 이집트군의 초소와 ‘바레브 라인’으로 유명한 이스라엘군의 진지를 묘사한 야외 군사박물관을 만들어 방문객에게 보여 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도 여전히 과거 우리 군이 외쳤던 ‘초전박살’과 비슷한 당시의 ‘구호’들이 많이 보였다. 이런 구호는 이집트군의 초소는 물론, 이스라엘군의 각 진지 벽면에도 많이 쓰여 있다. ‘구호’는 후진국 군대가 적에 대해 ‘허장성세’로 과장하는 수법으로, 약하고 무능한 군대일수록 정신력을 돋우기 위해 많이 사용한다. 온갖 말로만 하는 구호가 난무한다고 해서, 진짜 전쟁에서 이런 구호가 정신력 강화에 일조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