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평화로웠던 아프가니스탄은 이웃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많은 군인을 소련 군사 교육기관에 보내어 교육시켰는데, 이 중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를 추종하였다. 이에, 아프간 각 부족의 이슬람주의자가 서구화와 소비에트화에 반발하자, '다우드 칸' 정권은 반공, 반이슬람 원주의를 표방하며 이슬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탄압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좌파 군인들이 1978년 쿠데타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이번에는 각 지역별 이슬람 반군이 들고일어나 공산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1979년 당시 소련은, 군부 쿠데타로 아프간을 차지한 친소 '아민' 대통령이 미국 CIA에게 포섭(?)된 인물로 평가하고, 소련 내 이슬람주의 세력을 부추겨 자신을 위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나중에 미 CIA의 역정보에 KGB가 당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브레즈네프' 소련 수상은 미국의 '소련 남부 영향력 확대' 공작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아프간에 선제 침공을 단행하였고, 아프간 정권을 붕괴시키고 직접 통제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판단은 소련이 아프간의 친소정권을 이용해 미국의 대리인인 파키스탄과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할 것으로 확신했다. 이처럼 상반된 판단으로,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이해에 따라 아프간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979년 12월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은 최신예 T-62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1950년대에 사용하던 단발식 소총을 든 아프간의 이슬람주의 반군(무자히딘)은 소련 정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소련의 침공에 반발한 공산 아프간 정부군이 대대적으로 이탈하여 이슬람 반군에 합류하였고, 이에 전국토의 80%가 이슬람 반군에게 넘어갔다. 아프간은 국토의 80%가 가파른 돌산이고, 나머지도 사막이나 황무지가 대부분이어서, 대다수 주민이 전근대적인 환경하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중앙집권적 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상황이라, 수천 년 역사동안 각 지역이 '자치권'을 갖고 철저하게 부족 단위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모르는 외지인이 부락 마을로 들어오면 모두가 강한 경계심과 배타심을 드러내는 게 이들의 관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이 아무리 현대적 장비로 무장하여 '무자히딘'을 공격하여도, 같은 부족이라는 혈연과 종교라는 이념으로 결속된 주민들이 현지의 험악한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게릴라 전으로 저항하는 데는 이길 도리가 없었다. 여기에, 미국은 아프간이나 다른 이슬람 국가로부터 자원병을 모병하여 약 10만여 명의 '무자히딘'을 육성하여, 이들에게 서구의 무기와 중화기를 지원하여 전투에 투입하였다. 예컨대, 소련의 T-62 탱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아프간 반군은, 미국이 파키스탄을 통해 휴대용 대전차 로켓포 ‘RPG-7’을 확보하면서 전황을 역전시키기 시작했고, 여기에 더하여 최신 대공 화기인 ‘스팅어(FIM-92)’ 미사일을 지원하여, '무자히딘'의 게릴라 전술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던 소련군 MI-4 헬리콥터를 많이 격추시킬 수 있었다.
한때, 10만여 명으로 증강된 소련군의 전면적인 개입으로 아프간 전쟁은, 불과 몇 달간이면 종료될 것으로 내외신은 판단하였으나, 이슬람 반군이 수행한 게릴라 전투로 오히려 소련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아프간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침공 10년 만인 1989년에 패퇴했다. 이 10년 동안 소련이 아프간에 파병한 지상군은 연 인원 62만 명 정도로서 비록, 소련군 전체로 보면 소수였으나, 많은 참전 군인들이 정신적 트라우마와 '염전사상'에 빠졌다. 아프간 전쟁 패배는 소련 붉은 군대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그로부터 2년 뒤 소련 연방이 붕괴되는 단초가 되었다. 소련에게 아프간은 미국의 베트남이 되었다.
소련이 이처럼 직접 군대를 전장지역에 보냈지만, 무신론자인 공사주의자 군인들은 현지 종교에 무심하였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슬람 종교가 아프간인에 갖는 중요성을 인지하여 반군에게 반공교육 등 사상무장과 이슬람의 저항의지로 소련군을 격멸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군사력 대신 60~120억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사이클론 작전'이라는 지원작전으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저항하는 현지 수니파 반군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고, 철저한 유신론자인 무슬림에게 '이슬람 원리주의'와 반공 교육을 지원하여, 공산주의의 무신론에 극단적인 반감을 갖게 하고, 오랜 시간 자존감을 이어온 이슬람에 대한 외세의 침공에 저항하였다는 부분을 철저히 강조하는 등 ‘이슬람 주의’로 무장한 ‘무자히딘’의 적개심을 더 고취하였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소련군 퇴치에 분명히 큰 효과를 보았지만, 장기적으로 볼때, '무자히딘' 교육 과정에서 미국이 '이이제이'로 지원하여 아프간 전쟁에서 효과를 발휘하였던 ‘이슬람 주의’(미국과 사우디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사우디 버전인 ‘와히비즘’을 지원하였다)는 이스라엘에 의한 아랍제국의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이슬람에 대한 자각과 자긍심을 회복하여 곧바로 이슬람이 뭉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잠자던 이슬람의 눈을 뜨게 한 것이다. 이는 결국, 미국에 거대한 부메랑이 되었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중동 각국의 세속주의 정권에 실망한 뒤, 소련에 맞서는 전투를 ‘지하드’(성전)로 여겨 전장으로 몰려왔던 이들 - 전 세계에서 이슬람의 전사를 자처하고 모여든 이슬람주의자들 - 은 거기에서 맺은 세력을 새로운 네트워크로 구축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무자히딘' 양성과정에서 배출된, '오사마 빈 라덴, 알 자와히리, 오마르, 압둘라 아잠, 물라 모하마드' 등 향후 각종 테러조직을 이끈 우두머리들은, 그곳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얻었으며, 미국의 훈련 교관으로부터 미국식 사고방식, 전법, 무기체계 등 미국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미국인이나 소련군 등 서구인의 모습은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물질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삶이거나, 술, 섹스, 마약 등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경멸과 적대의 대상이었다.
종전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로 복귀한 이슬람 원리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은, ‘알 카에다’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사우디내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자, 친미적이었던 ‘알카에다’는 반미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얼마 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빌미로 미국이 '이라크를 응징한다'라며 중동에 개입한 제1차 걸프전이 벌어지자, 전쟁을 지켜보던 그는 '서구의 세속적인 삶이 무슬림을 타락시켰다며, 초기 이슬람의 도덕성과 순결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반미 과격분자가 되었다.
'오사마' 외에도, 아프간에서 전쟁 기술을 배웠지만 종전 이후 갈 곳을 잃은 다수의 '무자히딘'도 ‘이슬람 원리주의’를 외치며 다시 중동 곳곳으로 흩어져 이교도와 서구사상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고 ‘지하드’를 수행하며, 반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였다. 이들에 대한 공격이 ‘알라(신)의 뜻’으로 미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현대사 학계에선 아프간 전쟁의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로 '투쟁적 이슬람주의'가 중동 전체에 확산한 점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