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사담 후세인’은 이란을 침공하면서, 아랍 형제국의 지원을 얻고자 “꾸란은 아랍어로 쓰였고, 신은 아랍인들에게 이슬람을 수호하도록 운명 지어 주셨다”라고 발언하면서, ‘아랍인이야 말로 유일하고 진실한 무슬림’이라는 민족주의적인 선민사상을 강조하여 아랍 민족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 했다. 이에, 아리안계인 이란의 혁명 수출에 불안을 느끼던 수니파 아랍 왕국 등 각국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하지만,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기진맥진한 ‘후세인’은 그를 지지하였던 쿠웨이트 등 아랍 각국에게 전쟁 채무탕감을 요청하였지만, 모두들 이라크의 요구에 냉담하였다. 이에 ‘후세인’은, 정권유지의 기반인 군부의 지지를 추스르고, 경제 난관을 더 쉽게 극복하기 위해 석유자원을 확보하고자 채무탕감을 거부하는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병합하려고, 1990년 8월 2일 약 30여 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다. 제1차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국제 규범에 대한 테러로서, 석유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다.
이라크의 '공화국 수비대'는 완벽한 기습으로 단 하루 만에 쿠웨이트 왕궁인 ‘다스만’ 궁을 점령한 뒤, 즉각 쿠웨이트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8월 8일 이라크와의 합병을 선포했다. 이처럼, 이라크는 수니파 아랍권에서 같은 수니파 아랍 형제국에게 총을 겨누었을 뿐만 아니라, 점령한 쿠웨이트 왕궁을 약탈하고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을 자행하였다. 아랍 형제국에 대해 할 짓이 아니었다. 이 같은 이라크의 행동은, 모든 형제국으로부터 외면받았고, 시아-수니파의 전쟁이었던 ‘이란-이라크’ 전쟁과 달리 아랍인에게 매우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라크의 불량한 행동은 미국과 서방에게 아랍국 공격의 빌미를 주었고, 아랍제국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구의 침략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 일로 인하여 이후 아랍권의 각종 정치적 명분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유엔은 1990년 11월 ‘안보리결의’(제678조)로 쿠웨이트 합병철회와 이라크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라크가 불복하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먼저 군사력을 배치하여 (오사마 등이 반발하였다) 우방국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한 뒤 1991년 1월 17일, 미국군 등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면서, 이른바, '사막의 폭풍'이라 불리는 걸프전쟁이 시작되었다. 1차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였고, 미국 주도로 34개국이 결성한 다국적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군사동맹이었으며, 서구가 응징을 빙자하여 아랍국가를 직접 공격한 선례가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전 세계 유일한 초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우선, 6주간에 걸친 ‘사막의 폭풍(Desert Strom)’ 작전으로 전폭기, 순항 미사일 등으로 이라크의 지휘부, 공군기지 등 군 시설, 생화학무기 생산 및 보관시설, 기타 인프라 등 주요 공격목표를 철저하게 공습하였다. 이에 대항하던, 이라크는 5천여 대 이상의 전차가 불능이 되었고, 그나마 간신히 '스커드' 미사일 몇 발을 이스라엘이나 사우디 아라비아 등 친미국가에게 공격하였지만, 이 마저도 모두 요격되거나 파괴되어 실패하였다. 수세에 몰린 이라크의 최종 전략은, 쿠웨이트의 유정에 불을 질러 세계 경제에 타격을 주어, 종전을 유도하려 하였지만 이 또한 세계인의 분노를 자초하였다.
아라크 군부는 또, 미국 등 다국적군이 쿠웨이트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하여 쿠웨이트 방어망을 구성하였으나, 미국 등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직접 공격하자 허를 찔린 이라크군은 도주하다 포착, 섬멸당하였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이란과 8년 간 혈전을 벌이며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던 이라크 군부였지만 미국군의 작전지휘나 무기체계 능력에 비하면 한창 부족하였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아무리 미국 육군이 전쟁 기간 중 마지막 100시간 정도의 전투를 치렀다고 하나 고작 148 명만 전사하였지만, 이라크군 2~3만 정도가 전사하고 7만 정도가 부상을 입었으니, 100여만 명 정도의 이라크군이 초토화되었다.
이는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수모를 당한 이후, 미국이 국가 대 국가로 치른 첫 전쟁이었다. 전쟁사적으로 이스라엘이 '6일 전쟁 (제3차 중동전)'에서 아랍권에 대승을 거둔 것 못지않은 전역이었다. 미국 등 다국적군이 벌인 '사막의 폭풍' 작전은 치밀한 전쟁 계획과 세계 각국이 지원한 엄청난 전쟁 물자의 확보, 각종 최신 무기체계의 운용으로 인원 피해 최소화, 아랍권으로부터 받아낸 전쟁 명분 승인, 한국 등 전 세계 각국의 전비지원 답지 등으로 약 600억 달러를 확보(사우디가 300억 달러)하여, 미국이 세계 패권국임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현대전의 개념을 새롭게 선보인 이 전쟁을 보고, 중국군은 공개적으로 현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고, 북한도 미국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새롭게 정립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이 전쟁은 비단 이라크와의 전쟁만이 아니라, 미래전에서 필수적인 철저한 전쟁계획 수립과 군 장비 현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매스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군의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일려 주었다.
그렇지만,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완전히 축출하지 않은 미국군의 전후 처리방식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어떤 이는,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지닌 전쟁이었으므로, 오히려 아랍제국들의 지지를 받는 선에서 미국의 위상을 과시하였으니, ‘비행 금지구역’ 설정이나 경제재제조치 등의 선에서 물러선 것은, 일견 잘한 선택이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 때문에 10여 년 뒤에 대량살상 무기(WMD) 보유를 빌미로 다시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굳이 1차와 2차 전쟁의 전략을 비교하면, 미국군의 '걸프전쟁 (1차 이라크 전쟁)' 수행은 전쟁학자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주장한 '전쟁이란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일이며, 이는 적의 군사력을 궤멸시킴으로써 가능하다'라고 부분에 따라 적국의 '힘의 중심(Center of Gravity)'을 '군사력'으로 보고 군사력 궤멸에 주안을 두었다. 하지만, 10여 년 후에 발발된 '석유전쟁 (2차 이라크 전쟁)'에서는, 미군이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을 철저히 파괴하였지만, 오히려 후세인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걸 보고, '힘의 중심'이 '군사력이 아니라 독재자 그 자신'일 거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연합군의 전쟁 목표는 후세인 정권 타도이니, 이라크군은 저항하지 말라'는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이것이 잘 먹혀들어 '후세인'정권 지도부가 궤멸되었다. 그러나, '군사력'은 놔두고 '지휘부만 몰아낸' '2차 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이에 대해 차후에 소개한다.
사실, 이 부분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과 미국 연합군은, 북한군의 핵과 미사일 능력 등 군사력을 '힘의 중심'으로 보기보다, '김 정은' 등 북한 지도부를 '힘의 중심'으로 보고 있는 편이다. 그렇기에, 북한이 도발이라도 하면, 심리적 압박이랄까? 북한 정권 고위층에 대한 '참수작전' 등을 언론에 흘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