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식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보하였지만, 9.11 테러를 당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간을 공격한 것에 이어, 대량살상무기(WMD)의 개발 및 보유 의혹을 받고있는 중동의 문제아인 ‘후세인’ 정권에도 공격을 준비하였다. 2003년 3월, 제2차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이라크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위협 제거’와 ‘대테러’, 그리고, ‘안정적인 석유자원 확보’라는 대명제를 내세워 다국적군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이라크는 물론, 주변 아랍국들과도 적대 내지는 불편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이후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이라크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폐기를 강요하며 후세인 정권을 공격한 것이 잘못된 정보였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났듯이, 미국의 정책 수행의 배경에는 이라크가 가진 석유자원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는 아랍인들의 의심은 지울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라크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석유를 많이 매장하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이 이라크를 장악하면 세계 석유시장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빙자(?)한 석유전쟁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오사마 빈 라덴’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공이 ‘미국의 탐욕어린 이익추구 때문’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참고로, 이라크 전쟁이 종료된 후, 국제 유가가 상승하자 미국에서는 대량으로 매장된 '셰일가스'에서 석유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이 량은 방대하다. 작금의, 2024년,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전세계 생산량의 22%로서 세계 1위 수준이다. 이제, 미국에게 중동의 석유는 더이상 관심거리가 아니게 되었다. 미국이 중동에서 발을빼는 이유이다. 미국에 뒤이어, 사우디와 러시아가 각각 11% 수준이고, 캐나다는 6%, 중국은 5% 정도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석유 확보'라는 목적이외에도 전쟁 목적이 당시 미국에서도 부시의 지지 기반 중의 하나인 극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미국내, 외적인 이러한 각종 의심 속에, 후세인 독재타도를 위한 '이라크 침공'이라는 미국의 도박이 시작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전쟁목표를 이라크 '군사력 궤멸'보다 이라크 '지휘부 제거'에 초점을 두어, 대규모 교전보다는 가급적 이라크 진지는 우회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전쟁 개시와 동시, 미국은 수천 개의 크루즈 미사일 등 정밀 폭탄으로 주요 군사목표를 타격하였다. 이어서 강력한 공군 및 기계화 부대를 이용하여 일방적인 우세 속에 바그다드를 함락하였다. 전쟁은 순조로웠다. 군사적으로는 초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이라크가 일방적으로 패배한 이유는 후세인의 군사조직 내부의 파별조장, 상호 감시체제, 그리고 여단급이상 부대 기동에 대한 후세인의 직접통제에 기인한다.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 시 후세인의 눈치를 보던 군부가 고전했던 이유와 일맥 상통한다. 후세인은 군부 쿠데타를 우려하여 주요 지휘관 임명시 군사적인 역량보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 여부에 따라 발탁하였고, 유능하고 영향력이 있거나 지휘력이 뛰어난 자는 모두 제거하였다.
한때, 북한 군 수뇌부의 잦은 교체가 눈에 띄었다. 일부 언론은 김정은의 ‘군부 길들이기’, 충성경쟁 등으로 묘사하였는데, 군사훈련을 참관하면서 각종 지시를 내리는 모습과, 열심히 받아적으며 그대로 따라하려는 북한 군수뇌부를 보면 자꾸만 후세인 모습이 ‘오버랩’된다. 제대로 된 군사이론과 지식 없이 군을 통제하는 모습이 ‘데쟈뷰’라는 게 필자만의 생각일까?
미국은, 세계 주요 문화의 교차로이자 석유 생산지인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소위 ‘대중동 정책(The Great Middle East Initiatives)’을 구상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과 서구의 인적, 물적 지원에 의해, 낙후된 아랍 각국의 발전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 여성, 문화 등을 개혁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 민주 개혁의 추진: 자유공정 선거 및 감시체제, 여성 기본 인권 신장, 여성 유권자 참여 및 교육, 의회활동 교육 및 참여유도, 법률 구조개선, 미디어의 독립성 확보, 부패방지와 투명성을 제고하며, 군사장비는 폭력의 원천이라 원조를 제한하겠다는 것과,
• 지식 사회 건설: 문맹퇴치(평균 문맹률 40%, 여성은 65%)와 독서능력 향상, 여성 기본교육, 신개념의 학교건설, 디지털 기술 영입, 금융과 재정 교육을 강화하며,
• 경제적 기회 확대: 재정 성장, 무역확대(WTO, 무역허브구축), 중동 수출자유지역 (MEFTA) 구축 등으로 스페인의 GDP보다 낮은 아랍연맹의 GDP를 성장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중동 정책’ 구상은, 무슬림의 입장보다는 하나같이 미국의 관점에서 중동정책을 추진하고자 기획함으로써 처음부터 무슬림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 미국과 서구가 개혁에 소요되는 예산을 지원한다손 치더라도, 당시로서는22개 아랍국 중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20여개 국 거의가 독재 국가였는데, 이들에게 정치개혁이라니... 어느 아랍지도자가 거기에 호응할 것으로 판단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더우기, 여성을 ‘보호하고, 가리는 게’ 아랍의 문화적, 종교적 정서인데, 여성을 가정으로부터 끌어내어 민주화 및 여성 인권 향상을 이루고, 이들을 경제활동에 참여 시켜 경제발전을 이루려고 하다니? 이러한 시도를, 과연 종교적 교리에 목숨을 거는 아랍 여성들이 그러한 정책을 반길 거라고 판단하였을까?
이렇듯 다소 황당한 ‘대중동 정책’ 구상을 보면, 아랍지역에 방대한 정보망을 가진 미국이 도대체 왜, 이런 정책들을 입안하였는지 의아심이 생기기도 한다. 아무리 국제 규범에 맞게 개혁을 하려했다고는 하지만, 현지 상황을 무시하고,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하였던 탁상행정이 가져온 무모함의 결과일 수도 있다.
이처럼, 현지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슬람을 바꾸려는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너무나 오만하고 무모한 시도여서, 많은 아랍국은 물론, 서구 국가의 반발도 불러 일으켰다. 거기에다가, 미국의 오일자원 고갈 관련 보고서와 더불어 1, 2차 걸프전쟁이 미국의 오일자원 확보 때문이라는 아랍 언론들의 각종 의심성 보고서가 나오면서, 미국의 ‘대중동정책’ 발표는, 대이라크 전쟁이 개시되기도 전부터 미국의 의도를 반신반의하던 아랍인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런 어설픈 정책 구상에 대한 무슬림의 비판은 날카롭다.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서구와는 다른 배경, 다른 역사를 가지고 다른 가치관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중동의 무슬림이 자기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길 원하지만, 무슬림은 '미국이나 서구가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문화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들 '스스로가 다른 미래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반발한다. 관련하여, 이슬람 세계의 언론들은 이슬람의 제도와 문화를 굴복시키고 침해하고, 종속시키려는 서구의 음모와 책략을 비난하는 기사를 많이 싣고 있다.
이런 정책 사례에서 보듯, 서구와 이슬람 간의 시각 차이는 서로가 이해하며 대화로 그 간격을 좁혀야 하지만, 이들 사이 대화의 여지는 매우 좁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하지 않은 채, 만약, 외세가 물리력을 이용하여 '힘에 의한 개혁'을 가한다면, 어느 누구든, 반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사한 일은 130여 년 전 이조말기에도 있었다. 개혁의 기치아래 내려진 ‘단발령’은 수백 년 간 이어 온 유교문화의 핵심인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持父母)’의 가치관을 버리라는 왕의 지시였다. 급기야 ‘최익현’ 등 유생들은, ‘자신의 목부터 먼저 자르라’고 집단 상소를 하였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 두발은 조상님들에겐 목숨을 건 신조였다. 더불어, 구한말 조선에서는 '양복과 넥타이'가 '갓과 곰방대'를 대체하는 데도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것은 우리 조상이 살아온 방식이었고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사상과 이념 때문에 수백만 명이 살상당한 6.25라는 무참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생활 패턴이 뒤바뀌었다. 그리고, 얼마 전, 종교가 사상과 이념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임은 이미 공산주의의 붕괴로 확인된 바 있다. 종교와 사회의 변화는 외부의 물리적인 강요로만 쉽게 바뀌어질 수 없는 부분이다.
이슬람이라고 다를까? 7세기 초반 이후 무려 1,400여 년간 이어져 온 종교며, 관습이고 문화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조차, 외세에 의해 관점을 바꾸고 “가치기준을 바꾸라”라고 강요하는 일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버리라”라고 강요하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미국은 이런 점을 잘 알지 못하였고 또 별로 고려치 않았다. 종교적 '경건함'에 대한 존중 없이, 군사력 제압과 경제적인 지원만으로 이슬람의 불신자에 대한 적개심을 해소하려는 자본주의적 접근방법은 반발만 초래하였다. 이들의 반발을 요약하면;
“이슬람은, 이미 400여 년 전에 종교전쟁을 끝으로 신성을 탈피하고, 인성을 찾아 과학기술과 물질적 향유를 누려온 서구와 달리, 1,400여 년 전에 창시된 꾸란의 계시를 여태껏 완벽한 종교를 믿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신성을 최고의 가치로 유지하며 거기에 더욱 충실하려 한다”.
“서구는 이교도 및 불신자에 대한 배척과 폭력을 '반문명적 행위'로 간주하고 비화합적인 이슬람 교리를 '국제규범'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나, 이슬람은 이를 정당화하고 신념화한다”.
“미국과 서구가 이슬람을 개혁한다며, 숱한 분쟁과 오랜 피지배의 아픔을 간직한 무슬림에게, 군사적, 경제적인 압박으로 현실 정치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에 대한 거부감은 실로 크다”.
침공한지 불과, 2개월도 되지않은 2003년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 정권 붕괴'와 종전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이라크 정부가 붕괴되고 군부가 항복하자, 오히려, 그때부터 저항세력 (후세인을 추종하던 군, 경찰 등 수니파 반군들은 실직과 원한 등으로 이후 IS 의 주도세력이 됨)이 나타나 이라크의 치안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폭탄테러와 게릴라전은 그 후로 1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이는, 미국이 잔적을 소탕하고 민심 안정을 목적으로 수행한 ‘안정화 작전’과 새질서 확립을 위해 추진하였던 일련의 개혁작업에 대한 저항과, 미군 등 연합국 병사들의 현지인과의 의사소통 능력부족,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저항세력들이 끊임없는 파괴와 살상을 벌였기 때문이다.
'안정화' 작전의 과정에서 돌출된 미군들의 잦은 실수를 예로들면, 반군을 찾아 검문하던 미국군이 현지인의 집이나 검문소에서 현지인 가장을 전 가족이 보는 앞에서 구타하는 굴욕 -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절대 금물 – 을 주었고, 감옥에 있는 전쟁 포로들에 대한 비이성적인 학대행위를 행하였거나, 여성을 성폭행하고 그 가족까지 모두 살해하는 등 무슬림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포함된 동영상이 유포되었다. 그리고, 어렵게 확보한 석유자원도 수니파 반군들에 의해 점령당하자, 미국군은 반군에 점령된 석유 자원이 반군의 자금줄이 되지 않도록 폭격하거나 불태워 버렸다.
미국의 이런 미숙한 행동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진압작전에서 성공했던 사례 등을 적용하다가 빚어진 실수라는 루머가 나돌았다. 그리고, 급기야, “알 자지라” 방송을 포함한 아랍 언론들도 '석유 이슈'와 ‘제 2의 십자군 전쟁’ 등 노골적으로 반미를 부추기며 불신을 조장하였다. 이 여파로, 미국에 대한 아랍의 불신은 극에 달하였고, 전쟁 초기,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공 작전으로 후세인 독재정권이 붕괴되자, 후세인을 거부하던 많은 중립적 인사조차은 미국을 지지하였지만, 곧 바로 반정부군에 동조하였고, 급기야는 미국에 환호하던 많은 이라크인의 민심이 급속도로 이반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원인은 모두가 아랍에 대한 왜곡된 정보나 무지, 그리고 미숙한 정책적 판단에 의한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후, 치안 부재와 미국군에 대한 반감, 그리고 창궐하던 무장세력의 저항으로 이라크는 몇 년간 무정부 상태로, 반복된 테러 등 일련의 혼동 끝에 이라크에 주둔하던 미국군 수천 명이 전사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세계 석유 생산 환경이 미국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2011년, '오바마' 정권때 한때 16만여 명의 수준에 이르렀던 미국군은 이라크에서 전면 철수하였다. 미국은 새로 구성된 '시아파' 정권에 모든 것을 남기고 국내, 외의 요구로 철수하면서, “이제, 지상군 참전은 절대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무장 반군들이 축출당한 구이라크 정부군 장교들과 더불어 이슬람 국가(IS)의 추종세력으로 중동지방의 새로운 불씨로 등장하자, 2015년에 이라크 시아파 정부의 ‘IS격퇴 작전’을 지원 요청으로, 또 다시 약 3,500여 명 규모의 특수전 여단을 파병하였다.
미군의 전투를 지켜보던 필자는, ‘일찍감치 승부를 짓고 남들이 환호하던 전쟁을, 쉽지 않은 전쟁으로 간주하였다. 왜 그렇게 보았을까?’ 이는 전쟁발발과 동시 보여 준 아랍권의 대동단결 때문이었다. 아랍 국가원수들은 평소에는 '아랍연맹'회의에서 모이기만 하면 서로 싸웠는데,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심지어 이라크와 사이가 좋지 않던 국가까지 모두가 합심한 것처럼 미국의 침공을 강하게 비난하고 등을 돌렸다. 아랍에게는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자꾸만 변화하고 진화하는 테러 분자에 대한 진압이나 안정화 작전과 선무공작조차, 지역 주민의 반미정서 점증으로 거의 효과가 없어 보였기에, ‘쉽지 않은 전쟁이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석유’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슈로, 다른 문화권인 이라크와 아프간에 대규모 무력 침공으로 중동지역의 이해관계에 깊숙이 개입하고, 테러 제거에 대해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미국의 이런 주도권확보는 평가할 만하나, 전쟁으로 남은 것은 전쟁의 후유증과 문명 충돌의 재확인, 그리고, 진화된 테러의 확산이었다. 또한, 테러 원점을 제거하는 데 거둔 일정 부분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더 큰 테러 위협을 잉태하였다.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였던 ‘알 바그다디’가 만든 이슬람 국가(IS)가 그런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