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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Nov 10. 2024

부산시향, 춤추는 컨덕터에 중독 돼버렸다

2024, 9,10,11월의 클래식

작년 시즌을 끝으로 부산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에서 물러난 최수열 지휘자를 대신해 광주시립교향악단을 이끌던 홍석원 지휘자가 신임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첫 번째 정기공연이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5번 "황제"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모음곡

리스트 교향시 제3번 "전주곡"


아무래도 첫 연주이니 유명한 작품을 하고 싶어서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피아노협주곡에 "황제"면 다들 만족했을 듯하다. 협연자인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코르산티아(Alexander Korsantia)는 짧은 나의 견식으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어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황제"처럼 익숙한 곡은 잘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엥? 하는 감상을 낳기 쉬운데, 이번 연주는 나에게는 뭔가 '색다른' 경험으로 기억될 거 같다. 팸플릿에 따르면 보스턴에 거주한다는 정보가 있던데, 그래서인지 진짜 "미쿡" 그중에서도 "뉴욕" 냄새가 많이 났다. 어떤 냄새냐고 물으면 정의할 수는 없는데, 클래식 특유의 권위와 자유로움을 양 끝에 두고 저울을 조절하면 자유 쪽에 확실하게 기우는 느낌 같은 거? 이게 뭐지? 뭐지? 하다가 이후에 앙코르곡으로 "William Bolcom_Graceful Ghost Rag"를 연주하는 걸 보니, 알겠다.

재즈스타일이구나...

재즈 감성을 탄 "황제"라고까지는 평할 수 없지만,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스타일이었던 건 확실하고, 그것은 명백히 어깨를 으쓱으쓱하게 만드는 미국 동부의 필이 담겨있었다. 이렇게 또 클래식의 넓은 바다로 풍덩 빠지게 된다.


2부를 연 슈트라우스는 전임자였던 최수열 지휘자가 2년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던 작곡가였고, 그걸 기념하기 위한 선곡이라는 인터뷰가 있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비교할 기회를 준다고? 호승심이 대단한걸? 했다가, 홍석원 지휘자가 오페라에 일가견이 있다는 약력을 보고는 아하! 했다.

오페라 모음곡이 실패하기는 쉽지 않기에, 기대한 만큼 흥겹고 다채로운 색깔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뭔가 지휘와 오케스트라 소리가 쫙쫙 찰지게 붙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0.1초 정도씩 살짝 어긋나서 전체적으로 다소 들뜬 소리가 들렸다. 뭐, 이런 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리스트의 교향시 3번 "전주곡"은 시작이라는 의미에 더 중심을 둔 선곡이었고, 목적대로 흥을 잔뜩 돋우고 막을 내렸다.


최수열 지휘자의 지휘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긴 시간 내내 어찌나 활발하게 팔을 휘둘러대던지, 근육통 생기는 거 아냐? 걱정이 들 정도였다. 젊은 지휘자는 또 이런 볼거리가 있구나, 싶었다. 실제로 땀으로 흥건한 얼굴을 몇 번 보았다. 힘과 패기, 열정의 지휘였다.

홍석원 지휘자에게서 돋보인 것은 리듬이었다. 팔의 움직임이 너무 리드미컬하게 움직여서, 어쩔 때는 즐거웠고, 어쩔 때는 방해받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2부의 음악이 대체로 흥겨웠던 데다가, 또 오페라 전문가라면 앞으로는 장점이 훨씬 많을 것 같다. 이렇게 또 새로운 지휘자에 익숙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집에 돌아왔는데, 며칠 후 관객의 평을 보려고 검색을 하다가 충격적인 글을 발견했다.


그동안 부산시향에서 성공적으로 진행한 R. 슈트라우스 사이클(2017~2019), 라벨 사이클(2020~2022)에 이어 홍석원 예술감독은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진행한다.


나 말러는 좀 무서운데...(말러와의 악연은 통영국제음악제 여행기에 적혀있음)

아, 신임 지휘자와 친해지려면 일단 말러랑 친해져야 하는 건가. 가을밤, 번뇌가 쌓여간다.



10월 첫 주, 부산시향의 두 번째 공연을 다녀왔다. 공연의 부제는 로맨틱. 가을이라서 로맨틱이라고? 진부해. 하지만 너무 좋아. 극한의 여름을 버텨낸 후의 보상으로 로맨스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브루크너 교향곡 제4번 "로맨틱"


협연자로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이 나섰다. 솔직히 이름으로는 기억하지 못했는데, 노부스 콰르텟 멤버라는 말을 듣고, 아하.. 했다. 그들의 실내악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프로그램은 기억나지 않지만, 멤버들이 서로가 서로를 흥겹게 대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 또 보고 싶다 생각했었다.

직전의 피아노 "황제"에 이어, 그다음이 바이올린 "브루흐"라면, 분명 새 지휘자의 영입을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위한 포석으로 읽힌다. 어찌 됐던 흥행작들이 연이어 나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평소 객석의 중간쯤, 그러니까 부산문화회관의 11번째나 12번째 라인쯤에 자리를 잡곤 하는데, 이번에는 앞에서 보고 싶어서 6번째 라인에 앉았다. 그에 더해, 내 바로 앞자리 사람이 일이 있어서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야말로 앞이 탁 트인 최고의 시야각 속에서 김재영의 연주를 고스란히 맞이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보다 솔로 연주자에게 훨씬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이 평소보다 날 것의 느낌? 그 생생함이 조금은 생경하기도 하면서도, 라이브 연주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이라 여기며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연주는 예상보다 시간이 길었다.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타이밍 때문일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서로가 딱딱 맞물리며 팍팍 치고 나가는 쾌감은 없었지만, 아름다운 멜로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로맨틱한 무드 조성에는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니까.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곡의 길이 때문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는데, 다행히 조금도 졸지 않고 끝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대곡을 "볼 때"는 지휘자의 액션이 특히 중요한데, 너무 움직임이 적으면 저절로 눈이 감길 때가 있다. 홍석원 지휘자는 아주 작은 음이라도 놓치지 않고 손끝과 몸으로 표현을 한다. 분절 단위로 음을 쪼개 춤을 추는 케이팝 댄서들의 춤에 익숙한 내 눈에, 이건 뭐 거의 춤과 비슷하다. 체력 소모가 극심할 듯한데, 러닝타임이 긴 곡을 들을 때는 정말 고마운 일이다.

기승전결에서 절정 부분이 특히 과하게 많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악기의 다채로운 매력을 듬뿍 만끽할 수 있는 곡이라는 느낌이었다.

지난 공연도 그렇고, 이번 음악감독은 "흥"이 많은 사람 같다. 그 지점에서 완전 내 취향.

시향의 공연은 매 회 기대가 되지만, 올 해는 특히 그렇다. 다음엔 또 어떤 음악으로 심장을 빠운스 빠운스 시켜줄지 두근두근, 기다려보자.


11월 초에 열린 부산시향의 세 번째 정기공연은 England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게 될 작곡가는 엘가, 아 영국이구나.. 했는데, 드보르작? 이 분과 영국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시작부터 미스터리였다.


엘가 첼로 협주곡

드보르작 교항곡 제8번


협연자는 첼리스트 이상은. 솔리스트에 대한 배움이 짧아 이번에 처음 만나는 연주자였다. 음원으로 먼저 접한 곡은, 재클린 뒤 프레의 65년 녹음. 이미 상찬이 가득한 데다가 비하인드스토리도 만만찮아서, 이 비감의 정서를 뚫고 이상은씨의 연주에 집중할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을 하긴 했다. 마침내 연주가 시작됐고, 오케스트라가 거의 반주에 가까울 정도로 솔리스트의 개성이 돋보이는 곡을, 이상은씨는 조금의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이, 명쾌하고 자신감 있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첼로 연주를 들을 땐 보통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고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이 곡에선 그렇지 않다. 부드러울 땐 한없이 부드럽다가도 단호할 땐 또 똑 부러지게 맺고 끊어주는 연주를 '보고 있으려면' 고개를 숙일 여유가 없다. 과장되게 팔을 크게 휘두르지 않는데도, 시선을 잡아두는 묵직한 움직임이 소리를 이용해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작품에 대한 설명에 나와있는 어떤 슬픔인지는 모르겠다. 내 눈에는 슬픔에 침잠한다기보다는 털어낸다, 흘려보낸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영국적이기보다는 한국적인 것인가? 기대했던 드라마틱한 처절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슬픈 과거가 있었답니다.' 또는 '지금 다 흘려보냈습니다'의 느낌이랄까? 어떤 분명한 목적, 해결을 향해 시종 내달리는 연주가, 어쩐지 기대와는 조금은 다른 감상을 남기며 연주가 끝났다.

가을과 첼로는 정말 찰떡궁합을 자랑하지만, 이 곡은 특히나 바바리코트 걸쳐 입고 낙엽 떨어진 공원을 걸을 때 최고의 배경음악이 되어줄 듯하다.


올해 들어 특히 드보르작의 작품을 접한 기회가 많았는데, 이렇게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기에 또 만나게 되었다.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은, 평소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에 빈필 연주 버전의 3악장이 등록되어 있어 잔뜩 기대가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가을에 정말 잘 어울리는 왈츠 아니겠는가.

새 지휘자가 온 이후로 부산 시향은 정말 귀에 쏙쏙 들어오는 흥겨운 멜로디로 중무장한 작품들만 가져 오고 있는데, 좋다. 아주아주 좋다. 무슨 일이든 신장개업은 언제나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듬뿍 주면서 시작하는 법 아니겠는가. 보통 이 8번은 9번과 패키지로 녹음된 음반으로 서비스가 되기 때문에, 솔직히 9번을 먼저 듣고, 시간이 남으면 3악장을 듣는 식이어서, 그 외의 악장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에 제대로 들어보는 기회가 되어 더욱 반가웠다.

1악장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 드보르작이네.' 하는 생각이 곧바로 들 정도로 작곡가의 어떤 인장이 확 느껴졌다. 역시 9번과 패키지인 이유가 있었다.

지휘자는 이번에도 강약에 따라, 리듬에 따라 마치 춤을 추듯 몸을 흥겹게 움직이며 내 눈을 즐겁게해줬다. 이런 지휘법은 홍석원 지휘자의 전매특허인 듯한데, 벌써 세 번째 보고 있으려니 이미 중독된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 지휘자에게 춤을 요구하는 관객이 되긴 싫은데 말이지.

교향곡을 들으러 가서 플루트와 첼로 파트가 가장 기억에 남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이 곡이 나에게 그랬다. 수많은 솔로 파트, 특히 트럼펫의 그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가을밤에 또 어울리는 선곡이라는 생각. 앞으로는 9번만큼, 8번도, 3악장 말고 다른 악장도 자주 듣게 될 거 같다.

그런데, 왜 영국일까? 곡을 들으며 영국의 초원도 떠올려보곤 했지만, 잘 모르겠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 곡의 초연을 영국에서 했다는데, 그게 이유일까? 팸플릿을 읽었다면 미스터리를 풀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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