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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May 28. 2024

맨발 걷기 할 때 듣기 좋은 클래식은?

2024, 5월의 클래식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부산문화회관, 5월 7일.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나서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와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죠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3번.


작년 연말의 끝자락, 라쉬코프스키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 3번을 한 무대에서 연달아 연주하는 독주회를 부산문화회관에서 진행했다.

"아... 저걸 한 공연에서 다 하는 사람도 있구나."

무슨 차력쇼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소리도 만족스러웠지만, 무엇보다 그 열정에 완전히 흥분해서 오랜만에 기립박수도 치고 좋아라 했었다.

열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 1월에 열린 부산챔버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앙상블오프스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독주회에 이어 곧바로 앙상블? 진짜 열정맨이었어!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라흐마니노프 연주회를 한다는 광고가 날아왔다.

"이 사람... 소처럼 일한다..."

살짝 무섭기까지 한 열정! 한국에 정착하면서 무슨 큰 빚이라도 진 건가...

지난번 공연도 너무 좋았고, 임윤찬이 나오는 반클라이반 다큐 때문에 라흐마니노프 뽐뿌를 받은 탓에, 좋은 건 또 듣자! 마인드로 예약을 했고, 바로 어제 공연을 보고 왔다.


중간에 프로그램이 바뀌어서 피협 1번 대신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가 연주되었고, 지휘자 없이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걸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평소 보지 못했던 여러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1. 피아노를 중앙에 두고 오케스트라를 보면서 연주하는 방식이어서 관객은 그의 등을 마주하며 공연을 관람했다. 덕분에 피아니스트가 사실 손이 아니라 어깨와 등으로 건반을 연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실크 셔츠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주름을 만들어내면서 다양한 전위적 패턴을 만들어냈다.

2. 무대에 가까운 곳에 있었더니 손등이 아니라 손바닥이 보였다. 손바닥 너머로 건반이 눌러지는 모습은 낯설고 신기했다. 마치 아이돌의 격한 안무 무대를 정면이 아니라 뒷면에서 보는 느낌. 귀한 직캠 영상 같아서 좋았다.

3. 본인이 지휘를 하다 보니 연주 중간에 오케스트라 부분에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공연 내내 팔이 쉬는 일이 없었다. 이 사람의 체력의 한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인지 곡이 끝나고 관객이 손뼉 칠 때 많이 들락날락하지 않고 곧 종료하긴 했지만.


진귀한 경험이긴 했지만, 그래도 피아니스트가 직접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지휘하는 건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아노 협주곡 공연을 볼 때, 미친 듯이 건반을 뛰놀던 손가락이 (오케스트라 파트가 나오면) 딱 멈추고 피아니스트가 호흡을 가다듬는 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휘자와 사인을 주고받는 눈짓에도 관객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그래서 앞으로 가급적이면 요런 형식의 공연은 참아보기로 한다.

그나저나 5개월 만에 라쉬코프스키를 세 번이나 만나다니, 도대체 어찌 된 사연인가 싶어서 검색을 좀 해봤다. 지난달 나온 기사를 보니 의문이 풀렸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루 평균 수면 시간 6시간. 스케줄이 적은 날 기준, ‘수업 2시간, 연습 5시간, 산책과 휴식 시간’.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40)의 시계는 매일 정확히 움직인다.

“스케줄이 별로 없는 날도 6시간 이상 피아노를 치진 않아요. 육체적으로 한계가 있으니까요.”

협연, 솔로, 반주까지 한 달에 많게는 13번. 러시아 출신의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다... 하루에 두 번 무대에 설 때도 있다. 오는 6월 29일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과 함께 하고, 오후 7시엔 부천아트센터에서 라프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개를 연주한다.

최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만난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는 “피아노를 치는 일은 내게 에너지를 쓰는 해로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생기를 줘 건강에 좋다”며 웃었다.

그는 한국 클래식 음악계 ‘열일’의 아이콘이자, ‘반주왕’이다. 수많은 연주자들이 피아노 반주가 필요할 때 라쉬코프스키에게 S.O.S를 보낸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색소폰 등 모든 악기를 섭렵하며 한 무대에 섰고, 심지어 솔리스트들의 음반 발매 간담회에서도 라쉬코프스키를 만나게 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소프라노 박혜상,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등 쟁쟁한 솔리스트들이 그를 찾는다.

이전엔 자신에게 찾아오는 모든 반주 요청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는 “존 케이지(1912~1992)가 모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라는 말을 했다”며 “그들이 유명하지 않더라도 만약 내게 찾아온 기회를 거절한다면 특별한 경험을 잃었다는 생각에 후회가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워낙 요청이 많아 개인 연주와 연습 시간을 고려해 선택하고 있다....


반주자로서 여러 연주자와 함께 할 때와 피아니스트로 홀로 무대에 설 때의 그는 같지만 다른 자아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연주할 때는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암보 연주가 ‘관행’이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의 곡을 온전히 체화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거치고 매 공연 긴장하며 기다린다. 물론 페이지 터너와 함께할 때도 있다. 그는 “페이지 터너는 가장 가까운 청중”이라며 “그를 위해 연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함께 한다”라고 말했다.

일 년에 무려 70여 회. 한국의 클래식 연주회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라쉬코프스키의 삶은 온전히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도 악보를 분석하고, 음악을 듣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영감을 충전한다. 그는 철저히 ‘현재형 인간’이다.

“전 늘 그리 먼 미래를 계획하진 않아요. 지금 이 상태가 좋아요. 이곳에서의 삶과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웃음)”


맨발 걷기(어씽)할 때 듣기 좋은 클래식


Bruno de Sa, Roma Travestita


광안리에 17년을 살았지만 해변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광안리 물은 해운대나 송정처럼 깨끗하지 않다. 해수욕을 해 보면 금방 안다. 해안에도 항상 해초가 널려있어 기묘한 냄새를 풍겼다.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은 또 어떻고. 더구나 오스씨는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해안은커녕 모래사장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어씽 광풍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해안가를 멀찍이 바라보는 주민 1로서 살았을 것이다.

해안가 맨발 걷기를 시도한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다. 가능한 한 거의 매일 해안가를 걷는다. 아무 때나 나가는 게 아니라 인터넷 스마트조석예보를 보고 썰물 시간에 맞춘다.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고자 모래를 높이 쌓아 놓은 탓에 파도가 닿는 부분이 상당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만조 때 나가면 마치 계단에 한 발씩 걸치고 걷는 것처럼 몸이 기우뚱해진다. 썰물이 최고조에 달해, 최대한 바닥이 드러날 때가 걷기 좋다.

뜨거운 태양은 얼굴까지 빈틈없이 감싸주는 모자로 가리고,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파도 소리가 적당히 들릴만큼의 볼륨을 조절해 두고 음악을 플레이한다. 자연과 하나 되는데 도움을 주는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어랏? 발바닥에 닿는 조개껍데기가 신경이 쓰인다. 어떤 것은 상당히 날카로워서 자칫하면 피를 볼 수도 있다. 바닥에 적당히 신경을 분산시켜서 걷는데, 그러다 보면 귀에서 들리던 음악이 사라지기 일쑤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의 클래식은 그냥 백색소음에 불과해진다. 이럴 땐 차라리 바닥으로 행하던 집중력이 다시 귀로 향해도 음악이 끊겼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신나는 케이팝이나 록음악이 더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든 어씽과 클래식을 연결해 보려고 노력하다 보니 결국 다다른 장르는 오페라 아리아다. 슬프고 처절한 아리아보다는 경쾌한 게 좋다. 그렇게 찾아낸 앨범이 '브루노 드 사'의 '로마 트라베스티타'다.  


앨범소개 : 브라질 출신의 소프라니스트 브루노 드 사가 에라토에 데뷔한다. 여성이 로마의 무대에서 공연이 금지되어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맡았던 18세기, 빈치, 스카를라티, 비발디, 갈루피 등의 오페라 아리아를 탐구하는 음반으로, 놀랍도록 높은 음역으로 순수한 소프라노 음성을 들려주는 브루노 드 사를 통해 긴장감 넘치는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프란체스코 코르티가 이끄는 일 폼모 도로와 함께 13곡을 부르는데 그 가운데 8곡이 최초 녹음이다.


일단 바로크 음악 특유의 챙챙 거리는 리듬이 발걸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고음이 끝없이 펼쳐지면서 귀가 심심할 틈을 안 준다. 일정한 형식이 반복되는 형태라 잠깐 주의력을 잃었다고 곡의 흐름을 완전히 놓치는 일도 없다. 바닥의 조개껍데기로 흩어졌던 집중력이 고음 한 방에 다시 싹 돌아온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주말에 청소할 때 듣는 노동요로도 참 좋다.

사실, 귀에 인간이 만들어진 소리를 집어넣지 않아도 바람 소리, 파도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음악이긴 하다. 다만 아직은 자연의 모노톤 소리를 즐기는 경지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언젠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클래식으로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모스크바의 여명, 티티아나의 첫 앨범


Sonata No. 24 in F-Sharp Major, Op. 78: I. Adagio cantabile - Allegro ma non troppo, Ludwig van Beethoven

Etüden im Orchestercharakter für Pianoforte von Florestan und Eusebius, Op. 13, Robert Schumann

Piano Sonata No. 1 In D Minor, Op. 28, Sergei Rachmaninoff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하다 얼마 전 완결된 <모스크바의 여명>이라는 웹툰이 있다. 한국의 남자 피아니스트가 죽고서 러시아의 대재벌의 외동딸로 태어나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는 회귀물이다. 남자가 여자로 태어난다거나, 가난한 피아니스트가 대재벌의 영애로 태어난다거나 하는 만화적 변주를 제하고 나면 꽤 전문적인 지식들이 많이 등장하는 클래식(피아노 위주) 웹툰이라 즐겨보았다.

다양한 피아노 명곡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다 좋지만, 특히나 주인공 티티아나가 러시아 내의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처음으로 녹음을 하는 파트가 좋다. 이미 어른이었던 전생의 피아니스트는 보다 어려운 곡들을 녹음하고 싶어 하지만, 프로듀서는 아직 젊은 티티아나의 지금 모습을 담고 싶어 한다. 그렇게 갈등의 순간들이 지나고 결국 티티아나가 선택한 곡은 다음과 같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4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1번.

십 대의, 아직은 완벽하게 여물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천재로 칭송받고 있는, 사실은 엄청난 연습으로 전생의 실력을 복각해 온 한 피아니스트의 첫 앨범으로 작가가 제시한 세 작품이다.

꼭 이거여야만 했을까 생각해 봤는데, 작품 제목에 해답이 있다 느껴졌다.

교향적 연습곡이라니, 그냥 소품이라고 하기에는 다양하고 꽉 찬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전생의 욕심을 다 내려놓지 못한 티티아나의 캐릭터성을 드러내기 딱 좋다.

특히 올해 들어서 슈만의 곡들에 푹 빠져 살았는데, 이렇게 또 기회를 얻어 모르던 곡들을 알게 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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