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통영국제음악제를 다녀오다
여행 마지막 날이 밝았다. 공연은 오후 3시다.
11시에 체크아웃을 하면 시간 보내기가 애매해서 맨발걷기 체험을 할 수 있는 나폴리농원에 가기로 헀다. 편백나무 숲속에 지그재그 길을 만들고, 바닥에는 편백나무 톱밥을 다져놓아 그 위를 맨발로 걷는 식이었다. 바람에 날라가지 말라고 톱밥에 물을 먹여두어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차가웠지만, 그만큼 편백향이 짙어서 더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휴식코너들이 있어서 한 시간 반을 지루하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개별 여행자들이 숲의 분위기를 즐기며 조용히 이동하는 와중에, ‘관광버스를 타고온 중년 남녀 단체 여행객들’은 우려한대로 소음을 몰고다녔다. 항상 궁금하다. 어디 학원이나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가르치기라도 하는 걸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자신의 예능감을 뽐내고 싶어하는 중년 남자와 그걸 말리거나 타박하기는 커녕 꺄르르 쇳소리 섞인 웃음으로 받아주는 중년 여자의 에티튜드 같은 거.
이들을 피해 다니다보니 예상보다 더 오랫동안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다.
점심은 공연장에 딸린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식사하고 공연 직전까지 죽치고 앉아있으려는 의도였다. 공연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식당 안은 이미 인파로 북적였다. 운이 좋아 마지막 남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손님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더니 결국 긴 줄이 생겨버렸다.
식사는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천천히 먹는다고 노력했지만, 결국 음식은 사라졌고, 빈 접시만 늘어놓고 앉아있기 불편해졌다.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니 다들 식사를 마쳤지만 일어나려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다들 우리와 비슷한 목적인 듯했다. 어쩌지… 눈알을 굴렸지만, 우리는 또 이런 건 잘 못견딘다. 결국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공연은 아직 1시간 넘게 남아있었다.
남은 시간도 때우고 소화도 시킬 겸 건물 외곽으로 나있는 산책로를 돌아다니다가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스타니슬라프 코차놉스키를 마주쳤다. 그 분도 공연을 목전에 두고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산책을 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공연장 주변으로 벚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바로 밑으로 파도가 철썩이는 통영 바다가 펼쳐져있으니 오늘의 프로그램을 시각화한 풍경 속을 거니는 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 첫 공연 때는 1층 끝자리에 앉았던 터라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음악책 어딘가에서 본듯한 고전음악가(근엄한 눈매에 곱슬머리)처럼 생겼다. 목례를 하니 미소를 덧붙여 받아준다. 꼭 공연 비하인드 영상 같은 거에 특별출연한 기분이 들었다. 일찍 나오길 잘했다.
3월31일,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니콜라이 체레프닌, Prelude to "La princesse lointaine", Op. 4( 먼 나라 공주 전주곡)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D장조
드뷔시, 바다
올해 페스티벌오케스트라 레파토리에는 하프의 지분이 꽤 된다. 전체적으로 이국적이고, 부드럽고, 환상적이다.
체레프닌의 '먼나라 공주 전주곡'은 많은 부분 '셰에라자드'를 연상시키는 멜로디가 가득하다. BBC에서 제작한 달콤한 시대극의 OST라 해도 믿겠다.
라벨의 피협은 이전에 분명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땐 좋은지 잘 몰랐는데, 마치 처음 듣는 곡처럼 마음에 콕 박혀버렸다. 확실히 이번 공연들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평소보다 관악기 솔로 부분이 더욱 또렷하게 들리고,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화음에 마음 언저리가 계속해서 울렁거렸다.
왼손을 위한 피협은 작년 선우예권의 리사이틀에서 들은 '브람스 왼손을 위한 샤콘느 나단조'와 아무래도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선우예권은 왼손을 허리 뒤에 놓고 연주했다), 협연자로 나선 피아니스트 베르트랑 샤마유는 오른 손으로 피아노를 붙잡고 그야말로 망치로 내려치듯 왼손으로 건반을 때려나갔다. 저래서 피아노 치다 부상을 입는구나 싶을 정도로 격정적인 연주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앵콜에서는 역시 라벨의 최고 히트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나왔다.
프랑스 연주자가 라벨로 수놓고 떠난 자리는 역시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의 바다로 채워졌다.
이번 여행의 어쩌면 하일라이트. 2018년에 나를 실망시켰던 통영이 다시 멋지고 세련된 음악도시로 각인될 수 있는 중차대한 연주가 시작됐다!
...는 오버고,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바닷가에 딱 붙어있는 연주회장에서, 방금 바닺가에 심어진 벚꽃길을 산책을 하다 온 나에게 드뷔시의 바다는 이미 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기대했던대로 아주 멋진 파도를 탔다.
통영페티스벌오케스트라, 확실히 첫날보다 둘째날이 더 좋았다!
공연이 끝나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통영에 와서 아직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 산더미지만, 여행 끝자락엔 항상 짜장면이나 라면이 땡긴다.
“거가대교 휴게소에서 라면이나 사먹을까?”
오스씨도 오케이였다.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해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 통영국제음악제는 이전과 비교하면 공연에 충실한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낮시간에 운동량이 큰 행동은 금지, 공연 레퍼토리도 음악앱에 저장해두고 수시로 들었다. 음원으로 접한 세계 정상급 연주들과 공연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정교하게 다듬은 녹음본도 정말 좋지만, 역시 직접 듣는 게 더 좋다. 소리도 소리지만 눈앞에서 정성을 다해 건반을 짚고, 활을 긋는 연주자에 더 몰입하게 된다. 아무리 기기묘묘한 천상의 소리도 결국 사람이 내는 소리다. 고통스러울만큼 많은 연습을 통해 숙련된 사람만이 그 소리를 낼 수 있고, 그걸 눈앞에서 직접적으로로 교감하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앞으로도 계속 건강과 지갑이 허락하는 한, 공연장을 찾을 것 같다.
그나저나 김영하가 말하는 여행의 내면적 목표는 충족되었을까?
'내년에도 통영국제음악제에 또 와야지.'
저항없이 튀어나오는 이 속마음만큼 '잘 추구된 내면의 목표'가 또 있을까 싶다.
내년에는 또 어떤 멋진 음악, 멋진 퍼포먼스가 준비될까.
부디 내년에도 부디 건장하게, 같은 자리에서 그 순간들을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남은 이야기
강구안 문화마당은 통영 최고의 관광지인데 주말 내내 사람이 많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련된 건물들이 항구를 둘러싸며 죽 늘어서 있지만,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말이, "손님이 다 사라진 것 같아요."
코로나 시절에는 그래도 국내 여행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들 해외로만 가서 그런 걸까.
맛있는 것 많고, 경치 좋고, 어디서 꿀리지 않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음악당도 있는데, 왜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된 걸까.
통영활어시장에 가서 이시가리(줄가자미)를 봤다. 가격을 물어보니 우리 동네의 반값보다 싸다. 근처 가게에서 초장값 내고 먹어도 저 정도면 돈 버는 건데?
우린 공연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해서 먹지는 않았다.(아직도 소주 없이 회를 먹지 못하는 회린이)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제철 이시가리 한 점 못 먹은 게 아깝다.
통영에 놀러가시라, 다들.
분명 오감만족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