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통영국제음악제를 다녀오다
3월 30일. 데죄 란키(Dezső Ránki) 피아노 리사이틀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a단조. D537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Op.27/2 월광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3번 e플랫 장조, Op.27/1
슈베르트, 즉흥곡
'청명'하거나 '명징'이라기 보단, 부드럽고 여유가 넘쳐서 듣기 좋았다. 봄밤에 어울리는 선율이었다.
위의 문장은 공연이 끝난 후 급하게 메모장에 썼던 짧은 감상이었다.
그랬다. 따뜻했다. 하지만 나른하지는 않았다. 1951년생인 데죄 란키는 태극권을 연마한 할아버지처럼 약간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 나와 피아노에 앉자마자 힘 있게 "땅따다다닷!" 슈베르트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월광도 구름에 달 가듯 스르륵 지나갔다. 오래전 들었던 백건우의 그것이 맑은 겨울밤의 고고한 달빛이라면, 몽글몽글 맺히는 꼴망울처럼 봄의 정취가 느껴지는 연주였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음원으로 들어도 한 번에 귀를 사로잡는 멜로디가 많아서 기대가 많았다. 칭찬이 자자한 2악장은 과연 한번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 멜로디였고, 나머지도 여유 있게 풀어져서 전체적으로 꿈속을 노니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런 곡을 들을 때면 확실히 클래식 공연장에 가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체험인지 알 게 된다. 평생 오로지 이 일만을 매일 같이 해 온, 그것도 엄청나게 잘해 온 사람이 표현하는 '감성의 정수'를 편안히 앉아 맘껏 공유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공연이 끝나고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미리 찾아둔 멋진 술집에 갔다. 핫한 가게답게 자리가 만석이라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 갔다. 사람이 미어터지는 집이 아니었는데도 주문을 하고 20분이 지나서야 안주가 안 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닭꼬치구이를 주문했었는데, 냉동되어 있는 꼬치가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는단다. 그래, 통영까지 와서 냉동 꼬치안주를 먹겠다는 생각 자체가 글러먹었어. 어떻게 하실래요, 주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묻길래 다음에 올게요, 밖으로 나왔는데 처음 목적지에 자리가 하나 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럴 때를 표현할 수 있는 속담이 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 똥차 가니 벤츠...
와인 한 잔, 마리네이드 된 문어 안주를 주문하고 공연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술이 슬슬 떨어져 가는데, 이번에도 안주가 안 나온다. 부엌에 있어야 할 사장님이 홀에 나와 손님들과 떠드는 모습에 불안해져 안주 언제 나와요, 하니 당황한 모습. 주문 미스가 있었다고? 죄송해요,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후다닥 뛰어들어간다. 이렇게 안 좋은 우연이 겹치면 보통은 무서운 기분(묫자리에 동티가 났나?)이 드는데 그날은 안 그랬다.
술이 맛있어서일까, 아니면 가게 분위기가 멋져서일까, 생각해 봤는데 아니었다. 그만큼 공연이 좋았다. 그 정도 일로는 먼 나라에서 온 피아니스트가 훈훈하게 덥혀놓은 마음이 구겨질 수 없었다. 뒤늦게 나온 안주는 푸짐했고, 맛도 있었다. 술이 모자라 와인 한 잔 더 시켰다.
이제는 밈이 되어버린 어느 여배우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시인 백석의 글이 장식되어 있는 강구안 뒷골목에는 재미있는 간판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