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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Apr 11. 2024

3. 더 이상 이주하지 않고 대신 여행을 떠난다

2024 통영국제음악제를 다녀오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전날 마신 술의 알콜감이 살짝 남았다. 욕조가 있었다면 물 받아 들어갈까 말까 갈등할 수준이어서 어쩔까 하다가 2018년도에 쉬러 들어갔다가 도떼기시장임을 알고 성급히 나온 사우나&찜질방이 숙소 근처라 추억도 되새길 겸 찾아갔다. 하지만 입구가 막혀있고, 그 사유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코로나를 이기지 못해 문을 닫았단다. 그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이었는데, 이럴 수가!

통영은 아직 코로나의 여파를 벗어나지 못한 걸까?

그러고 보니 분명 봄의 주말이고,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도, 대표 관광지인 강구안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일까?

“어제 낮에도 사람 거의 없었어.”

오스씨가 기억해 줬다.


근처 다른 목욕탕에서 간단히 씻고 나오니 숙소 앞 강구안 문화마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제부터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쏟아지는 시간인 건가 했는데? 한 떼의 예수쟁이들이 모여서 동성애자를 욕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머리가 하얀 목사는, '간신배가 왕 앞에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할 때의 발성'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고, 선거운동원처럼 똑같은 옷을 맞춰 입은 젊은이들은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깃발을 성의 없이 흔들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시간을 보니 겨우 아침 9시였다. 차량에 순례단 어쩌고 쓰여있는 걸 보니 통영 사람들은 아니고 다른 지방에서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벚꽃이 활짝 핀 좋은 날, 새벽같이 일어나 관광버스를 타고, 음악으로 하나 되자는 취지의 국제 음악제가 열리는 통영까지 와서 타인의 정체성을 “반대”하는 기도회를 열려면, 평소 그 사람들은 어떤 지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예전에는 저런 무리를 보면 화가 났지만, 이제는 그냥 안타깝다. 그들은 뭐가 그렇게 두려울까.

늙은 목사야 지 밥 벌이 한다고 저러는 거니까 미친놈! 욕 한마디 해주면 되지만, 예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그 좋은 일들 다 놔두고 남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그 젊은 애들이 참으로 불쌍하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옥상이 루프탑으로 꾸며져 있다. 공연 시간은 저녁이고, 아침나절에는 딱히 할 게 없어 읽을 책과 글 쓰는 노트를 들고 루프탑에 올라갔다. 다른 숙박객들은 모두 밖에서 일정을 보내기로 했는지 루프탑에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고, 덕분에 방해 없이 따듯한 봄햇살을 독점할 수 있었다. 종교인들의 푸닥거리 장소가 근처여서 소리가 올라오기는 했지만, 음악앱을 열어 오늘 있을 공연 레퍼토리를 플레이하니 일순간에 미니 콘서트장이 되었다. 자신들보다 더 하늘에 가까운 곳에서 중년의 게이 두 명이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애들이 이 시기 통영에 와서 소리질러 불러야하는 찬송가가 아니라 슈베르트의 음률을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오길 기원해본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공연장에서도 멀리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왔었다. 공연 안내 방송을 길게 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작곡가 윤이상을 빨갱이라면서 욕하는 스피커 소리였다. 확성기를 단 봉고차 한 대가 공연장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부지런한가 싶다.

윤이상을 빨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동성애자가 거북살스러울 수도 있다. 뭘 모르는 이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저렇게 나대는 사람들, 즉 입만 열면 빨갱이 타령하는 사람과 동성애자 욕한다고 부지런 떠는 사람들은 한 패인 경우가 많다. 그들이 과거에 이 나라 발전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했든 간에, 이제는 이 나라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 같다.

그런 식으로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린 일이 세상엔 참으로 많다.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해가고 있는가. 내가 가진 생각들을 계속해서 점검하고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맞춰가지 않으면 나도 얼마든지 구태가 되어 나아가려는 젊은이들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것만 피하려고 노력해도 제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번 여행에서는 맛집을 찾지 않기로 해서 숙소 근처에서 해물뚝배기를 먹었다. 골목 안 쪽에 위치한 평범한 가게여서 시중가보다 2-3천 원 쌌지만 맛은 최고였다. 음식 재료가 풍부한 동네에 가면 꼭 유명한 가게를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동피랑에서 만난 무지개계단.

오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피랑에 갔다.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에 왔었는데, 그 사이 많이 변해있었다. 주민들을 위해 조용히 해달라는 경고문구가 생각보다 적어서, 이제는 문화로 정착되었나 싶기도 하고, 항의할만한 주민들이 다 떠났나 싶기도 했다. 푸른색으로 가득한 카페에 앉아 인스타에 올릴 예쁜 음료를 마셨다. 그게 다였다. 뭔가 내 발길을 잡아둘 만한 한 방이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주말인데도 사람이 거의 없는 걸 보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걸까.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연을 보기 위해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숙소 근처인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국제음악제 프로그램 중 하나인 프린지 공연을 하고 있어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자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겠는데?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누군가가 계속 노래를 불렀고, 참 듣기 좋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밖에선 이름을 알 수 없는 펑크 밴드가 달디달고 다디단 밤양갱을 노래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자 다시 책을 들고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프린지 공연장이 내려다 보인다. 노래는 라이즈의 get a guitar로 바뀌어 있었다. 5층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오는 동안 어딘가 힘이 빠져버린 밴드 사운드는 꼭 오래된 LP판을 듣는 것 같았다. 카페의 백색소음처럼 말랑말랑 해진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글을 읽고 쓴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인증샷 찍는 것보다 더 행복한 시간이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거의 다 읽어간다. 이 책은 광안리에 있는 독립 서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겉을 포장지로 싼 블라인드 방식으로 판매하는데, 내 나이 독자에게 추천하는 책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서점 지기 말에 따르면, 작가가 내 나이 때 썼다는 게 이유였다.

좋은 글들이 넘실대지만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작가 개인의 이야기였다. 알고 보니 나랑 비슷한 구석이 꽤 있었다. 나도 작가처럼 또래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갔고, 시도 때도 없이 이주를 하며 살아왔다. 작가는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잦은 이동으로 인해, 장소뿐만 아니라 사상도, 가치관도, 또 사람도, 정체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서 홀가분하게 잘도 떠나면서 살아왔고, 덕분에 수중에 무엇 하나 쥔 것 없는 삶이었어도 아쉽다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탐욕스러운 주제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가치관으로 품고 산다고 떠벌이기도 했다.

정말 그랬을까?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 젊고 치기 어린 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쥐뿔도 없이 목소리만 컸던 그 녀석은 분명 '난 별 일 없이 산다'라고 노래하겠지만, 안전한 관계를 추구하는 동물적 본능까지 없앨 수는 없었음을 지금의 난 잘 알고 있다.


끝없이 다양한 무언가로 이주하며 살아오던 내가 변화한 것은 오스씨를 만나서였다. 오스씨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바꾸는 것, 떠나는 것, 다 싫어한다. 환갑을 훌쩍 넘겼지만 대학생 때 입던 옷을 아직도 가지고 있고, 나를 만나기 전에는 소속 집단에서 마련해 준 단체 여행만 다녔다고 한다. 툭하면 떠나려는 자와 가급적 남으려는 자의 동거생활이 처음부터 순탄할 수는 없는 일. 여러 번 위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오스씨의 '한 곳에 힘 있게 붙어있으려는 고집'이 힘을 발휘했다.

그렇게 오스씨 덕에 난 더 이상 이주를 하지 않고, 대신 여행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반드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타임머신 타고 과거에 가서 녀석을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뽈락회를 먹어봐."

"........"

"비트코인도 한 100개 사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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