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통영국제음악제를 다녀오다
집에서 통영까지는 1시간 반 정도. 체크인 시간에 맞춰 가도 되지만, 여행이란 것이 또 그러면 너무 섭섭하다. 요즘 인기라는 해안길 맨발 걷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통영 가는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거제도 덕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평일 아침에 누가 있을까 싶었는데, 세상에,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역시 한국인! 몸에 좋다는 것만큼 빠르게 유행하는 게 없다.
유튜브에 나온 박사님의 충고대로 초보니까 일단은 30분만 걸어보기로 했다. 해안선이 짧아서 계속 이쪽에서 저쪽으로 왕복해야 하는 단점은 있지만, 내가 사는 광안리와는 달리 해안 경사가 거의 없어서 걷기에 상당히 편했다.
'애프터 걷기 시스템'도 잘 되어 있었다. 아주 작은 해변인데도 카페가 많았고, 어떤 곳은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발 씻는 곳까지 만들어두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게 참 빠르다. 장점(편하다)인지 단점(극성이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다시 통영으로 향했다. 악셀을 밟는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오랜만의 맨발 걷기에 발바닥 세포가 놀란 것일까. 오스씨는 아무 느낌 없단다. 오스씨에 비해 내 발바닥 두께가 얇아서인가, 아님 세월의 더께가 얕아서인가.
숙소는 오후 4시 체크인인데, 도착해 보니 2시 30분이었다. 짐을 맡겨놓고 놀러 다닐까 하다가 1층이 카페처럼 꾸며져 있어서 그냥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로 선정된 책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다. 여행에 대한 통찰이 넘실넘실해서 여행지에서 읽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
김영하의 통찰에 따르면, 무릇 모든 여행기는 여행자가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외면적 목표)과 화자 자신도 모르는 채 추구하는 것(내면적 목표)이 담겨있다. 어떠한 목표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결국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상황과 결부시켜 보면, 이번 여행의 외면적 목표는 클래식 공연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내면적 목표가 분명 있을 것이다.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자신도 모른 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니까. 부디 여행이 끝난 후 '좋은 추구'였길, '좋은 내면의 목표'를 달성했길 바라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행의 재미가 하나 더 해진 기분이 들었다.
머리 긴 남자, 스카프 맨 남자, 수염 난 남자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패션위크가 열리는 길거리가 아니라면 바로 클래식 공연장이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 클래식 페스티벌에 가면 항상 기대가 된다. 이번엔 또 어떤 멋진 남자들을 볼 수 있을까.
개막 공연이어서인지 예상대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왔는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남자들이 수십 명의 일행을 이끌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고 있었다. 로비에는 한껏 꾸민 사람들 반, 지극히 평범한 차림새의 사람들 반이었다. 차림새가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옷차림을 신경쓰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로 클래식 공연에 익숙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내내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크게 터져 나왔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맹렬히 타올랐다 한순간에 가라앉는 방식으로 악장이 끝나면 본능적으로 박수가 치고 싶어 진다. 곡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그런 박수를 꽤 미워하는 것 같던데, 나는 때때로 터져 나와주길 기대한다. 이번 공연은 ‘초보자들’도 꽤 왔구나, 그런 증거처럼 느껴져서 반갑다. 가뜩이나 클래식 인구가 줄어든다는데, 뉴비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쳤던 그 사람은, 공연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이 왜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지, 그 이유를 공부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클래식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이 그 사람 앞에 놓여 있다. 나도 그랬다.
첫째 날 공연. 3월 29일,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베를리오즈, 이탈리아 해럴드
림스키 코르사코프, 셰에라자드
통영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홍콩 신포니에타와 TIMF앙상블 멤버들을 주축으로 여러 능력 있는 객원들로 꾸려졌다고 들었다. 악장은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교향악단의 악장 Florin Lliescu, 지휘는 독일 하노버 NDR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스타니슬라프 코차놉스키다.
베를리오즈의 작품 '이탈리아 해럴드'는 바이런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만든 작품으로 몽상가인 해럴드가 이탈리아 시골을 떠돌아다닌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비올라 협연자인 앙투안 타메스티가 지휘자 옆에 서있지 않고 시종일관 무대를 떠돌아다닌다. 이에 대한 부산일보 김은영 기자의 묘사를 보자.
"처음 연주가 시작될 때만 해도 무대에 비올리스트 타메스티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었다. ‘걸어 들어오면서 연주를 하려나’ 싶었는데, 웬걸 3분여 동안 오케스트라 연주가 흐른 뒤 왼쪽 무대에서 살금살금 나오더니 하프 옆자리로 이동해 독주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하프와 2중주를 연출하는 게 아닌가. 이어 그는 곡이 끝날 때까지 호른 혹은 바순, 더블베이스 옆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연주했다. 급기야는 다른 연주자 세 명(바이올린 2명, 첼로 1명)과 함께 ‘오프 스테이지 밴드’(무대 바깥으로 나가서 연주) 장면도 연출했다."
검색해 보니 이 아이디어는 타메스티가 낸 것으로 이미 여러 연주에서 시도했다고 한다. 협연이란 당연히 지휘에 맞춰 오케스트라와 음을 맞추는 것일진데, 지휘자 옆에서 지휘봉을 보지 않고 돌아다니며 음을 맞추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연습이 있었을까. 광택이 나는 검은 가죽슈트를 몸에 감싸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청중을 완전히 음악 속으로 끌어당기는 타메스티의 연기력도 대단했다. 클래식 무대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요, 여러분!
웃음 포인트는 또 있었다.
악장인 Florin Lliescu(어떻게 발음할지 몰라서 그냥 외국어로)은 연주할 때 제스처가 아주 큰 사람이어서 시종일관 온몸을 흔들어댄다. 자칫 정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연주를 하는 그의 표정이 하도 즐거워 보여서 빙긋 미소짓게 된다.
그의 와일드액션은 2부 연주곡인 '셰에라자드'에서 절정에 달했다. 사막의 공주를 표현하는 바이올린 독주를 연주하는데, 고아한 느낌의 신비한 공주라기보다는 실사영화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당차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로 뭉친 연주자들은 대부분 젊다. 또 표정에서부터 열정이 느껴질 정도여서 힘을 모을 때는 엄청난 파워를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때론 그것이 조화를 깨는 이유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원했던 셰헤라자드와는 조금 달랐지만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로서는 충분히 강렬했다.
공연이 끝나고 숙소에 오니 거의 열 시에 가까웠다. 그냥 자기엔 아깝고, 무언가를 더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술을 마시고 싶은데, 통영의 자랑인 다찌 집들은 안주가 너무 거해서 제쳐주고, 대신 만만한 와인바를 찾았다. 한 잔 시켜 놓고 오늘의 공연에 대해 떠들다 보니, 아이고야, 분위기가 달아올라 버렸다. 결국 다른 술집에서 몇 잔 더 마시고 숙소로 돌어왔다. 음악으로 말랑말랑해진 머리도, 배도 한껏 부풀어버려 잠들기가 쉽지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