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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Apr 09. 2024

1. 군침 도는 프로그램들

2024 통영국제음악제를 다녀오다

지난겨울, 인스타그램을 돌아다니다가 2024년 통영국제음악제 광고를 봤을 때 속으로 헉, 했다.

앞으로 클래식 많이 들어야겠다 다짐하며 책도 읽고, 집에 있던 CD도 듣고, 음악앱에 가입하고, 부산에서 열리는 공연도 다녔지만, 통영국제음악제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부산 사는 클래식 팬에게 통영국제음악제는 그야말로 축복 중 축복(거리상)이라 할만한데, 우리는 2018년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있었다.


당시 우리가 볼 공연은 세 개였다.

첫째 날 개막공연 :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정확한 감상은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난해한 걸 듣는다는 사실에 살짝 긴장했던 것 같다. 잔뜩 쫄아서 공연장 의자에 앉았는데, 윤이상의 음악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기괴한 현대음악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스토리가 느껴질 만큼 이해하기 쉬웠다. 음원으로 들었다면 달랐을 텐데, 공연장이 주는 마법 같은 것이 분명 있었다. 이런 음악은 반드시 현장에서 들어야 한다.

전설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브람스 곡 협연자)도 그날 처음 보았다. 포스가 포스가 그냥...  

둘째 날은 스티븐 슬론 (Steven Sloane)이 지휘하는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Bochum Symphony Orchestra)와 소프라노 황수미가 함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9번

1부는 괜찮았다. 오스씨의 기억에 의하면(오스씨는 나보다 기억력이 열 배는 좋다) 내가 황수미의 목소리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 다시 들어보고 있는데, 녹음이 쨍하게 들리긴 해도 현장에선 뭐 훨씬 좋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부산시향 정기회원으로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싫어할 수는 없으니까.(최수열 음악감독 재직시절 부산 시향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곡을 공연했다)

문제는 말러였다. 그때 우리는 좋은 자리를 구하지 못해, 박스석에 앉게 되었다. 무대를 보려면 고개를 45도 이상 꺾어야 하는 좌석이었다. 황수미의 노래까지는 어떻게 견뎠는데, 1시간 20분짜리 말러 고향곡은 무리였다.

중간에 그냥 나가버릴걸.

그 지루한 걸 끝까지 듣고 나오니 두통이 엄습했다.

숙소로 귀환했지만 말러발(發) 두통이 떨어지지 않았고, 잠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행증후군까지 겹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일어났더니 설상가상, 목이 오른쪽으로는 아예 돌아가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오후 3시로 예정된, '주세페 알바네세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볼 수 없었다.


11시 체크인을 하고 강구안에 있는 해수사우나&찜질방에 가서 몸도 풀고 한숨 자고 나오자 했다. 찜질방에 가봐야 자기 힘든 예민한 몸뚱이였지만, 달리 선택지도 없었다. 그러나 과연 축제에 일요일! 관광객들이 밖에는 안 돌아다니고 다 찜질방으로 놀러 온 것 같았다. 아무 데다 누워서 어디 어디를 다녔는데 좋았다 별로다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결국 쫓기듯 나와서 점심을 먹고 공연장에 일찍 도착해 차 시트를 젖히고 누웠다. 눈에 덮어두면 기절시켜 준다는 메구리즘까지 동원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두통+졸음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공연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것이 통영국제음악제와의 마지막이었다.

공연도 힘들었지만 사람들로 넘쳐나는 정신없는 통영 거리도 안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참고로, 그 후 말러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어떻게든 공연을 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그때의 모습이 사진첩에 남아있었다.


"올해는 무슨 프로그램을 하려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공연 레퍼토리를 훑어보았다. 통영국제음악제는 보통 국내 초연 작품이나 쉽게 접하기 힘든 작품을 주로 올린다고 생각했는데, 프로그램을 보니 살짝 방향성이 바뀐 것 같았다. 개막 공연에 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가 들어있고, 다음 날 피아노 리사이틀에는 베토벤 '월광'이 있었다. 두 번째 오케스트라공연도 드뷔시의 '바다'다.

어? 쉽다, 쉬워!!! 익숙한 맛에 군침이 싹 도는 나 같은 사람을 유혹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잊고 있던 통영 앞바다의 포근했던 풍광과 싸고 맛있는 해산물이 떠올랐다. 축제 기피증만 아니면 가고 싶은데 말이지...

어쩔까나… 갈등하다가, 예매 오픈이 며칠 지났는데도 1층 자리가 많이 남아있었고, 거기다 조기 예매하면 30%나 할인해 준다는 말에 에라 모르겠다, 호다닥 카드를 긁었다.


다음은 숙소 잡기. 예전 기억에 따르면 축제 기간에는 낡은 콘도도 자리가 없고,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쌌었다. 축제 기간 숙박비는 원래 바가지의 끝판왕! 이건 전 세계 공통이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한 달 전에 예약페이지가 열리는 방식이라 미리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평상시 요금은 저렴했지만 축제 기간에는 얼마나 올려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이미 판매를 시작한 호텔들은 역시나 한 푼의 에누리 없는 ‘정가’를 고집하고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 검색을 해보니, 우리가 통영을 멀리했던 사이에 게스트하우스가 엄청나게 많이 생겨 있었다. 잘 때 소음에 민감한 사람이라 게스트하우스는 피하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평이 좋은 게스트하우스들이 꽤 있었다. 트윈 침대를 가진 방도 있고, 가격도 굉장히 저렴해서 갈등이 생겼다. 이틀을 묵어도 콘도에서의 하룻밤 보다 쌌다.

"일단 예약을 해두고 무료 취소 가능할 때까지 고민해 봤다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돈 더 주고 조용한 숙소로 변경하자."

"그르자, 그르자."

그렇게 해서 강구안 문화마당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현금으로 방값을 몽땅 지불했지만 규정된 기간 안에 취소하면 돌려준다는 문자도 확실하게 챙겨두었다.

그러다 겨울 지나 봄이 오고,  이것저것 한다고 바쁘게 살다 보니, 숙소를 변경할까 하는 생각조차 잊은 채, 취소 가능 날짜도 지나버리고 마침내 그날이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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