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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Mar 14. 2024

연광철, 시인의 사랑, 성공적!

2024, 3월의 클래식

우리의 클래식 공연관람은 대부분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공연 위주이고, 특히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말 오랫동안 부산시향을 이끌어오던 최수열 지휘자가 그만두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지휘자에 대한 선입견(신경질적이고 무뚝뚝한 천재?)과 사뭇 달리, 친근하고 겸손하고 자상한 이미지를 적극 표현해 온 최수열 지휘자. 재직 기간 중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모리스 라벨의 전곡 연주 등 수준 높은 프로그램으로 매달 정기연주회를 기대하게 만들었는데, 삶의 다음 단계를 펼치기 위해 부산을 떠나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 그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한숨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상임지휘자가 사라진 부산시향이 당분간은 객원 지휘자 체제로 운영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부산 시향의 공연을 접했을 때는 중국인 리 신차오 지휘자가 상임이었는데, 그의 지휘로 만들어지는 음악들이 꽤 매력적이어서 정기회원으로 가입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시향을 떠났고, 그 이후 부산시향은 객원 지휘자를 초빙해 연주회를 이어나갔다. 

그때부터 시향 공연을 갔다 오면 어쩔 수 없이 탄식을 흘러나오곤 했다. 분명 아름다운 음률로 넘치는 시간이었지만 중간중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느낌? 클래식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막귀인 나조차도 오케스트라가 삐걱거리는 순간을 목격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상임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의 모습이 어떤지, 음악감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최수열 음악감독이 취임하고, 서너 번의 정기연주회를 거치면서 어딘가 들떠있던 음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인상을 받았다. 한 작곡가의 전곡 연주를 목표로 삼는다는 점도 신선했고, 굵직한 곡들 사이사이 익숙하지만 뻔하지 않은 변주를 넣어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그래서 그가 상임으로 있던 기간 동안 우리의 공연 예약 목록에는 시향 정기공연이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상임지휘자가 없다고 하니 이후에 진행될 시향 정기 공연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스씨에게 이런 감정을 말하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 다음 상임이 올 때까지 정기 공연은 좀 쉬고, 기획 공연 위주로 관람 계획을 짜볼까?"

교향곡과 협주곡을 제외하면 대체로 피아니스트 공연 정도에만 관심을 보여왔었다.

"그러지 모."

그렇게 해서 2024년 우리의 공연 포트폴리오에는 시향의 정기공연이 없다. 대신 시향 멤버 또는 다른 단체의 기획 공연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첫 번째가 1월 달에 열린 챔버페스티벌이었다면 이번 달에 선택한 것은!


BSO 솔로이스츠 체임버 시리즈


가끔 시향 공연의 객원으로 참여해 익숙했던 오충근 지휘자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기획공연이다.

첫날은 목관 5중주와 금관 5중주, 둘째 날은 현악 6중주와 8중주 공연이다.

평소 공연으로 접하기 힘든 구성이고, 곡들은 익숙하지만 이런 편성으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잔뜩 기대를 하고 공연장을 찾았다.

첫날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목관 5중주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모음곡(Bizet, Opera ‘Carmen’ Suites), 모차르트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c장조 작품 265(Mozart 12 Variation Oh 'Ah Vous Diiral - Je Maman' In C Major K.265), 그리브스, 모차르트의 터키 락 맘보(Mozart's Turkey Rock Mambo for Wind Quintet by Terence Greaves)를 연주했고,


금관 5중주가,

에발트, 금관 5중주 제1번 작품 5(Evald, Brass Quintet No 1, Op5), 바버, 현의 위한 아다지오 작품 11(Barber, Adagio for strings Op 11), 네이글, 다섯을 위한 자이브(P. Niagle, Jive for Five)를 연주했다.


안타깝게도 관객이 너무 적었다. 그동안 다녔던 공연 중 가장 관객수가 적어서, 이런 공연은 원래 관객이 안 드는, 소위 지인들만 오는 공연인지 아니면 광고를 덜 해서 관객이 들지 않은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공연은 아주 흥미로웠다. 평소 가까이서 볼 기회가 거의 없는 관악기 연주 모습을 세세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무리 관악기 소리가 크다고 하지만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악기 하나하나를 찾아내서 음미하기 힘든데, 각각의 악기들이 연주자들의 손가락과 호흡 하나하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관람 시간'이었다.


가장 흥미를 끌었던 연주는 '다섯을 위한 자이브'였다. 튜바의  JAZZY 한 애드리브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아주 귀한 경험이었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의 관악 버전도 처음 들었는데, 전날 본 영화 '듄 파트 1'에서의 여러 장면들(주로 죽음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슬픔을 장식하는 관악기만의 세련된 표현에 새삼 감탄할 수 있었다.

목관 공연은, 오보에가 공연 중에 리드를 교체하는 모습, 클라리넷 연주자(백동훈 연주자)가 너무 멋있었다는 것이 기억난다. 어쩔 수 없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검은 슈트를 입은 연주자의 외모에 시선이 간다.


둘째 날 공연은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 때문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극장에 가려는데, 갑자기 다리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라? 밥을 먹고 있는데 마치 당이 떨어진 것처럼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거다. 놀라서 검색을 해보니 어쩌면 저혈당에 의한 당뇨병일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전날부터 먹기 시작한 당근라페다. 양념 팍팍 무쳐서 신나게 먹었는데, 전날부터 배가 싸르르 아프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오후 내내 화장실을 꽤나 들락날락했었던 것이다. 오스씨 말로는 장을 너무 비워내면 다리 힘이 풀릴 수도 있다는데, 밥 먹고 있는데 다리 힘이 빠진다고? 아무튼 다리 힘이 없으니 운전은 할 수 없어서 결국 눈물을 머금고 공연을 포기했다.


걱정이 되었는지 밤새 악몽을 꾸다가 일어난 아침, 배는 불편한데 몸은 나은 것 같았다. 잔뜩 억울한 마음에 유튜브를 켜서 노르웨이챔버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멘델스존 현악 8중주'를 관람했다. 아, 너무 좋아. 노래도 노래지만 8명이나 되는 연주자들이 서로 눈을 맞춰가며 음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너무 좋다. 어제 그걸 느껴보고 싶었는데... 다음에 다시 들을 기회가 있으면 주저 없이 예약하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원래 프로그램은 이것.


브람스 현악 6중주 제1번 b장조(Brahms, String Sextet No. 1 in B-Flat Major, Op. 18), 

멘델스존 현악 8중주 E장조(Mendelssohn, Octet in E-Flat Major, Op. 20, MWV R 20)


연광철, 선우예권 듀오 콘서트


부산에서 열리는 선우예권의 단독 공연은 가급적 빠지지 않고 보려는 편인데, 이번엔 조금 망설였다. 독일어를 전공한 주제에, 사실 독일 가곡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KPOP 아이돌의 독한 음악에 익숙해진 귀를 만족시키는 성악곡이라면 역시 오페라 작가들이 빗어낸 절규에 가까운 소프라노/테너 곡 정도랄까? 독일 가곡은 너무 싱겁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밀리의 서재' 구독자가 되고, 잠들고 싶을 때 듣기 위한 오디오북으로 김기홍이 쓴 <다정한 클래식>을 선택한 후, 나를 가장 잘 재워준 챕터가 바로 슈만의 '시인의 사랑' 부분이었다. 그냥 가사만 읽어주는데도 좋은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연이어 소개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까지 듣고 나니 독일 가곡에 관심이 생겼다.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니 마침 카우프만이 부르는 버전이 있었다. 친절하게 한글 가사까지 붙어있어서 곧바로 플레이를 했다. 아, 좋다. 말해 뭐 해. 카우프만의 스타성과는 별개로 그의 목소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독일어 특유의 거친 발음을 최대한 '남성적으로' 살리면서도 사랑에 빠진 순수한 남자를 보여주기엔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때론 성급하면서 또 때론 곱디곱게 목소리를 조각하는 노련한 스타의 단짠단짠 표현력도 좋았다. 그냥 독일인이 말아주는 독일 가곡이라 다 좋게 느껴졌는지도. 

연이어 한국인 가수가 부르는 버전을 들었는데, 뭐랄까, 무식한 나만의 표현을 해보자면, 시작음은 분명 독일어인데 끝음 처리? 같은 게 독일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발음을 처리한다. 독일어는 마지막에 확 긁어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아쉬움이 있었는데, 연광철 가수는 독일에서 수십 년을 공연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건 진짜 안 보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공연을 며칠 앞두고 예약했다.


공연 프로그램은 1부는 시인의 사랑, 2부는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 그리고 세 개의 독일가곡.      


1부

Schumann, Dichterlibe, Op.48, 시인의 사랑, 시 : 하인리히 하이네

I - Im wunderschönen Monat Mai, 기적처럼 아름다운 오월에 *

II - Aus meinen Tränen sprießen, 내 눈물에서 움터 오르리

III - Die Rose, die Lilie, die Taube, die Sonne, 장미, 백합, 비둘기, 태양

IV - Wenn ich in deine Augen seh', 그대의 눈을 바라볼 때면 *

V - Ich will meine Seele tauchen, 내 영혼을 담그고 싶어 *

VI - Im Rhein, im heiligen Strome, 라인, 그 거룩한 물결 속에

VII - Ich grolle nicht, 원망은 않으리 *

VIII - Und wüßten's die Blumen, die kleinen, 작은 꽃들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IX - Das ist ein Flöten und Geigen, 그건 피리 소리, 깽깽이 소리

X - Hör' ich das Liedchen klingen, 언젠가 그 노랫소리 들려올 때면 *

XI - Ein Jüngling liebt ein Mädchen, 한 청년이 한 처녀를 사랑했네

XII - Am leuchtenden Sommermorgen, 햇빛 반짝이는 여름 아침에 *

XIII - Ich hab' im Traum geweinet, 나는 꿈속에서 울었어요

XIV - Allnächtlich im Traume seh' ich dich, 매일 밤 꿈속에 그대가 나와

XV - Aus alten Märchen winkt es, 옛날 동화에서 손짓을 보낸다

XVI - Die alten, bösen Lieder, 낡아 빠진 몹쓸 노래들


2부

Schumann, Davidbündlertänze Op.6, 다비드 동맹 무곡 

Schumann, Schöne Wiege meiner Leiden, 내 고뇌의 아름다운 요람, 시 : 하인리히 하이네

Schumann, Meine Rose, Op. 90-2, 나의 장미, 시 : 리콜라우스 레나우

R.Schumann, F.Liszt, Widmung 헌정 시 :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베이스로 부르는 사랑 노래는 첫 소절부터 충격이었다. 걸쭉하고 찐한 남자의 사랑!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서 장조는 더욱 '순수하게' 기뻐 보였고, 단조는 '무서우리만큼' 처절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베이스/바리톤 가수를 접한 적이 거의 없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발음은... 후후, 정말 좋았다. 긴장하면서 들었는데, _st, _sch들이 마치 불어처럼 부드럽게 굴러다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유튜브로 시인의 사랑 테너 버전을 연달아 듣고 있는데, 어제 들은 연광철 가수의 목소리가 인장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유일한 안타까운 점은 나의 최애 픽인 7번째 곡 '원망은 않으리'의 고음 부분을 낮게 처리한 것이다. 베이스의 절규를 듣고 싶었는데...(시인의 사랑 리스트 끝에 * 표시는 내 픽!)


2부에서 연주된 '다비드 동맹 무곡'은, 18개의 곡마다 어떻게 어떻게 연주하라는 지시사항이 붙어있었다. 생기 있게 쳐라, 정성을 기울여서 쳐라, 빠르지 않고 깊은 표현력으로 쳐라 등등. 단순한 빠르기 표기가 아니라 감정을 넣어서 치라는 메시지와 그것을 실연해 보이는 선우예권의 표현력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를테면 '소박하게'를 연주할 때면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표정도 담담한데 반해, '깊은 표현력으로'를 연주할 땐 눈을 감거나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고개를 천장으로 살짝 든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선우예권은 (내 눈엔) 귀엽게 생겼기 때문에(얼평 죄송) 정색한 표정으로 연주할 때는 뭔가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여 멋있다. 이번에도 아주 멋진 연주였다. 이렇게 한 번도 실망 안 시키기도 어려운데 말이지. 

다음 단독 공연도 무조건 예약이다!  


PS : 질러버렸다. 사인 버전이 딱 한 개 남았다는 말에 넘어가서... 아까부터 계속 듣고 있는데, 역시 좋다, 좋아! 한국 가곡이 이렇게 좋았다니, 클래식은 참으로 넓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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