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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Nov 18. 2024

게이 로맨스와 김용 무협지의 끔찍한 혼종

이십 년도 전에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일군의 게이들이 미팅을 목적으로 벚꽃 구경을 간다. 그곳에서 네 명의 남자가 얽히고설키는데, 결국 다툼이 일어나고, 화해를 하고, 꼬였던 관계가 풀려서 모두가 행복해진다. 아주 전형적인 게이 로맨스 스토리다.

그때 그 소설을 읽은 친구가 한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너 진짜 로맨스, 드럽게 못 쓴다. 이게 로맨스 소설이냐?"

"뭐래. 이거 진짜 가슴 아픈 로맨스거든? 첫사랑을 잊지 못해 끝없이 가슴앓이하는 주인공의 애절함이 느껴지지 않아?"

친구는 핏, 비웃었고, 어쨌거나 소설은 세상에 나왔고, 곧 완전히 잊혔다.

얼마 전 아직도 전자책으로 서비스되는 이 책의 표지를 교체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내 입에서도 핏, 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아, 이때의 나. 도대체 머릿속에 무얼 담고 살았던 걸까.

이딴 걸 게이 로맨스라고 썼다니. 난 정말 로맨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니, 적어도 로맨스를 묘사할 능력은 쥐뿔도 없었구나, 한숨이 푹푹 나왔다.

당시에도 난 여전히 김용의 무협지에 완전히 푹 빠져있었던 듯하다. 사조영웅전-신조협려-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영향이 소설 곳곳에 그을음처럼 새까맣게 묻어있었다. 

당장 서비스 중단을 하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글이지만, 생각해 보면 또 굉장하기도 하다. 게이로맨스와 김용의 혼종이라니, 그 끔찍함은 둘째 치고, 시도 자체로는 아주 흥미롭다. 결과는 뭐 세월이 이미 증명해 버렸으니, 이제는 즐거운 놀림거리로 사용해도 될 듯해, 이곳에 소개해 보도록 한다.


여전히 내 보물들

아래에 딸려 오는 소설 내용의 앞부분을 간단히 소개하면,

현진은 인영에게 첫눈에 반해 계속 대시를 하는데, 인영은 학준에게 이미 마음이 기울었다. 현진의 전애인인 동식은 현진과 재결합을 원하는데, 인영이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아챈다. 인영이 일행과 떨어져 화장실에 가자 따라 들어가 다짜고짜 폭행하고, 인영이 맞는 걸 본 현진은 구타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일단 폭력남(동식)을 발로 차 날려버린다.


얽히고설킨 욕망이 절정에 달해 폭력까지 동원된 소설 속 가장 긴장감 넘치는 장면인데, 나란 녀석이 그런 로맨스 최대 갈등 상황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바로 읽어보자.


나중에 그들 사이에서 <화장실의 난투극>으로 불릴 그 사건의 진행을 만약 국산 액션 영화 마니아가 봤다면, 그는 이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세상에 구경거리도 그런 구경거리가 없지. 이건 프랑소와 오종의 영화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라고. 세 남자의 엇갈린 사랑이 엮어낸 참극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어. 헤어진 애인이 현재 좋아하고 있는 남자를 두들겨 패고 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두 사람을 뜯어말린다? 오, 그러면 참극이라고 할 수 없잖아? 득달같이 달려가 헤어진 애인을 죽사발 만들어 놓는다? 오케이! 그것이 정답이야. 그래야지, 당연히! 헤어졌다면 미련 없다는 말 아니겠어? 새로운 사랑이 소중하지. 옛 애인의 질투 같은 건 미리미리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자, 어려울 것 없어. 질투에 미쳐 화장실 문이 박살 난 줄도 모르고 계속 발길질에 정신 팔린 동식에게 다가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거야. 정강이라는 곳이 원래 살짝만 쳐도 팔짝 뛸 만큼 아픈 곳이거든. 국산 폭력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은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다고. 변기에 머리를 박아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지.

하지만 악당은 쉽게 꼬꾸라지지 않아. 스티븐 시걸이 나오는 삼류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나 한 방 치면 악당이 나가떨어지는 거지. 악당이 왜 악당이겠어? 악으로 깡으로 뭉쳐진 놈이라서 악당인 거야. 그런 놈은 한 대 때려서는 절대로 뻗지 않아. 동식은 다시 몸을 일으켜서 주먹을 날리려고 할 거야. 그러니 조금도 주저하면 안 돼. 이번엔 발끝에 날을 세워서 복부 깊숙이 가격해 버려! 그러면 인간의 뉴런 체계는 자동으로 충격완화 모드로 돌변하면서 허리를 숙여버리지. 그때를 놓치지 말고 공격 부위를 발끝에서 발바닥 전체로 바꾸는 거야. 발바닥 전체로 골고루 힘을 분산해 확 밀어버리는 거지. 그러면 붕 날라 가게 되어 있거든.

화장실같이 좁은 곳에선 창문 쪽으로 날려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야. 유리창이 깨지면서 커다란 대미지를 입힐 수 있으니까.”


만약 무협소설 마니아가 봤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학준 같은.

무협의 세계란 단순하기 짝이 없으므로 악당과 우리 편이 확연하게 갈라진다. 학준은 동식을 싫어했으니, 악당 역에 동식을 캐스팅한다고 새삼 동정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다른 편은 그의 의형제들이지 않은가. 그에게 화장실대전(化粧室大戰)은 선악의 구별이 뚜렷한 한판 멋진 무공대결이었다.

학준이 봤다는 가정 하에, 그 사건을 묘사해 보자.

“좁은 공간에서의 싸움이라면 내공고수보다는 외공고수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죠. 양손을 마주하고 내공대결을 벌이지 않는 한 말이에요. 검법이나 장법도 불필요합니다. 자,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순수한 상형초식들밖에 없습니다. 이를 두고 시정잡배들의 무공이라고 깔볼 필요는 없습니다. 무림고수들도 좁은 공간에서의 격투에선 종종 이런 상형초식들을 사용하곤 했었으니까요.

이를테면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장무기의 의백인 금모사왕(金毛獅王) 사손과 그의 사부 성곤의 소림사 싸움에서, 두 사람은 좁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죠. 들판에서야 각각의 절기인 장홍경천(長虹經天)과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맘껏 운용할 수 있겠지만, 사방 1장 넓이의 지하 감옥에서는 소금나수법을 기본으로 사용하면서 쌍용창주(雙龍滄珠)로 공격하면 칠상권(七傷拳)으로 방어하는 방식으로밖에 싸울 수가 없는 법이죠.

현진이형은 발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권각은 권법에 비해 파괴력은 클지 모르지만, 행동이 둔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특히 좁은 공간에서는 권법의 파괴력이 배가 되겠죠. 현진이형은 실수를 한 거죠.

현진이형은 먼저 독벽화산(獨劈華山)의 수법으로 동식이형의 하체를 무너뜨린 후, 옥녀천침(玉女穿針)의 자세로 그의 명치를 공격하더군요. 동식이형은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뒤로 물러났지만, 뒤엔 창문이 있어서 결국 유리창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럴 땐 맹호신요(猛虎伸腰)의 자세를 응용한 금나수로 명치로 다가오는 현진이형의 권 또는 각을 잡아 균형을 무너뜨렸어야 해요.”

그러나 학준이 모든 과정을 다 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싸움에 직접 참여했다면, 그는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대걸레 자루, 물통 등을 가리지 않고 집어 들어 마구잡이로 동식을 가격했을 것이다.


하. 하. 하. 하.

사랑과 비애의 향기는커녕 '애틋'의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 작가란 녀석은 그저 주인공들 싸움 붙이고 저 혼자 흥분한 채로 북 치고 꽹과리 두드리며 신이 났다. 다시 봐도 어이가 없네.

밀레니엄 시절에는 이런 게이 로맨스 소설도 있었다는 도시 괴담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어서 빨리 글을 끝내야겠다.

아... 부끄럽다.

그런데, 또 재미있어.

하. 하. 하. 하 


* 퀴어작품을 소개합니다 카테고리에 올리는 글이지만, 작품명은 소개하지 않기로 합니다. 이 글도 빨리 잊어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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