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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Mar 30. 2024

1. 별명이 긴 팔 원숭이였어

연작소설, 정연우 편

오랜만에….소설입니다. 작년 홍예당 소설쓰기 모임에서 지었던 이야기로, 연작소설처럼 쓰려고 합니다. 그 중 첫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퀴어하게


1. 정연우



문동필의 삶을 바꿔놓은 메시지의 알림음은 여느 때와 똑같았다.

발신자는 건하였다.


「訃告: 정연우, 허왕호, 이주인 등으로 불렸던 고(故) 박민규 씨께서 3일 오전, 향년 52세로 별세하셨습니다.

고인의 사정상, 상주는 함께 살던 연인이고, xx일부터 일주일간 추모제를 합니다.」


추모제 장소는 부산 광안리였다.


“친구 추모하는 일도 허락이 필요해요?”


지광의 말투는 질문이라기보단 타박에 가까웠다.


“해공이가 싫어하니까. 너도 인수형이 하지 말라는 거는 안 하잖아.”


“내가 어디 가고 말고는 내가 정해요. 그건 자존심의 문제라고요.”


지광의 말이 바늘처럼 콕 찔렀다. 경험상 악의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따끔했다.


“서로 하고 싶은 것만 주장하면 같이 살기 힘들지.”


인수와 지광은 연인이지만 따로 산다. 그래서 적당한 타협이 요구되는 동거 커플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광은 최근 들어 해공에게 무엇이라도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기억을 다 뒤져봐도 없었다. 사실 사귄 이래로 한 번도 없었다. 해공은 동필이 No! 라고 할만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광은 동필의 표정을 살피더니 쯧쯧, 혀를 찼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번에도 온갖 이유를 만들어서 가지 말라고 했겠지. 맞죠?”


족집게다. 사실 어제도 그랬다. 추모제에 가겠다고 하자 팔짱부터 꼈다. 수십 년간 연락 한번 없었다면 사실상 남인데, 굳이 부산까지 찾아갈 이유라면... “전애인?”으로 심문의 포문을 열었다. 아니다! 그냥 옛날 친구들이 보고 싶다 하니 누가 누가 오나 따져 물었다.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그러자, “혹시 전애인이 올까봐?”로 이어졌다. 결국, 답답해서 부산 바람이나 쐬려 한다로 넘겼지만, 왜 답답하냐, 나랑 사는 게 지겹냐, 밑도 끝도 없는 추궁으로 번졌다. 해공은 납득하지 못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동필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해공은 출근하자마자 <정스튜디오> 직원들에게, 그래 봐야 동필, 인수, 지광 달랑 세 명이지만, ‘내 친구 이야긴데...’로 시작해, 장례식이나 동창회처럼 감정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모임에서 얼마나 많은 불륜이 싹트는지 열변을 토했다. 그 ‘친구’가 동필인지 모르는 지광은, ‘막연히 지인이 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지방에 있는 추도식에 간다? 이건 100%!’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공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동필의 옆구리를 콕 찌르자 지광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광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 했지만, 해공과 인수는 신장개업한 카페의 광고 촬영을 위해 서둘러 지방 출장을 가야 했고, 하필 1박 2일 일정이다 보니 해공은 동필에게 다시 한번 단단히 일렀다.


“이건 사장으로서 명령이야, 부산은 안 돼!”


<정스튜디오>는 인수와 지광, 해공과 동필, 두 게이 커플로 구성된 영상 편집 제작 회사다. 각기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던 해공과 인수가 어쩌다 서로의 정체성을 알게 된 후 의기투합했다. 편집 직원을 뽑았는데, 얄궂게도 게이였고, 첫 월급을 주기도 전에 인수와 눈이 맞았다. 동필의 합류는 지광 덕이었다.


해공과 살림을 합치고 일 년가량 지났을 즈음, 불안불안 하던 동필의 음식점이 마침내 문을 닫았다. 수익은 적어도 단골이 많아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는데, 동네가 뜨면서 갑자기 치솟은 임대료가 직격탄 역할을 했다. 코로나까지 겹치며 다시 개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광이 요리 관련 유튜브를 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이름하여 <럭셔리 디쉬라이프>. 된장찌개, 돼지 불고기, 오이소박이 같은 투박한 비주얼의 음식을 극도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플레이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콘텐츠였다. 그렇게 동필은 촬영이 있는 날에만 출근하는 파트타임 직원이 되었다.
 한참 동안 해공을 성토하던 지광은 잠시 숨을 고르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진짜 옛날 애인 아닌 거죠?”


어제부터 하도 시달린 탓에 이 문제만큼은 입만 열면 정답이 튀어나올 정도로 단련된 상태였다. 그런데 질문자가 지광으로 바뀌자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애인은 아니고, 애인이면 좋겠었던 사람. 너무 애인이 되고 싶어서 몸살을 앓던 사람이었어.”


동필의 눈시울이 새빨개졌다.

어떤 기억은 이십 년이 지나도 아프다. 동필에게는 그 시절이 그랬다. 세월의 약을 덧발라 충분히 아문 줄 알았는데, 들춰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곪은 상태 그대로였다.


지광이 동필의 머리를 끌어당기더니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해공이었다면 두꺼운 가슴에 폭 안겼을 텐데, 안타깝게도 어깨에 이마를 기대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의 손은 동필의 허리를 감싸 안을 만큼 길었고, 그 품은 자못 포근했다.


“고마워. 이제 됐어. 그런데, 너 팔 정말 길다. 나 배 나와서 한 손으로 안기 쉽지 않은데.”


“그게 뭐야, 뭐 그런 거로 감동해요, 사람 섭섭하게.”


순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연우 형의 팔이 진짜 길었어. 웬만큼 덩치 있는 사람도 통째로 껴안을 수 있을 만큼 팔이 길어서 별명이 긴팔원숭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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