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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Apr 04. 2024

6. 그래도 사랑하면 안 돼

연작소설, 정연우 편

동필은 구정에 있었던 일만 쏙 빼고, 동연투 이야기를 이어갔다.

겨우내 진행됐던 총파업이 끝나고 맞이한 봄, 유명 대학 강의실을 빌려 동연투 활동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또한 국내 최초여서 토론회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사회적 분위기가 민주주의적으로 격양되어 있던 터라 대체로 잘했네! 환영하네! 분위기였지만, 저 사악한 악을 기도로 물리치자는 대학 기독교 동아리들의 반응도 만만찮았다. 저들은 동성애자 인권운동 초창기부터 질긴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동성애자 내부에서도 운동의 성과를 폄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 운동과의 결합이 특정 정파색을 띠면서 동성애 운동의 순수성을 해쳤다고 억지를 부렸다.


친목파와 인권파의 갈등에 더해, 인권파 내에서도 ‘이성애자가 누리는 권리를 똑같이 얻어내자’는 진영과 ‘이성애적 가치 체계를 전복하자’는 진영의 노선 차이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더 급진적인 사회적 연대를 꿈꾸는 투사들까지 덤벼들어 논쟁이 격렬해졌다. 다양한 의견 개진은 환영할만하지만, 공개적인 논쟁의 장이 처음인 사람들도 많아서 비판과 비난의 구분이 모호했다. 곳곳에서 감정싸움의 피해가 속출했다. 모임의 앞날을 위해 선명한 노선을 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모두가 실질적으로 모임을 이끌었던 정연우의 입을 바라보았다.

정연우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토론회장을 나갔는데, 그게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좌중의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네. 그대로 사라졌어요. 삐삐번호도 바꾸고.”


황당하다, 미친놈이다, 찢었다 등등의 반응이 난무하다 누군가 한마디 했다.


“그런데, 정연우답다.”


그들과 이미 하루를 같이 보내서 더 많은 사정을 알고 있던 민호형이 덧붙였다.


“여차하면 토끼는 거, 아주 일관성 있는 놈이었네.”


뿌까형, 종이형, 원장형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단체에서 활동하다가도 툭하면 잠수를 타곤 했었지. 연락은 당연히 안 되고. 그만두었나 포기할 때쯤이면 또 나타나.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없었어.”


“술 좀 먹여서 꼬치꼬치 캐물어 보지 그랬어요.”


 “그냥 이 바닥에 사연 없는 년들 없으니까 무언가 있구나! 짐작만 하고 말았지. 그래도 걔만큼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도 없어서 다들 좋게좋게 생각한 거야. 인권단체에 일할 사람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꼬막 너는 어땠어? 그 이후로 무슨 소식 들은 거 없어?”


동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진짜 이상하다. 난 너랑 연우가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맨날 딱 붙어 다녔잖아. 사라질 때도 같이 사라졌고. 너, 정말 연우랑 안 사귀었니?”


“사귄 사람은 상주에게 귀띔하라고 했는데...”


정연우에게 자신이 가당키나 하겠냐며 동필의 도리질이 커졌다. 여기 가당찮은 사람 하나도 없다고 누가 말하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고, 사람들의 관심은 곧 정연우가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로 향했다.

지광이 동필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밖을 가리켰다.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신호였다.


“술안주를 좀 바꿔야 할 거 같아요.”


동필은 지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심이 분명한데도 별이 보일 정도로 빛이 없었다. 건물을 폐쇄하면서 주변 가로등까지 모두 치워버린 건 아닐 텐데, 사람이 사라지면 빛도 사라지는 게 도시의 법칙인지도 몰랐다.

지광은 지도 검색으로 제법 규모가 있는 슈퍼마켓을 찾아냈다.


“그렇게 사라지고 끝이란 게 기가 막히네요. 기대한 대로 대단한 사람이었어. 긴팔원숭이에 이어 별명 하나 추가. 단. 호. 박!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물론 있었지.”


동필은 구정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첫 잠자리에서 하는 말이 사랑하지 말라니, 그건 좀 슬픈데?”


지광은 더 나쁜 의미의 별명을 짓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동필에게는 일회용 섹스라도 상관없었다. 동필이 게이 세계를 접한 이래로 경험한 모든 섹스가 그랬으니까. 감히 그의 사랑을 탐낼 만큼의 뻔뻔함도 없었다. ‘잘 안 팔리는 게이’라는 딱지가 붙은 동필에게 주제 파악은 거의 생존 필수템에 가까웠다. 그저 취기를 빌려 그의 품에 안겨보고 싶었다. 그토록 옆에서 맴돌았으니 바보라도 동필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동안의 여정에 대한 대가, 심지어 동정으로라도 안아주어서 고마웠다.


노련한 섹스머신처럼 그를 만족시켜주고 싶었는데, 문제는 동필이 너무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가 키스하자마자 동필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동필도 이유를 몰랐다. 당황한 정연우는 허둥대며 동필을 달래다가 곧 뜬금없다며 낄낄거렸다. 그럴수록 동필은 아기처럼 잉잉거리며 정연우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 긴 팔이 몸통을 조여오는 느낌이 좋아 또 울었다. 막힌 둑이 터지듯 밀고 들어오는 감정에 동필은 속수무책이었다. 아릿한데 흡족한 슬픔이라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어리둥절한 상황에서도, 정연우는 동필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괜찮다, 괜찮다, 속삭이며 머리와 등, 그의 긴 팔이 닿는 모든 부위를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사랑하면 안 돼.”


정연우는 주문처럼 되뇄다.


“내가 나쁜 놈이라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동필은 싫다고 칭얼대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순간만큼은 하늘의 별을 따오라 해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에 빠지면 알아서 ‘을’이 되는 습성은 이때부터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동필은 마치 남자와의 섹스가 처음인 것처럼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울고 웃었다. 키스와 애무만으로 절정에 올랐고, 그날의 모든 장면은 동필의 기억 어딘가에 인장처럼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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