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이후의 첫 비

핵전쟁 이후의 종말

by 민호

핵겨울로 뒤덮인 지 어언 수십 년째.


대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라붙었고, 마치 살아있던 모든 것이 함께 지워진 듯했다.

핵전쟁 이후 대기 속에 쌓인 재 때문에 공기는 언제나 차갑고 퍽퍽했으며, 과거의 따뜻했던 공기는 다시는 느껴볼 수 없었다.
공기 위로는 한 줌 남짓한 먼지만이 떠다니며 춤을 추고 있었고, 하늘은 늘 먼지에 뒤덮여 똑같은 회색빛을 뿜어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빛바랜 낙엽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바스러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집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겹겹이 쌓인 콘크리트 잔해들과 회색 먼지로 막힌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잔해들 사이에서는 어쩐지 작은 불씨 하나가 살아남아 흔들리고 있었고,
밖에서는 바람이 도시의 폐허를 헤집으며 쉬익 쉬익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다, 등 뒤 어딘가에서 고요를 찢는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명확한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처음엔 그저 참혹한 현실을 잊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가 계속되자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고, 소리가 나는 쪽을 몇 초 동안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삼 초가 지나자, 내 눈앞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래서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던 그 물 한 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저 평범한 물방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두 방울, 세 방울… 계속해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빗방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빗방울이 톡, 톡 떨어지며 천장을 치는 소리는 어느 순간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름다운 리듬처럼 들려왔다.


“비…라고? 이게… 비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잔인했던 핵전쟁 이후로, 종말처럼 굳어버린 이 잿빛 세계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비.
잃어버린 언어처럼 존재를 잊어버렸던 그 빗방울이, 지금 내 창밖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자, 떨어지던 빗방울 하나가 손바닥 위에 조용히 앉았다.

차갑고 촉촉한 감촉이 스며들자, 그동안 바라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 한 방울을 먹지 못해 썩어버린 나무들,
수십 년간 마음속에 파묻어 두었던 기억들,
모두가 한 번에 피어오르듯 스쳐 지나갔다.


수십 년을 잊고 살았지만, 이 빗방울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이 마치 전신을 꿰뚫는 한 줄기 증명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기적이라 외치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또 다른 사람은 빗방울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귓가를 찢는 인공적인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삐——.


비상경보였다.
수십 년 만의 비를 국가가 감지하고 내보낸 경고음.
얼마나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경고음을 듣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 비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화살처럼 머릿속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저 창밖의 비가 어떤 의미인지,
잿빛 세상 속에서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이 물이 어떤 운명을 불러올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한 갈림길 앞에 조용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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