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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Dec 12. 2023

조금 '모자‘라지만 괜찮은

이주란, 『수면 아래』(문학동네, 2022)


소설은 '해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해인은 서울 근교(로 추정되는) 지역, 젊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동네의 중고물품 가게 '해동중고'에서 일한다. 초중고를 같이 다닌 우경과 해인은 서로의 집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해인의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밤 산책을 하고, 어디 멀리 다녀온 날에는 서로 마중을 나오는 다정한 연인 사이다. 해인의 주변에는 해동중고의 단골인 장미와, 어느 모임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은 유진씨, 초등학교 동창이자 우경과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한 성규가 있다. 또, 해동중고의 사장님과, 알바생, 가게 옆 공터에 자주 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환희, 엄마와 친해 이모라고 부르는 이웃도 있다. 이러한 인물들과 해인의 만남과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가운데 훌쩍 일 년이 지난다.  아직 눈이 내리는 3월에 시작해 그해 연말에 끝이 나는 소설. 그 안엔 별다른 사건이랄 것도 없다. 길지 않은 대화도, 평화롭게 흘러간다.


“우경이 더없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천천히 떠오르곤 한다.

우리는 누구도 그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적이 없다.”(51)


하지만 이 소설은 커다란 사건을 수면 아래 깔고 있다. 해인과 우경은 “베트남에서 그애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와 모든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60) 한 번 이별을 했었다. 하지만 우연히 둘이 자주 갔던 미용실에서 만난 후 다시 가까이에서 서로 챙기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 소설 안에서는 알 수 없다. 독자로서는 자식을 잃었나보다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잃었다는 ‘그애’가 어린 아이인지, 유산을 한 것일지, 어쩌면 정말 오랜 시간 함께했던 반려동물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을지, 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그애를 잃은 그때, 우경의 반응은 해인에게 상처를 남긴 듯하다. 우경이 좋다고 느낄 때마다 왜인지 그날의 우경이 떠오른다. 우경이 실수를 한 걸까, 그것도 모르겠다. 해인은 한국으로 돌아와 일상을 잃을 만큼 크게 아팠다. 그는 그저 이전과 무관한 일을 찾아 중고물품 가게도 흘러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해동중고라는 장소는 도무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 그에게 버려진 물건을 깨끗히 닦아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는 회복의 의미를 넌지시 심어주었는지도.  

이제 둘은 다시 만나 손을 잡고 걷는다. 그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은 채. “저절로 되는 것은 없지만 억지도 되는 것도 없더라고요.” 유진씨의 말이다. 아마 해인은 이 말과 모양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여러가지 문장을 그동안 숱하게 생각하며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과 아직 남아 있는 것들 사이에서 일상을 찾아갔겠지.

이렇듯 잔잔한 일상은 우경의 한 마디 말에 파문이 인다. 일 때문에 베트남에 가게 됐고, 같이 가자는 말. 어쩌면 다시 꺼낸 구애의 말일 텐데, 해인은 우경의 제안을 거절한다. 성규가 춘천에 대해 “갈 수 있는데 안 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처럼, 해인은 베트남에 갈 수가 없다. 이 말을 통해 아직 그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멀쩡히 일을 하다가도 무너져 우는 날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인은 이전과 같지 않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변해 있었다(176)”는 것을 안다. 이제는 “남들처럼 텔레비전에서 본 방법을 메모해두었다가 장을 보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다는 주스를 만들어 먹고, 누군가와 복숭아를 따러 가자는 약속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83)음을 느낀다. 해인은 이런 일상을 조용히 돌아보며 “혼자서는 어려웠겠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83)” 베트남에 다시 갈 만큼은 아니지만 엄마, 유진, 성규, 장미, 환희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고 웃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만큼, 조금 ‘모자’라지만 ‘소중’한, 괜찮은 일상을 산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가까운 사람의 슬픔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나는 이 아픔이 얼마나 클지 가늠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술잔을 앞에 두고 잠자코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을 때도 나에겐 막막한 일인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 사람의 눈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운 날에는 누군가를 생각하겠구나, 마음이 아프겠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손이며 등으로 작은 온기를 나누고자 했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서로 더욱 구체적으로 공감할 수 있겠지만, 어떤 슬픔을 안고 있겠거니, 그 감정의 물결이 한동안 잠잠했다가 가끔은 속절없이 세지기도 하겠거니, 내가 보지 않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툭 하고 떨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조금 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내 머릿속에서 모두 순한 눈을 가졌다.


“나는 우리가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안다고 생각될 때,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두려웠는데 모르겠다고 말하면 두려움이 조금 옅어지곤 했던 것 같아.

그런 채로 살아왔고 이런 채로 살 것 같아.

무언가를 단언하는 게 너무나도 두렵지만.”(195)


우경이 해인에게 보낸 (이 소설에서의) 마지막 메일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나 역시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왔”다(이 글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이 등장인물이 나처럼 눌변이라, 그리고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아서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 역시 소설로서 좋은 것인지, 탁월한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들의 담백한 미련을, 모자람을, 말줄임표를, 싱겁게 가서 싱겁게 오는 여행을,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는 메일을 오래 생각했고,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는 찰랑찰랑 감정이 일었다. 한 번 더 수저를 쥐어주고 싶고, 찻잔을 기울이고 싶고, 문자 한 통 더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도 그들만의 감정의 흔들림을 겪고 있겠지. 때로는 외롭겠지, 하고.

혼자서는 일상이 성립되지 않는데, 우리는 홀로 너무 오롯이 충만하려고 분투해온 것은 아닐까? 이 기회를 놓쳐도 괜찮아요, 자기 걱정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아요, 이별을 했어도 결국엔 괜찮아요, 라고 담담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이 책의 사람들처럼 고요한 눈과 귀와 입을 가진 이들에게, 내게 모두 말해주지 않아도 좋지만 그래도 내가 언제든 들어줄 수 있다는 작은 사인을 보내고 싶다. 그저 괜찮다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싶다.


(작성일: 202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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