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평화 Feb 20. 2024

아름다운 황혼

2. 현실보다 미래를 보았다


 욕이라는 것은 분노의 감정이 고조되어 생각 없이 저절로 내 안의 것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그것도 못하는 것이다. 나는 결혼 전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면서 남성을 이해 잘하는 도인으로 성장했던 거였다. 남성은 어느 때는 이성이 사라지고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이 바가지를 긁는 성격이 아니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른 남편들은 할 짓 못할 짓 다하고 마누라한테는 쉬쉬 숨기기만 하지. 나는 당신한테 숨기는 것 전혀 없어.”

 ‘야, 이놈아 나도 여자야.’ 

 욱하고 뭔가가 올라왔지만 그러한 일에 화를 내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상황을 잘 수습하고 서로 상생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남편으로는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고, 상대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유도하는 고매한 인격이어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걱정되어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미스 노한테 내가 이렇게 말했어. 우리 마누라는 마음이 넓고 이해심도 많다고. 일단 우리 마누라하고 상의해 볼게. 나는 마누라가 하는 대로 하는 거라고.”

 내가 참으면서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보자, 남편은 늦었다며 서둘렀다.

 “여보, 정말 미안해. 생각 좀 해봐. 퇴근하고 오면 할 말이 많아.”

 “뭘 생각해?” 

 나는 큰 소리로 시원하게 쏘아붙였다. 남편 출근 후 생각해 보니 이 사건은 남편한테 사기당한 거였다. 적당히 빠져나가려고 밤에 이야기하지 않고 아침 바쁜 가운데 하는 것이 나름 타이밍도 잘 맞추었다. 바람피운 못된 남편은 얼렁뚱땅 주민등록이라는 숙제를 일사천리로 나한테 안기고 빠져나간 것이다. 

 남편이 퇴근하면 두 번 다시 바람 안 피운다는 각서를 받고, 당당히 그의 사죄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민등록에 관하여는 우선 그녀의 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다. 남편의 품행을 떠나서, 나의 분노를 넘어서, 도덕과 유교정신을 뛰어넘어서, 오로지 미스 노의 딸 앞날만을 위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머릿속을 정리하고 장·단점을 따져보았다.  

 

     주민등록 No (안 해주면)                      

 1) 나의 주민등록은 깨끗하다.                   

 2) 안 해주어도 걱정이 될 것이다.               

 3) 부모의 잘못으로 학교에 못 갈 수도 있다.     

 4) 불평등과 부조리한 사회 속으로 소용돌이친다.     

 5) 과거, 권위, 유교사상에 잡힌 꼴이다.          

 6) 한 생명을 망치게 할 수도 있다.              

 7) 딸에게 비관 좌절 분노가 생길 수 있다.       

 8) 바람 부는 대로 살면 나는 없고 허무해진다.   

 9) 타인의 목소리에 중점을 둔다. 나는 껍데기가 된다.                


     주민등록 Yes (해 주면)

 1) 같은 해에 딸이 둘 태어난다. 

 2) 딸에 도움을 주어 내 마음이 뿌듯할 것이다.

 3) 딸의 잘못은 아니니 학교에는 가야 한다.

 4) 인권 존엄과 교육 평등을 이룬다.

 5) 교육은 어떤 이념보다 중요하다.

 6) 한 생명을 살리고 빛을 줄 수 있다.

 7) 남과 같은 자유 교육의 기쁜 맛을 볼 것이다. 

 8) 내 안의 선이 행복과 기쁨을 준다. 

 9) 내 목소리,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위와 같이 적어보았다. 머릿속이 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운 황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