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적과의 동침
음악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고창에 도착했다. 고창역 안내센터에 들러 고창 안내 설명과 팸플릿을 받았다. 고창은 2013년 고창군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이라 하였다. 산, 강, 바다, 습지, 갯벌, 해수욕장 등 사람을 매혹시키는 자연조건을 모두 가진 곳이었다. 오늘 오후는 ‘선사 속의 고인돌 여행’으로 가기로 했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에 도착해서 먼저 고인돌박물관에 들어갔다. 전시관 외부의 넓은 야외공간은 고창 청동기인의 생활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주제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미스 노와 나는 잠시 선사시대의 사람이 되어 그들의 모양과 언어로 말을 하였다. 물론 소리는 입에서 뜻 없이 하였고 서로 만나 반가웠다고 흉내로 주고받았다. 미스 노는 누구한테 자신의 억울함을 선사시대의 방식으로 몸짓을 하며 토하고 있었다. 물론 미스 노 자신의 이야기를 선사시대의 언어로 하니까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다만 추측할 뿐이었다.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다. 미스 노는 세상에 살면서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고 억울하여 분노하며 살았다고 표현하였다. 미스 노가 괴로운 삶을 표현하느라 손으로 가슴을 치고 얼굴도 찌푸렸다. 열중하다 보니 나중에는 눈물을 비쳤고 나도 따라 울었다. 자신의 원한을 들어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형님, 내 이야기 잘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이제 속이 시원하네요.”
“잘했어, 여기 왔으니 속에 묻었던 일들은 다 풀어 해결하고 가자.”
유적지에 가면 보이는 것이 다 자연이고 문화, 역사이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거다. 역사는 지리에 의하여 움직인다. 일본이 우리나라 바로 곁에 있었으니까 계속 그렇게 침략하고 시비를 걸었던 거다. 지리를 공부하면 역사가 눈에 보인다. 이웃 나라를 잘 만나야 한다. 거대한 중국과 일본, 우리는 이미 틀렸다. 고등학교 지리 수업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걱정하는 선생님이 계신다. 나는 경기도 어느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한국사를 공부했다.
“다 늙어서 한국사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글을 쓰려고 하였으나 역사지식이 없어서 전혀 쓸 수가 없었어요. 역사를 모르면 깊이 있는 책을 쓸 수가 없고, 역사 배경이 필수였지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굳게 마음먹었어요.”
“순서로는 지리를 먼저 공부하면 좋습니다. 한국사 마친 후 지리 공부를 하시고 세계사까지 해야 그나마 우리나라 역사를 좀 더 이해할 수가 있지요.”
“시간 내기도 힘들겠지만 계속 공부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이렇게 저렇게 살아도 산다는 것은 고생이지요. 쉬운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본인이 선택한 수고는 감당하려는 의지가 있어 좀 낫지요. 즐거운 고생이라 생각하고 이어서 하세요.”
“학창 시절에 실컷 놀다가 이제야 질풍노도 같은 한국사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네요.”
나의 꿈은 소설가였기 때문에 적당히 알아서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바로 이어서 지리와 세계사를 공부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다.
고창에는 세계 고인돌의 80% 이상이 있다. 오후 6시쯤 유적지에서 나와 큰 고인돌이 있는 운곡리에 갔다. 높이가 5m, 길이가 7m, 무게가 30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고인돌이 있었다. 한 족장의 무덤이라니 고조선 시대에도 사회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계급의 핵심은 경제이고 그때는 농토나 하인일 것이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계급을 만드는 존재, 평등하기가 정말 어려운가 보다. 내가 아프리카인하고 평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나는 평등하지만 환경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환경이 다르다면 나머지 것들도 모두 다르기 마련이다. 인간 뇌의 DNA는 2만 개이고,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신경세포 뉴런은 860억 개다. 선천적으로 만들어진 DNA보다 환경과 경험 의지가 훨씬 중요하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제 증거가 있으니 자신의 부족한 점을 유전자 탓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수술한 내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벤치에서 좀 쉬었다. 미스 노가 차에 갔다 오더니 새 운동화를 주었다. 쿠션이 좋아 걷기가 아주 편했다. 미스 노는 즐거운 여행을 위하여 내 운동화까지 준비해 두었다. 나를 소중히 여겨준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는 팸플릿을 보고 내일 일정을 람사르습지와 선운사로 잡았다. 람사르습지는 운곡리에 있어 이 근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람사르습지와 선운산과 도립공원, 어릴 적 소풍 가는 것처럼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설렜다.
“형님, 내일은 두 곳 이상 가야 되니까 일찍 자야 돼요.”
“알았어. 그리고 진즉에 말하려 했는데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언니라고 불러주면 어떨까?”
“그래요, 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요. 형님이라는 말은 옛날 생각이 나서 제가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거 같아요. 저는 옛것을 철저히 반성하여 용서도 구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 나는 동생 이런 점이 참 좋더라. 고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서로 주문하자.”
“나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언니의 고마움을 생각하고 이겨냈어요. CD에 나온 용재오닐의 얼굴을 보았을 때, 용재는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았던 거 같았어요.”
“용재는 아픈 역사를 희망으로 만들었어. 본인이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당했기 때문에 다문화가정 학생에게 음악으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소통했어. 비올라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중간 음색으로 서로를 중계해 주고 화해하게 해 주지. 나는 용재가 비올라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해. 비올라는 용재와 비슷한 악기야.”
“그래요, 다른 악기 소리에 숨어서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요.”
동생은 이제 정신적으로도 안정되고 삶도 훨씬 평안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 만일 용재가 바이올린을 선택했다면요?”
바이올린 소리가 애절하지만 가끔은 날카로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우리는 웃었다. 우리는 부드러우면서 모나지 않고 서로 어울리며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그것을 꿈꾸는 동질의 사람이 되었다.
한때는 남편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나의 높은 도덕성과 체면이 죽이지는 말자,라고 속삭였다. 어느 날, 갑자기 우체부 아저씨가 주소를 보고 찾아와 부고장을 주며 교통사고로 사망했음을 알려주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적과 동침하며 마음까지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도 적보다 남편이 더 미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적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왔을 것이고, 남편은 철없이 놀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적은 참 가련해 보였고 그의 환경은 나를 사회에 한 발자국 더 눈뜨게 만들었다. 이율배반이다. 나는 적을 탓하기보다는 사회를 탓하고 있었다. 생각이 끝이 없을 것 같아 내일의 람사르습지를 생각하며 나는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