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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토 Mar 17. 2023

<스즈메의 문단속>에 앞서 다시 한번, <너의 이름은>

(무비토끼 시리즈)













다시 마주하다





 <너의 이름은>을 처음 본 건 7년 전이다. 다시 한 번 극장에 들러 이 영화를 만났을 때, 나는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불편함과 마주했다. 주인공 타키와 미츠하는 최근 서로의 몸이 바뀌는 증상을 앓고 있다. 이들은 서로의 몸을 오가며 여러 해프닝 끝에 사랑에 빠진다. 기묘하게도 사랑을 깨닫는 순간 미츠하는 세계에서 실종된다. 미츠하를 추적하던 타키는 3년 전 일어났던 혜성충돌으로 미츠하와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타키는 미츠하가 황천에 남긴 술을 마심으로써, 3년 전의 시간선으로 복귀한(다는 것처럼 보인)다. 타키는 미츠하의 몸으로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큰 성과를 남기지 못한 채 그 주인에게 몸을 돌려준다. 자세한 내막은 스크린에서 보여주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살아남는다.


 7년 전과 달라진 사실은 <너의 이름은>이 동일본 대지진에 그 태생을 빚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나에게 의아한 부분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이 이야기가 현실에 빚지고 있다면, 아무리 가상의 내러티브라고 해도 과거를 ‘편집’하는 이야기가 성립해도 괜찮은 건가? 두 번째, 그나마 빠져나갈 구석은 혜성이 떨어지는 사건 자체가 인재(人災)가 아니라 천재(天災)라는 것인데, 굳이 이 사건과 느슨하게 연루된, 사실상 외지인(공간)을 넘어 외계인(시간/공간)에 가까운 소시민(타키)를 불러와 선택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을 부여할 필요할 있을까? 이것은 재난을 끓는 냄비처럼 소비하는 소시민들에 대한 경종 소리인가? 그렇다면, 과거를 제 마음대로 도려내 제 입맛대로 다시 편집하는 이야기는 더더욱 지양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주 다행스러운 건, 미츠하가 3년 전의 시간선으로 돌아와 손바닥을 폈을 때, 타키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극에선 결국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의 이름을 끝끝내 부르지 못한다. 너의, 이름은? 그 말은 미츠하가 사망한 시간선과 동일하게 이 시간선에서도 미츠하는 ‘실종’돼 있다는 것이다. 혜성충돌 후 5년은 가볍게 생략된다. 타키는 미츠하를 잊은 채, 무언가를 상실한 감각만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둘은 ‘도쿄의 이토모리 산’인 지하철 교차로와 육교, 계단에서만 엇갈리나마 서로를 스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미츠하는 이 시간선에서 살아있는 게 맞는가? ‘타키를 잊은’ 미츠하와 ‘미츠하를 잊은’ 타키는 우리가 극 초반부 보아왔던 등장인물과 동일인물이 맞는가? 그렇기 때문에, 미츠하는 이미 죽은 존재거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상태이다. 끊어지고 이어지고 엉키고 풀어지고를 반복하며 이 세계는 가능성의 혼란만을 반복한다. 이 ‘가능성의 혼란’이 반복돼왔다는 건 미츠하의 어머니, 미츠하의 할머니,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그 할머니가 같은 꿈을 꾸어왔다는 이야기에서 기어코 확인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키가 미츠하가 입으로 씹어만든 술을 마셨을 때, 시간을 역순으로 되감는 연출이 아니라 (곧 미츠하가 될) 세포분열의 쇼트부터 보여지는 건 지당한 일일 것이다.


 이 세포분열의 쇼트는 이 이야기가 ‘편집’의 이야기가 아니라 ‘재소환’의 이야기임을 증명한다. 과거는 절대 입맛대로 편집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다시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는 언제든 반복된다. 그 미츠하와 이 미츠하는 같은 미츠하이기도 하면서 다른 미츠하이기도 하다. 미츠하는 미츠하면서 아무도 아닌(Nobody) 이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상실한 감각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 내용은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간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더라도, 호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의식/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간선을 만들어내며 설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세계에 빈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영화는 떠난 자들에 대한 애도이자 남겨진 자들의 방법론일 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려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면, 단 하나만은 확실하게 그 세계에 전해질 것이다. 네가 누구였든지, 어땠는지, 언제건 어디서건, 무엇이 되든, 이유 없이


 사랑(すきだ)했다고 말이다.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어.





すき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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