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스웨덴 키루나에서
눈으로 뒤덮인 세상,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오로라. 어렸을 때 동화에서나 보던 풍경들을 상상만 해봤지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교환학생 파견교로 스웨덴에 있는 웁살라 대학교를 선택하면서 북쪽 지방인 키루나에는 꼭 가보자고 결심하고 한 켤레의 방한 신발을 챙겼다. 웁살라에서 지내는 동안 생각보다 빨리 오로라 소식이 들리면서 기숙사 근처에서도 발견되어서 친구들은 잔뜩 상기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어오곤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육안으로 관찰하지 못했고 아쉬움과 함께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오로라도 일상이 되었고 사진에 더 잘 담긴다는 현실적인 친구들의 이야기는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키루나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기숙사에 12명의 친구들과 같이 지내면서 다 함께 여행을 가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항상 이야기했는데 추진력 좋은 싱가포르 친구 덕분에 10명이라는 큰 덩어리가 함께 키루나에 가기로 했다. 처음으로 계획하는 외국인 친구들과의 여행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단체로 기차표를 끊어야 학생 할인이 적용되는데 서로 송금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있다고 해도 복잡했기 때문에 누가 비용을 대고 돈을 받을지가 아주 곤란했다. 그래서 모두 주방에 지폐를 가지고 모여서 옛 시절처럼 현금을 서로 주고받았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키루나에 가는 당일 저녁, 한두 명씩 기차역으로 모여서 샌드위치를 사고 왁자지껄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기차를 기다렸다. 그 모습이 오래전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교환학생 기간 동안 가장 편하게 마음을 나눴던 친구들과 함께라서 그런지 처음 해보는 모든 것들이 편안하고 익숙했다. 방 한 칸에 세 줄씩 여섯 개의 침대가 있던 그 좁은 방에서 모여 제 방식대로 자리 잡고 다 함께 영화를 보던 달리는 열차를 잊을 수 있을까. 스웨덴 한복판에서 각국의 노래를 틀고 신나게 불러 재꼈던 그날의 밤을 잊을 수 있을까. 샴페인을 깔 수 있는 공간조차 부족해서 비어있는 일등석에 몰래 들어가 웃음을 참으며 나눠마셨던 그 순간을 영화로 만든다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장면일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 좁고 불편한 기차칸의 환경이 우리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주었다. 혹시 자기 전에 홀로 시간을 보낼까 다운로드해온 한두 편의 넷플릭스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던 밤이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술 없이 즐겁게 놀아본 적이 언제였나. 아마 스무 살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즐거운 순간에는 음주 가무가 끼어있기 마련이니까. 사소한 것에 깔깔대고 웃는 모습을 보고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던 모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길을 걸어가다가 도로의 눈을 정리하고 쌓아놓은 거대한 눈 언덕에 한두 명씩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모두가 정상으로 올라와서 다 함께 사진을 찍었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눈을 뒤집어쓸 때까지 뒹굴고 넘어지면서 배 터지게 웃었다. 핸드폰과 술 없이 친구들이 모여서 눈에서 뛰어놀기만 해도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진다는 게 새삼 살아가는데 친구들과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또 다른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나의 동심을 건드렸던 오로라는 내가 경험했던 자연 현상 중에서 최고로 아름다웠다. 오로라 헌팅을 위해 투어를 신청해서 더 북쪽에 위치한 아비스코까지 갔는데 처음 한 시간은 별 소득이 없었고 추운 날씨에 조금씩 지쳐갈 즈음 누군가 오로라다!라고 외친 한마디에 모두 우르르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생처음 직관한 오로라는 아주 작고 색이 거의 없었지만 확실히 구름이라고 하기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눈밭에 누워 별을 구경하는데 점점 오로라의 색이 진해지고 하늘을 메웠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색이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하늘에 거대한 천이 일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렇게 광활한 하늘 아래 작은 우리들이 모여있다는 것으로 새삼 또 우주가 얼마나 크고 신비로운 존재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 첫 오로라는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장의 사진이 되어 마음속에 남겨졌다.
이 키루나 여행은 사실 곧 한국으로 돌아오는 나에게 이별 여행에 가까웠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슬픔을 느낄 시간조차 없게 만들어 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다음을 기약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함께하는 다음은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게 가장 잔인한 것 같다. 표면적인 교류가 아니라 마음 깊숙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능숙한 언어로 감정을 모두 표현하는 것보다 서투른 언어로 한마디 한마디 뱉는 게 마음이 더 잘 느껴질 때가 있다. 키루나 여행을 계기로 더 돈독해졌는데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야속했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서 먼 훗날 함께 추억할 수 있겠지. 여행 중에 나눴던 모든 기쁨과 에너지들은 두고두고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가능성이 희박했던 오로라 관측을 성공했던 것처럼 다 함께 또 여행할 날이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