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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경님 May 08. 2023

16. 잘 듣지 못해 가장 마음 아픈 것

청각장애 엄마의 이야기

2009년 결혼과 동시에 우리는 예쁜 딸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때 우리는 26살의 젊은 나이였고, 

‘내 난청이 아이에게 유전이 되면 어쩌지?’라는 고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그 뒤로 두 번의 임신 출산을 겪으면서도 아이들이 나의 난청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두려움이나 걱정도 없었다. 

(혹시나 나도 누군가에게 난청 유전자를 받은 건가 싶어서 친정엄마에게 여쭤본 적이 있다. 그러나 친정엄마가 아는 한  우리 가족들 중에 난청인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내 난청 유전자는 꽤 먼 선조에게서 내려왔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우리는 생각이 없고 무지했기에 용감했던 것 같다.

감사하고도 다행스럽게 첫째 딸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비록 임신중독증으로 36주 1일 차가 되자마자 원하지 않게 수술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만 1.8kg의 큰 고구마 같은 아이는 이른 출산임에도 불구하고 자가호흡도 건강했고 무탈했다.     

 

신생아 청각검사도 무사히 통과한 아이들이 커갈수록 난청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아이가 소리에 반응을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가 걱정이 가장 컸던 거 같다. 

나도 신생아 청각검사는 정상이었고 후천적으로 청각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앞두고 청각장애 4급 판정을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꽤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잘’ 못 듣지만 전화 통화가 어느 정도 되고 (낯선 사람, 예상치 못한 단어들은 여러 번 말해도 못 알아듣지만 아는 사람의 예상 가능한 물음 내에서는 통화가 가능했다. 아는 단어, 예상한 단어는 잘 들리고, 모르는 단어나 예상치 못한 단어는 듣기가 힘든 게 난청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와우를 착용하는 지금은 맨 귀였을 때보다 알아듣는 단어의 영역이 넓어지기는 했지만, 재활을 게을리해서 그때나 지금이나 별 반 차이가 없다는 슬픈 사실) 내 세상 속에서만 살아온 나는 보이는 보청기를 할 만큼 내 장애가 답답하거나, 내 장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각 보조 장치 없이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매일 밤 아이 머리 옆에 내 머리를 붙이고 잤다. 그리고 아마도 그 울음소리는 내 귀로 바로 들어왔던 거 같다. 아이가 울 때면 항상 신랑보다 내가 먼저 반응을 했기 때문이다. 


아직 움직일 수 없는 신생아일 때는 화장실 앞에 아이를 뉘어놓고 볼일을 보았다. 혹시라도 볼일을 보는 와중에 아이가 우는 걸 놓칠까 봐 늘 아이를 내 눈앞에 놓고 보았다.


청각장애 4급이면서 아직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은 나는, 아기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주파 소리가 거의 죽어버린 나에게 아기 울음소리는 고주파에 속했다.      


육아하면서 놓쳤던 소리들 중에 다시 듣고 싶은 소리가 몇 가지 있다. 


우리 아기가 방귀 뀌는 소리, 우리 아기가 트림하는 소리, 그리고 옹알이하는 소리를 귀를 대지 않아도 듣고 싶다.      


인공와우를 한 지금은 찰나의 작고 높은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비록 기계를 통해서지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는 걸 깨닫고 나니 눈으로 보이는 소리에 만족했던 것이 아쉽기만 하다.      


첫째 딸이 23개월이 되었을 때 첫째의 전신마취에 이어 둘째 딸도 전신마취 제왕절개로 출산했다. 둘째를 출산하고 내가 느끼기에도 청력 상태가 더 안 좋아졌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너무 슬프게도 첫째 딸은 말을 하기 시작하고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작은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엄마가 잘 듣지 못한다는 것에 적응하며 자라온 아이는 동생이 울면 집안일을 하는 엄마에게 달려와 “엄마 아기 울어” 하고 알려주었다. 


두 아이의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그리고 내가 놓치는 아이들의 소리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인지한 후, 나는 드디어(?) 보청기를 착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청각장애 4급 판정을 받은 지 약 3년 만에 보청기 착용을 하였다.   

   

처음 보청기를 했을 때가 약 10년 전인데,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다. (나에게는 뭐 이렇게 생생한 게 많은가 싶지만 말이다.) 캠핑 관련 업종에서 일하던 신랑에게 보청기 회사(스타키)에서 근무하는 고객이 인연이 되었다. 마침 더 나빠진 청력에 이제는 정말 보청기를 해야 하나 보다고 고민하던 찰나였기에 망설임 없이 고객님을 지인으로 검사를 받고 보청기를 맞추게 되었다.

     

스타키 본사에 가서 보청기 본을 뜨기 시작했다. 

귓속을 알코올솜으로 소독하고 깨끗하게 청소가 된 귓속으로 실리콘을 넣어서 귓속 모양 본을 뜬다.     

차가운 실리콘이 귓속에 가득 차면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진공상태가 된다. 그 느낌은 귀에 솜을 넣거나 휴지로 틀어막거나 학창 시절에 귀에 넣었던 소음방지 귀마개 착용 느낌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그 느낌이 무섭고 외로워서 눈물이 났다. 


만약 내가 언젠가 청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작고 소중한 딸아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에 슬픔으로 가득 찼다. 다른 소리들은 못 들어도 상관이 없는데 이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보청기를 착용하는 게 너무 싫어서 미루고 미뤘던 내 행동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걸 이 글을 적으면서 느낀다. 내가 못 듣는 세상에 적응하는 동안 내 주변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했을지, 무엇보다 엄마의 그런 모습에 적응해야 했던 나의 작은 세 딸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우리 아이들은 울어도 달려오지 않는 엄마를 찾아서 자다 깨도 알아서 거실로 나오기 시작했고, 자기의 작은 행동들에 리액션이 없는 엄마를 보면서 재차 확인하는 법을 익혔다. 나는 아이들하고 같이 뽀로로를 봐도 가사가 들리지 않아서 함께 불러주지 못했고, 같이 TV를 볼 때도 “뭐라고 하는 거야?” 더 많이 물어봤던 엄마였다. 


세 아이 모두 기어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다 깨도 울지 않고 엄마를 찾아 집안을 헤집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사람들은 어쩜 이리 순하냐고, 자다 깨도 울지 않는 모습을 신기했지만 울어도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기에 나온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돌이 지나고 걸어 다니고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는 엄마를 부를 때는 와서 톡톡 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만약 정상적인 청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들리지 않아 지나갔던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에 반응을 해주고 싶다.     

잘 들리지 않으니 “어어~” 하고 대충 대답하거나

내 딴에는 못 들어서 대답을 못 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무시라고 느껴졌을 상황들이 제일 미안하고 속이 쓰리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엄마가 한 번에 못 들으면 그냥 체념해버리고 마는 횟수가 늘어간다.


일상의 수다를 하고 싶어도 엄마가 반복해서 물으니 가벼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귀찮아지는 마음이 내게도 느껴진다.     

내가 만약 잘 들을 수 있었다면 나의 작은 아기들이 하는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반응해주고 싶다. 그러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미안해 엄마가 너무 늦게 수술을 해서, 

미안해 매일 밤 엄마가 작은 이야기들을 나눠주지 못해서,

미안해 방에서 불러도 엄마가 달려가지 못해서, 

미안해 매번 호명하는 이름을 잘 들으라고 해서,

미안해 영어 발음을 묻는 너희에게 잘 들어보라고 짜증내서, 

미안해 엄마 못 듣는 거 알면서 작게 말하냐고 짜증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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