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어둠은 찾아오지 않기를
새해의 아침이 밝았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31일에서 오늘의 1일이 되는 간밤에는 불을 켰다. 해마다 새해에는 다음 한 해의 소망을 달콤한 케이크와 빛나는 초에 담았었는데. 여느 겨울보다 고단한 계절을 지나며 이번 촛불에는 어떤 소망보다, 모두의 안녕과 무탈만을 담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비상계엄과 여객기 사고. 공교롭게도 간밤의 소란과 아침의 불행이 우리를 덮치던 때, 때마다 나는 조용히 자고 있었고 늘 한발 늦게 슬픔에 도착했다. 두려움과 슬픔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었을 때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 그러고도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자주 웃기도 했다는 것이 늘 한발 늦은 죄스러운 마음이 되어 왔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무거운 마음이 찾아들 때마다 나직하던 한강 작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소란하던 지난날마다 자신의 가장 빛나는 것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을 위해 떡국과 김밥을 마련했다던 사람들의 소식이 들린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는 거라면 그건 꼭 다음의 희망을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한 희망을 위해 지금 이렇게 새까만 것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다. 정체 모를 믿음이었지만 눈부신 희망은 정말 그곳에 있었다. 차가운 거리에, 광장에, 저 먼 들판에. 바람에 흔들려도 절대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일렁이더라도 뜨겁게 타오르는 무언가를 향한 열망. 눈 감고 싶을 만큼 냉혹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데워주고픈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 모여 우리의 위기를 우리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게 한다고, 견디는 것을 넘어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눈부신 희망을 품게 한다면 이 계절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잠에서 깨자마자 가장 먼저 모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시리게 깨끗한 바람은 온 집안을 돌고 돌아 먼지 가득한 내 마음까지도 맑게 만드는 것 같다. 아무리 추워도 꼭 아침마다 환기를 하게 되는 이유이다. 서랍에서는 새 수건을 꺼냈다. 몇 년을 사용한 수건은 납작하게 눌리고 보풀이 난 것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미리 새것을 준비하여 차곡차곡 개켜놓았었다. 새것에 얼굴을 묻자마자 나만 아는 우리 집의 섬유유연제 향과 보드라운 촉감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납작하게 눌려 있던 마음이 다시 보송보송 차오르는 기분. 누군가의 토닥임처럼 평온한 기분을 겨우 작은 수건에서 느낄 수 있다니. 그러고는 첫 떡국도 먹었다. 새해에 떡국을 먹는 것에는 하얀 떡처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시작하고 기다란 가래떡처럼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떡국 한 그릇에 담긴 소망만큼만 깨끗하게 새로 시작하는 해가 되었으면, 더는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얀 불꽃과 하얀 입김, 하얀 바람과 하얀 수건, 하얀 떡국과 하얀 고요. 내가 가진 모든 하얀 것들에 더 이상의 어둠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흰 마음을 불어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