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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의 기쁨일지도 모른다

서로 돕고 도우며 사는 존재들에 대하여

by 한진


나에게는 휴가의 기회가 일 년에 한 번 있다. 원하는 날짜에 휴가 계획을 세우기도, 때로는 기껏 세운 휴가 일정이 피치 못할 사정에 반납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모두가 두 손 모아 기다리는 딱 한 번의 휴가이다. 작년 나의 휴가지는 뉴욕이었다. 날짜가 11월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겨울의 정취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떠나자는 마음이었다. ‘뉴욕’ 두 글자만으로 부러움 섞인 감탄사를 듣는 화려한 도시는 정말 멋지기는 했다. 선명한 페인트로 이름이 박힌, 일률적인 모양으로 높게 솟은 아파트가 많은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죽하면 손으로 층층이 탑을 쌓는 방식의 아파트 게임과, 그 게임을 모티브로 한 APT 노래까지 있을까. 도시를 옮길 때마다 풍경이 달라져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곳, 고딕 형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들이 많아서 아름다운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그렇지만 여행 내내 나를 매료시킨 것은 도시의 아름다움, 화려한 브로드웨이의 불빛보다 사람들의 태도였다. 보이지 않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아직 곳곳에 자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 터라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는데, 마주한 뉴욕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고 정작 편견의 시선을 갖고 있던 건 나였다.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탈 때였다. 미국의 지하철역에는 우리나라처럼 안전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는데, 낯선 이국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덩치 큰 외국인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승강장은 누군가 뒤에서 민다면 곧장 떨어지고 말 아찔한 낭떠러지처럼 여겨졌다. 혹시 모를 노파심에 승강장 기둥 뒤에 서 있다가 열차가 오자마자 서둘러 탔는데, 빈 좌석에 앉으려는 순간 누군가 나의 옷깃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앉으려던 의자에 서린 물기가 보였다. 옷이 젖을 것을 염려하여 외국인 승객이 의자에 앉지 말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친절은 다른 곳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영어 실력이 썩 뛰어나지 않아 천천히 이야기하거나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되물을 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정했다. 겨우 의사소통을 마치고 ‘thank you’라고 말하는 나에게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it’s my pleasure’였다. 온전히 나의 목적만을 위한 일에서, 심지어는 소통이 잘되지 않아 답답한 상황에서, 오히려 도울 수 있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라니. 물론 그들에겐 한국에는 없는 팁 문화가 있어 말 한마디가 신중할 수밖에 없겠지만, 설령 정말 팁을 위한 억지였다고 해도 활짝 미소 지으며 오늘의 안녕을 묻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매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우리는 서로 돕고 도우며 사는 사람들이지. 그게 우리의 기쁨일지도 모르지.

낯선 여행객에 다정을 선물하던 음식점과 박물관의 직원들, 지하철의 승객, 기차역의 보안요원, 그리고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사람 너머로 내가 몸담은 나라의 친절을 떠올린다. 휴가 계획을 듣자마자 자기 일인 것처럼 걱정과 애정 섞인 조언을 보내던 사람들, 아무 대가와 계산 없이 물건을 빌려주던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그린다. 내가 그들이라면 조건 없는 나눔을 베풀 수 있었을까. 어쩌면 여행은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인 것 같다. 반복되는 삶의 터전과 매번 비슷한 음식,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익숙해서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낯선 곳으로 떠나 있을 때는 간절히 그리워하는 장면이 된다. 벗어나고 싶던 일상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는 일인 동시에 미처 깨닫지 못하던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일.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떠나고 싶어 하고, 돌아오고 싶어 하고, 다시 또 떠나는 것을 그리는 것 아닐까. 꼬박 일 년을 기다린 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마치 짧은 꿈을 꾼 듯 아득한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던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도착한 곳에서 맛본 달콤함이 이곳 어디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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