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엄연한 약물이다. 약이라고 하면 양약처럼 좋은 이미지를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약물'이라고 하면 몸에 부자연스럽고 유해하다는 인상이 강해져서 위험성의 크기를 자각하기 쉬울 것이다.
- 가키부치 요이치 -
1. 중독인건가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셨습니다. 1년에 362일을 마신다며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마셔도 주위에선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매일 저녁, 소주 딱 한 병 정도로만 자제하며 십수 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워낙 건강했고, 동네에서 그냥 술 좀 센 형이었습니다.
주말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술을 마시기 일쑤였습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니 알코올 중독이라는 단어는 체면상 못 쓰겠고, 알코올 ‘의존’ 정도 아니겠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가키부치 요이치 박사의 책을 통해 그 둘은 그냥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술 끊을 결심
회사에서는 눈에 빡 힘을 주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가도, 귀가 후 술로 스트레스를 풀고 자고 일어나 다시 출근하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회사 일만 잘 굴러가면 일단 뭔가 모면한 느낌이나 봅니다.
작년 9월 퇴사를 했고 슬슬 찬 바람이 불 때쯤, “이제 정말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을 해야 할 때”라며 책을 펼치면서, 그제야 내 삶을 통제하는 법을 잊어버렸음을 알았습니다. 졸음이 밀려들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써 내려갈 수도 없었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한참 시간을 보내면 (머리의) ‘뚜껑이 닫힌다’라고 학생들에게 말하곤 했었는데 공부를 그만두고 회사에 다닌 지 5년밖에 안 되었는데, '내 머리가 닫혔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한잔하면 뭔가 생각이 떠오르고 힘도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잠시 멍하게 있다가, 정말 정말 다행히도 ‘아 이러다 큰일 나겠구나’ 하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부터 끊기로 했습니다.
3. 술을 끊기 위한 글쓰기
2023년 12월 3일, 일어나자마자 술을 끊어야 하는 이유, 생각나는 술 끊는 방법, 현재의 상태(체중, 피부, 매일 마시는 것에 대한 자괴감) 등 생각나는 모든 것을 노트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노트를 펼쳐 놓고 낮에도 이어서 쓰고 저녁에도 썼습니다. ‘평생 끊을 수 있는 것인가?’, ‘사회생활이 가능할까?’, ‘음주 욕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등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궁금한 것은 검색도 하면서 마구 써 내려갔습니다. 모처럼 하루의 단주에 성공했고, 7페이지의 일기였습니다.
특히, 음주와 금주, 각각의 장단점에 관해서 쓰는 것은 술을 끊기 위해 가장 효과가 있는 과정이었습니다. 음주의 장점보다 훨씬 크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금주의 장점’을 생각해 내는 것이 주효했습니다.
※ 이 내용은 몇 달 후 ‘다면관찰’이라는 그럴듯한 표로 제작하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고, 흡연, 게임, SNS 등에도 적용하여 학생들의 학습과 시간 관리에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4. 술을 끊기 위한 책 읽기
무언가를 결심하면 책부터 사서 답을 찾으려는 버릇 때문에, 알코올 중독을 극복한 어느 엄마의 수기, 상담사의 경험담이 담긴 책을 샀습니다. 아쉽게도 이 2권은 사 놓고 결국 읽지는 못했고, [슬슬 술 끊을까 생각할 때 읽는 책]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에 손이 가, 단숨에 읽고 금주의 필요성을 강렬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마치 철학서처럼 다가왔고 술에 관한 여러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음주/금주의 장단점을 생각해 보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있어 놀랐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5. 현재 상태와 목표
이제 1달 후면 술을 끊은 지 1년이 됩니다. 평생 금주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11개월 전 글을 쓰며 찾은 듯했는데,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1년이 되는 날을 위한 기념품을 준비해 놓았구요). 단지 높은 수준의 행복감, 자신감, 그리고 건강한 몸과 피부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술 마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 정도입니다.
술에 대한 큰 갈망감은 없습니다. 강도 높은 운동이 큰 도움이 된 것은 확실합니다. 조금 웃기지만 제일 크고 무거운 솜뭉치 권투장갑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 끼고, 하얀 실내화를 신고, 개그우먼 조혜련 님의 ‘태보’ 유튜브를 최대한 사뿐사뿐 뛰어가며 매일 따라 했습니다. 조혜련 님께 감사드리고, 아랫집에 혹시나 소음이 있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어디선가 들었던 주충(酒蟲, 술벌레) 이야기가 있는데, 이 벌레가 몸에 살고 있어서 매일 술을 부어 주면 벌레가 자라 계속 술을 달라고 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이 벌레가 작아지고 힘이 없어지다가 결국 죽게 되어 술을 마시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주충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었구요.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는데, 보통은 건강 문제로 끊었다고 말하면 그리 심하게 권하지는 않는 착한 술친구들이었습니다. 또 글쓰기 모임, 사회 공헌을 위한 모임 등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점점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금주, 금연처럼 좋다고 알려진 어떤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성취감이나 스스로에 대한 칭찬이 부족해져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금주 후에 더욱 운동을 열심히 하고, 가끔 단식도 하고, 독서의 양도 늘리고, 브런치도 시작하고, 이런 여러 후속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신다면 다시 이 좋은 것들이 무너져 내려,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경계하면서요. 공부는 물론이고 결국 무언가를 이루려면 싱싱한 뇌와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술은 처음부터 이 둘을 앗아갔던 것 같습니다. 금주는 더 큰 인생의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최초의 작은 성취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더 크고 '숭고한' 목표들이 술을 가리고 막아주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