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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 스케줄 변경이 조직을 흔들어 댈 때

어느 회사의 CEO 비서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업무의 많은 부분은 CEO의 스케줄과 회의체 관리였다.


CEO의 개인 스케줄이 바뀌면 조직 전체에 쓰나미가 몰아친다. 임원 회의 시간이 바뀌면 본부 일정이 줄줄이 재조정되고, 팀별 업무가 흔들리고, 팀원 개개인의 계획이 틀어진다. 외부 업체와 잡힌 약속도 순식간에 변동된다. 이 모든 게 단 한 사람의 일정 변경에서 시작된다.


‘CEO 시차(時差)’. 하루에도 몇 번씩 알람이 울리고, 회의 변경 공지를 메일과 메신저로 발송했다. 글로벌 기업도 아닌데 시차 적응 훈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팀원들의 헛웃음 뒤에는 깊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문제는 스케줄 변경이 늘 현장에 대한 고려와 배려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스케줄 조정에 큰 이유는 없었고, 단지 어떤 일정이 30분 일찍 끝나면 다음 일정을 30분 당겨 이어 붙여 결국 이른 퇴근을 하기 위함이었다.


대표이사였지만 사실 실무를 거의 해본 적이 없어서 특정 업무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늘 무리한 일정으로 업무 지시가 떨어지고, 많은 임원들은 눈치를 보며 보여주기식 업무를 했다. 일정은 무의미하게 앞당겨졌다가, 다시 질질 끌리다가, 아무 성과 없이 종료되기 일쑤였다. 많은 이들이 지쳐 회사를 떠났다. 안타깝게도 임원보다는 실무자들이 떠났다.


CEO의 일정 변경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수십 수백명의 하루를 재편하는 권력이자 책임이다. 그런데 이 권력을 가볍게 쓰면 조직은 크게 흔들린다. 특히 변화의 이유가 설득력 없고, 반복된다면, 구성원은 ‘내 시간은 존중받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 확신이 굳어지면 성과와 몰입은 빠르게 증발한다.


그 CEO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을까. 둘 중 어느 쪽이든, 그 자리에 있기에는 기량이 부족했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다. 리더가 자기 시간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시간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리더는 이미 조직의 미래를 팔아넘긴 셈이다.


모든 CEO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성원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답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늦기 전에 그들에게 시간을 돌려줘야 한다. 리더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조직의 시간을 구성원 모두와 함께 나눠 쓰는 기술을 빨리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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