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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은있다 May 31. 2023

무조건 행복해야하는 아이

식이장애 이야기




매일 저녁마다 반복되는 폭식으로 상담실을 찾은 혜수씨. 그녀는 시종일관 너무 천진하고, 해맑게 귀여운 웃음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참을  얘기하다가 "그런데, 저처럼 심하지 않아도 상담해도 되나요? 꾀병 같아요"라고 머뭇거린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우울과 식이장애 증상에 대해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며 자신의 결과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직장을 다니지만,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투잡을 뛰고, 주말에는 봉사활동도 하고 교회에서 교사역할도 한다. 하루종일 제대로 식사도 못할 만큼 바삐 지내고 운동까지 하고 나면 밤 9시, 기진맥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 하루 바쁘게 살았다, 음식도 잘 조절했다는 생각도 잠시 편의점과 마트를 들러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들을 잔뜩 사서 게눈 감추듯 우적우적 해치워버린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신이 먹어 치운 음식의 흔적들을 보고 자신이 괴물 같아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이 찾아오면 화장실로 달려가서 위장에 쌀한 톨도 남김없이 게워낸다.


그것이 그녀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하루종일 굶은 탓에 저혈당이 와서 저녁에 폭식이 터지는 것을, 그녀는 자신이 의지가 부족하고, 자기 관리 못하는 사람이라고 탓한 것이다. 종일 자신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소비한 칼로리는 무시하고 전날 밤에 먹은 칼로리만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어 고통스러움을 말할 때에도 참 예쁘게 웃는 그녀이다. "혜수씨가 말해주는 일상은 참 힘들고, 자괴감도 클 것 같은데 항상 웃으면서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라는 내 말에 그녀는 여간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가족 중에 막내로, 어려서부터 '해맑고, 잘 웃고, 걱정 없는 아이'라는 피드백을 받으며 자라왔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까칠한 언니와 달리 혜수씨는 항상 행복한 아이였다. 행복해야만 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언니처럼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고, 가족들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 언니처럼 장학금을 받으려고 노력했고 그 절실함 만큼 시험 때마다 크게 스트레스받았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걱정하지 마, 못 봐도 돼. 그냥 네가 행복하면 돼"라고 말했다. 그녀가 열심히 노력해서 장학금을 받거나 1등을 해도 막상 가족들은 '네가 행복하면 된다'며 그녀가 해낸 성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거절하지 않고 항상 맞춰주고 친절하게 대했다. 어떤 친구들은 그녀를 배신했고, 그로 인해 힘들어할 때 다른 친구들은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너무 호구 같아'라고 했다. 

힘든 얘기를 할 때도 가족들은 '공감만' 해주었다. 조언이 필요할 때도 공감만 해주며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혜수씨의 부모님은 정말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셨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고, 그녀를 많이 사랑하는 좋은 분들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의 성과 자체보다 과정을 중요시해야 한다. 성과 중심의 칭찬은 아이의 완벽주의를 강화시킨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혜수씨에게 '너만 행복하면 된다'는 '좋은 말'을 해주며 그녀가 인정과 성장을 위해 노력해서 얻은 결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성과 중심의 아이가 자라서 힘들어질 것을 걱정한 것이었지만, 정작 어머니의 이런 태도는 혜수씨에게 '난 이래도 안되는구나, 언니처럼 장학금을 받아도, 1등을 해도, 모두에 친절한 사람이 되어도 나는 인정받을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항상 바라는 '행복한 아이, 해맑은 아이'의 모습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상황이든, 어떤 감정을 느끼든 해맑고 행복하게 웃기만 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부모가 부모의 역할과 양육방식을 책으로 배운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부족한 것을 책이나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배우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다만 너무 책에 나온 내용으로 곧이곧대로, 정답인 양 따르기만 할 때 문제가 된다. 책에 주는 메시지, 맥락을 이해하기보다 그 문장 자체만을 보고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적용하려고 할 때 부작용이 일어난다. 마치 수학 공식을 달달 외웠지만, 응용문제는 손하나 댈 수 없는 상태와 같다.     



우리의 삶은 정답이나 모법 답안이 없다. 육아서적은 넘쳐 나지만 여전히 갈등을 경험하는 부모 자녀가 많고, 육아 코치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이유가 그 증거이다. 


사람과의 관계, 그 시작인 부모 자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조율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육아서적을 공부하는 목적은 나와 아이를 건강한 관계를 위한 것인데 나와 아이는 빠지고 책의 내용만 중요시하는 목적전치의 실수를 우리는 그만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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