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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은있다 Aug 16. 2023

사과받지 않는다고 해서 내 고통이 거짓은 아니다

식이장애 이야기



사과를 받지 못한 고통 


1주희씨는 취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연락을 끊었다. 상담 과정에서 부모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이야기만 했던 주희씨라서 당황스러웠다. 사회 초년생인 그녀에게 엄마는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용돈과 부모님의 용돈, 이모라고 불리는 이웃들의 선물을 요구했다. 그뿐 아니라 목돈 마련을 위해 월 백만 원씩 곗돈도 보내라고 했다. 주희씨는 당황스러웠다. 학자금 대출도 있고, 자취방 월세에, 생활비만으로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이번 달은 양가 조부모님의 용돈만 먼저 챙기겠다며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그런데 주희씨의 엄마는 그날부터 하루에도 여러 번 연락해서 진심이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른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 이렇게 감사,를 모르면 안 된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냐, 내 인생의 수치이고 실패다’라고 했다. 주희씨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소문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나는 창피한 존재’라는 수치심이 있었다. 주희씨 엄마는 1등을 하면 왜 100점이 아닌지, 2등과는 몇 점 차이인지 물었다. 방학 때 친구를 만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 방학이라고 놀고 있다며 며칠씩 눈치를 주며 결국 공부하도록 만들었다. 좋은 대학에 합격해서 기뻐할 때, 흥분하지 말고 취직할 때까지 안심하지 말라고 했다. 새 옷을 입으면 날씬해 보이는 옷을 샀다고 했다. 그녀는 엄 마에게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이번 용돈 사건으로 그녀는 폭발했다. 엄마와 연락만 끊은 것이 아니라 회사도 휴직하고 연인과도 헤어지고 일상에 셔터를 내려버렸다. 엄마가 사과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고통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거짓 고통을 호소하는 자신이 ‘실망스럽고, 창피한 존재’라는 의미라고 했다. 가장 숨기고 싶던 민낯이 드러난 것 같아 고통스러워했다. 


 


사과받지 않는다고 해서 내 고통이 거짓은 아니다 


내 의도가 무엇이든, 나의 언행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다. 그러나 모두가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특히 가족 안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다. 가족이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가족은 서로 용서하는 거니까.라는 막연한 말들을 앞세운다.  


그러나 그 말이, 가족이니까 상처를 받아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이기에 더 아프다. 그 아픔은 가족에 대한 믿음, 애정, 의지하는 마음에 비례한다.  


가족이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니까 그 상처가 자연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과하지 않는다고 내 고통이 거짓이 아니다.  


 


내 상처, 내 낮은 자존감의 시작 


나는 자존감이 낮다.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그래도 자존감은 낮은 편이라고 느낀다. 내 낮은 자존감에 대해 생각할 때 주로 떠오르는 기억은, 언니에 대한 기억이다. 어려서 바쁜 엄마는 내가 도움을 청할 때 언니에게 맡겼다. 언니는 “그것도 몰라?”, “딱 보면 몰라!”라고 짜증을 내며 가버렸다. 그때마다 ‘나만 이런 것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그래서 날 드러내고, 표현하기 어려웠고, 수줍고 창피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확실히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이 틀릴까 봐 말하지 못했다.  


언니와 나는 결혼 후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나누게 되면서 가까워졌고, 지금은 속 얘기를 나누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언니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자, 언니는 화들짝 놀랐다. 의외였다. 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그렇게 나쁜 언니였냐고 되물었다. 내 촘촘한 기억에, 언니는 여러 번 사과를 했다. 언니에게 말하고 나니, 나는 후련했다.  


 


사과받았다고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언니, 사과는 받아줄게. 그런데 아직 용서는 못해줘”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성인인 나는 언니를 용서했고, 어린 시절의 언니를 이해한다. 그러나 내 마음 한켠에, 여전히 어린 시절 언니가 했던 말, 눈빛, 혼자 남겨진 어린 내가 선명하다. 그때의 나는 아직 그 상처가 아프고, 그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쓰리다. 그 래서 내 온 마음이, 다 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 언니는 어이없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또 그 기억을 말하면 웃으면서 사과할 뿐이다.  


반성과 사과를 보낸다고 해서, 용서와 이해가 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때로 강요이고 폭력이다. 형량을 다 채우고 출소한 범죄자를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듯 말이다. 관계에서 우리는 가까울수록 더 믿고, 기대한다. 그래서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크다. 가족은 더욱 그렇다. 우리가 태어나 순간부터 모든 처음은 가족에서 시작된다. 탯줄로, 피로 맺어진 신뢰이기에, 그 타격감은 비할 것이 없다. 관계를 말할 때 기승전 애착인 이유가 이것이다.  


특히 가족에게 상처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상처가 덧나지 않게 나 스스로도 나를 잘 지켜줘야 한다. 용서가 내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상처 치료제일 때 그때 용서해도 괜찮다. 더불어, 용서하지 못했다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지 않았다고, 가족을 배신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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