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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은있다 Jan 25. 2023

식이장애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식이장애 이야기






"제가 왜 폭식하는지 모르겠어요. 퇴근해서 집에 오면 자동으로 음식을 잔뜩 시키고 꾸역꾸역 먹어요. 선생님은 상상도 못할 양이에요. 아마 절 괴물이라고 생각하실걸요. 폭토(폭식 후 구토)만 아니면 저녁에 운동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연애도 할 수 있을 텐데 매일 저녁 폭식하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이유를 생각해보라고 하셨지만 아무 이유도 없어요. 제발 폭토 좀 멈추게 해주세요."      


집에 와서 폭토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라고 과제를 주었지만, 그녀는 매번 상담에 와서 그런 과제를 내주는 내가 원망스러운 말투로 정답을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식이장애, 정말 방해꾼인가?


정말 우리는 식이장애 때문에, 폭식 구토 때문에, 운동도 친구도 연애도 못하는 것일까?


그녀는 종일 직장에서 바쁘게 일한다. 일이 많을 때는 바빠서 식사를 거르고, 한가로울 때는 한 일도 없고 사무직이라 종일 앉아만 있어서 칼로리 소모할 일이 없었으니 식사를 하지 않는다. 배고픔을 참고 종일 견디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된다. 퇴근길에 있는 식당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유혹하지만, 종일 해낸 거라고 배고픔을 참은 것뿐인데 이대로 실패할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식당을 지나친다. 종일 굶은 탓에 지칠 때로 지친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짜증이 난다. 하루 종일 한 것도 없고, 친구들 SNS에는 온통 행복한 삶으로 가득한데 나만 외롭고 즐거울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억울함과 슬픔이 몰려온다. 어느덧 SNS를 검색하던 그녀의 손가락은 배달 앱을 열심히 뒤지며 여러 음식의 주문을 마쳤다. 기다림이 힘겨워 다시 SNS를 보다 보니 다이어트와 바디 프로필을 찍은 사람들의 성공적인 모습들이 쏟아져 나온다.



안정적인 직장에, 착하고 성실하고 배려심 좋은 그녀에 대해 칭찬한다. 그녀의 상사도 그녀의 업무 성과에 대해 인정해준다. 30kg대의 심각한 저체중이었던 그녀가 상담을 하면서 체중이 증가하자 사람들은 예뻐졌다고 외모 칭찬도 받고 실제로 소개팅 제안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나만의 특별함이 없고, 남자친구도 없고, 퇴근하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자신에 대해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존재’라고 느낀다. 사실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아서 그냥 쉬고 싶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고, 이런 내 모습으로는 살아간다는 게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직장이 한가로운 시즌이나 금요일 저녁에는 폭토가 더 심해진다. 종일 내 능력을 증명할 이렇다 할 것이 없는 날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자기 비난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기 때문이다. '한심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야! 친구들 좀 봐. 넌 정말 쓸모없다. 이런 너를 누가 좋아하겠니. 결혼은 꿈도 꾸지마. 머저리 같은 기집애' 자기 비난의 목소리가 하루 종일 떠드는 이야기이다. 


그녀 내면의 자기 비난의 목소리는 특히 퇴근 후 집에 혼자 있는 시간에 가장 또렷하다. 그 목소리가 커질수록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를 덜 들으려고 폭식을 하고, 폭식을 하고 나면 체중 증가에 대해서 자기 비난의 목소리가 다시 비난을 하니 구토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폭식 구토는 방해꾼이 아니라 내면의 자기 비난 목소리가 그녀에게 비난을 퍼부을 때마다 그 순간을 대처하고 해결해보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폭식 구토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자극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녀의 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챤에, 공무원으로 성실한 분들이다. 착실하고 모범적인 부모님은 어려서 그녀에게도 예의 바르고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강조하셨다. 특히 교회나 동네에서는 더욱더 조심시켰다. 그녀는 공부도 꽤 잘했지만, 부모님은 칭찬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얘기하셨다. 그녀가 좋은 성적을 받고 기뻐서 뛰어들어오면 잘난 척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하셨고, 친구와 다투고 속상해하면 친구 편을 들고 먼저 사과하게 시켰다. 화장하면 붉은색 틴트가 술집 여자 같다고 하고, 데이트가 있어 치마를 입으면 종아리가 안 예쁘니 바지를 입으라고 했다. 교회 성가대 활동 후 뿌듯하게 내려오면 그녀의 표정이나 노래 실력을 얘기했다. 식당에서 고기를 먹으려고 하면 말없이 샐러드 그릇과 바꾸어버렸다. 쌍꺼풀 수술, 코 수술을 먼저 권한 것도 엄마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가 주도적이고 당찬 여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다.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자기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잘하고 있는 부분을 알면서도 더욱 잘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이 부모에게 항상 부족하고 못난, 부끄러운 존재라는 느낌을 받아 왔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 잘되라고 걱정과 염려를 기반으로 잔소리를 할 때, 잔소리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비난으로 전달되면 그때부터는 부모 자식간의 사랑과 연대감은 사라지고 분노와 억울함, 소외감의 감정이 쌓이게 된다. 

우리 내면의 자기 비난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미리 방 청소를 하는 것처럼, 안전을 위한 부모님의 경고를 잘 받아들여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처럼 자기 비난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 들어왔던 피드백들을 모두 모아서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 내면에서 그 역할을 열심히 하게 된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는 대부분 어렸을 때 들었던 피드백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나이에 머물고 있다. 








자기비난의 목소리에게 나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내가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도 내가 감당할 것임을 충분히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부모님의 말이 옳고 좋은 말이라도 지금의 내 욕구가 맞지 않을 때, 미숙한 아이(child part)로서의 내가 아닌 성인으로서의 내(adult self)가 선택해야 한다. 내 친구, 내 후배, 어린 아이가 내게 이런 고민이나 어려움을 상의할 때 뭐라고 말해줄지 생각해보라. 그때의 내가 성인으로서의 나(adult self)이다. 그 힘이 생길 때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고,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자존감도 향상된다.




그때 우리는 더이상 체중계에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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