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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은있다 Mar 20. 2023

참치캔 만한 행복

그, 그녀,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느긋하게 카페에서 여유를 부린다. 나와는 비교되게 아름답고 세련된 그녀가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내 차림새를 살펴본다. 명품을 걸쳤지만 상대방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소탈한 그녀지만 그 앞에서 은근 작아진다. 반가운 인사를 건내며 잠시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갑자기 상품을 설명을 쏟아낸다. 그녀가 만나자고 할 때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빈틈없이 저돌적으로, 눈맞춤 하나없이 목표물을 발견한 듯, 한자라도 틀리면 안된다는 듯이 태블릿을 바라보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며 설명을 쏟아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짜증스러웠을 상황이다. 아니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항상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상대방을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녀가 소개하면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응하는 편이다.      

한참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내가 이제야 의식이 되었는지 힐끗 쳐다본다. “왜 그렇게 봐요. 나 안쓰러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을 듣고 있다고 했다. 제 할 말을 다 마친 그녀는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나 너~~무 행복해!!”를 연발한다. 난 그냥 웃으며 다행이라고 했다. 조금 안심이 되는지, 최근에 자신의 일상을 조금씩 말한다. 임원인데도 마치 말단 세일즈맨처럼 주말에도 지방 출장을 마다하지 않고 다녀야 하고, 아빠가 편찮으신데 바빠서 병원도 못 가봤다. 퇴근해서도 일한다.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일만 한다, 고객들 생각만 하면 행복하다고 쉴새 없이 말을 이어간다.     




“밥은 먹고 다녀요?”라고 내가 묻자 그녀는 빵 터지듯 웃으며 하루종일 아메리카노 3잔이 끼니의 전부이고 먹고 싶지 않은데 살려고 자기 전에 참치캔 하나 따 먹고 잔다고 한다. “참치캔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아. 억대 연봉 받는데 참치캔이 하루 끼니 전부라니 너무 슬프다” 내가 툭 던진 말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다가 꿀꺽 삼켜진다. 다시 그녀는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한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상담실이 아니었고, 나는 그녀를 치료자로 만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행복하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마치 자기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자신의 아픔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것 같았다. 힘들고 아프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연신 행복하다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억대 연봉만큼 아주 바삐 일한다. 스스로 출퇴근 시간을 반납하고 너무 많은 스케쥴을 소화하느라 그녀에게 식사 약속은 사치다. 그러다보니 매 끼니는 커피들 뿐이다. 밤늦게까지 커피로 연명하다 빛 하나 없이 깜깜한 집에 들어서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다. 배고픔을 잊은지도 오래다. 그저 생명은 유지해야하는데 전자렌지를 돌리는 시간조차 아깝고 버거운 그녀는 참치캔 하나는 딴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지만 그냥 우겨 넣는다. 참치캔 하나에 들어 있는 단백질, 지방이 내 몸에서 연료가 되어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라는 내 속마음이 들렸을까?‘ 그녀는 몇 개월 전에 아이를 잃었다고 한다. 그녀 삶에 마지막 아이였다고 한다. 다시 한번 슬픔이 차오르지만 먼저보다 더 빠르게 삼켜버리고 다시 행복하단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었다. 작은 생명을 잃은 그녀는 스스로에게 참치캔만큼의 호사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행복이란 뭘까? 행복은 기쁨, 셀레임, 분노, 슬픔처럼 수많은 감정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미룬다. 이 행복이란 녀석이 적금통장처럼 차곡차곡 모아두면 이자도 붙어서 나중에 더 큰 덩어리 행복으로 내게 올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내 감정을 무시하고,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를 좇으며 살아가다가 보면, 어느 순간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내적 질문이 올라온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온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혼란스러움을 내 존재를, 내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우리가 무시해왔고,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생각, 감정, 감각들은 무의식 아래에 억눌려 쿠테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가 때가 되었을 때 맹렬히 공격해온다.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그 맹렬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내가 못나서 행복이라는 고지를 코앞에 두고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최소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 나는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결국, 나 자신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고, 나를 바라봐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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