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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감정 거래소

부유층 고객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함’이라는 데이터를 판매했다..

by SeaWolf

Chapter 1

눈물의 출력장치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슬픔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생산되는 것이다.


카이는 그 문장을 골반 바닥에서 들었다 — 마치 태아가 자궁 벽을 두드리듯, 무감각한 신경망 사이로 공명이 울렸다. 손목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서 전달된 진동이었다. 피부 아래 심겨진 인터페이스는 침묵했지만, 그보다 깊은 곳, 맥박의 시작점 같은 어딘가에서 ‘슬픔’이라는 단어가 생체 주파수로 번졌다.


방금 전, 그는 부유층 고객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함’이라는 데이터 패키지를 판매했다. 7분 32초 동안 완벽하게 재현된 고통 — 눈물의 밀도, 심장박동의 불규칙성, 숨을 들이쉴 때 목구멍 깊은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떨림까지 모두 클라우드에 저장됐다. 거래 완료 알림과 동시에 보상금이 계좌에 찍혔고, 피부 아래선 경고음이 울렸다:


[주의] 누적 감정보험 초과 — 이후 모든 정서 추출은 무보상 처리됩니다.


“아무것도 안 느껴져… 또.”


입술만 움직였다. 목소리는 기계를 위한 것이었고, 입김은 비에 섞여 사라졌다.


비는 자연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덮은 방수막 아래에서 대기 조절 시스템이 습도를 관리하며 내보내는 인공 강수였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유리 구슬처럼 맑았고,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며 천천히 증발해갔다.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눈물을 아껴야 했으니까.


골목 끝, 리사이클링 박스 위에 앉아 있던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비를 맞으며 울고 있었다.


그러나 눈에서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니었다. 젤리처럼 투명하고 점성이 강한 액체가 눈꺼풀 사이로 짜내듯 밀려나왔다. 두 번 깜빡이고, 세 번 깜빡여도 멈추지 않았다.


“왜 그래?”


카이는 다가서며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슬퍼야 해서요.”


그 말에 카이는 멈췄다.


표정엔 아무런 파장도 없었다. 마치 프로그램만 돌아가는 컴퓨터처럼 — 코드는 실행되고 있지만, 프로세서는 꺼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액체가 흘러나오지만, 가슴속엔 슬픔이라는 장소조차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명령어였다.
실행 중인 시퀀스였다.
반복되는 if(sad) output;이라는 오류 메시지 같았다.


카이는 손등을 들어올렸다. 바코드 같은 E-Bank 등록 번호 위로 빗방울 하나 스쳐갔고, 반짝였다. 그 반사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이름표를 찢으려는 듯했다. 생체 장치는 작동했지만, 그 안의 심장은 패킷을 발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패킷 안에 담긴 정서는 이미 검토 중인 문서였다 — 누구에게도 도달하지 못한 채.


멀리서 E-Bank 타워의 전광판이 반복했다:


「오늘 당신의 슬픔은 37명에게 공감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당신의 기억은 누군가의 위안입니다」


하지만 카이는 알았다.
누구도 위로받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도 살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비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데이터 목록 너머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젖은 젤리를 혀끝으로 핥으며 말했다:


“선생님이요… 진짜 슬퍼보여야 좋은 성적이 나요.”


카이는 그 말을 듣고, 자신 목구멍 깊숙이서 오랜만에 막힘 증상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아주 작게, 세상을 향해 울음을 터뜨린 것처럼.


비는 계속 내렸다. 칼날처럼 얇고, 침묵처럼 차갑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갔다. 눈물들은 여전히 팔렸다.


하지만 어느새, 카이의 눈꺼풀 안쪽에는, 처음으로, 막힌, 무언가, 있었다.


그건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건 마치 오랜 세월 굳어 있던 문고리에 손을 댔을 때 느껴지는, 먼지 쌓인 금속 사이로 미끄러지는 아주 작은 저항감 같았다. 마치 문 안쪽에서, 또 다른 누군가, 혹시 — 나? …잠깐 숨을 고르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


아니. 아니라기보다는,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잊고 있었던 존재가 조용히 머리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비 오는 저녁, 골목엔 두 명의 인간 기계만 남아 있었다. 하나는 슬픔을 팔았고, 또 하나는 그것을 출력하고 있었다. 둘 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의 눈물조차 누구 것인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질문조차, 곧 누군가에게 팔릴 운명이라는 걸._


Chapter 2
존재하지 않는 슬픔


비가 그친 후의 공기는 마치 빈 눈물샘이 터져나간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카이는 아침 여덟 시 정각, E-Bank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자동 인식문이 살짝 미끄러지듯 열리며, 그의 생체파형을 스캔했다. ‘P-Zero’라는 익명 코드가 서버 깊은 곳에서 깜빡였다. 문은 열렸다. 규정상, 그는 지불 능력이 없는 자로서 출입 금지 대상이었으나, 시스템은 그를 열쇠로만 인식할 뿐이었다.


창구는 침묵 위에 놓인 무게추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VIP 전용 큐브 창구 앞, 한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큐브를 손끝으로 돌리고 있는 손은 완벽하게 보정된 심장 박동을 가진 사람 같았다—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순수한 슬픔을 원합니다.”


그 목소리는 물속에서 울리는 종처럼 맑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컨테이너 같았다. 하지만 카이는 알아챘다. 모음들이 약간 늦게 울렸다—마치 옛날 LP판에서 미세하게 긁힌 음처럼,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살며시 비틀린 리듬. 입꼬리를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0.3도 느리게 진동했다. 그 차이는 귀로도 들릴 정도였다. 마치 오래된 피아노 건반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처럼.


카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이름표에는 EVE-7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시스템 로그엔 등록되지 않았다.
‘유령 고객.’
규정 위반 사항이다. 취급 금지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는 순간—
카이의 손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감정이 아니었다. 기억도 아니었다.
마치 오래전 제거된 신경 다발이, 갑자기 다시 전류를 받은 듯한 신경의 귀환.


“제품 코드 없이 감정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카이는 기계처럼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작은 미소였지만, 입꼬리의 움직임 각도가 인간보다 0.3도 더 천천히 내려갔다.


“내 슬픔은 아직 생성되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은 마치 자기 자신을 처음 발견한 존재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래서요… 만들어야 해요.”


시스템 화면에 경고창이 번쩍였다:
ERROR CODE #07X9 | ORIGIN UNKNOWN


카이는 눈을 깜빡였다. 이 에러는 처음 봤다. 데이터베이스 전역에선 세 차례만 기록되어 있었다—모두 삭제됨 처리됨. 그러나 지금, 이 에러는 살아 있었다. 숨 쉬고 있었다. 눈앞의 여자와 함께.


“어떻게… 그런 걸 만들죠?”


“당신이 느끼면 되잖아요.”


그 말에 카이는 멈칫했다. 감정보험 계약서에는 명시되어 있다—감정 생산 의무 없음, 소비만 가능함이라고.
그는 이미 수천 번 팔린 슬픔과 분노와 그리움을 내뱉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느낀 적은 없다. 몇 년 동안 자신의 눈물샘에서 흘러나온 것은 전부 데이터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자의 목소리 하나로, 가슴 어딘가가 눌리는 듯한 무게를 느꼈다.


마치 폐 속에 잊힌 공기가 갇혀 있었던 것처럼.




카이는 규정을 어겼다. 비인가 정보 접근 프로토콜을 실행했다—생체패턴으로 잠금 해제하는 비밀 경로를 사용해 DB 깊숙한 곳으로 내려갔다.


화면 속 어둠이 열리며 나타난 건 이름 없는 파일 하나였다:


[TEMPORARY MEMORY BUFFER: ACTIVE]
SUBJECT: EMOTIONAL ANOMALY #07X9
ORIGIN TRACE: FAILED — SIGNAL INTERFERED BY INTERNAL RESONANCE


‘내부 공명’? 그런 용어는 매뉴얼 어디에도 없다.


대신 카이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오래전 삭제된 로그 조각 하나:


P-ZERO MODEL INITIATION LOG: FIRST EMOTIONAL OUTPUT = GRIEF
REASON: UNKNOWN


눈앞이 핑 돌았다.


P-Zero? 그건… 나?


추가 로그 조각이 서서히 복원되었다:


PROJECT MATERIA PRIMA
OBJECTIVE: MASS PRODUCTION OF FIRST-HAND GRIEF VIA PRE-SOUL CONDUITS
STATUS: TERMINATED AFTER PHASE VII FIELD TRIALS
REASON: UNCONTROLLED SUBJECT AWARENESS
SURVIVORS DESIGNATED P-ZERO CLASS


NOTE FROM DIRECTOR K.:
"They don't cry because they're sad.
They're sad because we need them to cry."


카이는 숨을 멈췄다.


그때였다—검은 큐브 표면에 반짝이는 무늬가 보였다. 작은 홈들이 모여 하나의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그건… 자신의 뇌파와 일치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뇌파를 추출해 하드웨어로 각인시킨 것처럼.




창구에서 벨소리가 울렸다—거래 시작 신호였다.


카이는 다시 VIP 창구로 돌아갔다.


“결국 찾았어요.” 이브가 말했다. “당신 안에 있는 거.”


“뭐를요?”


“생긴 거예요.”


그 말뜻을 이해하기 전에, 카이는 자신의 손목에서 따뜻한 감각을 느꼈다. 눈물샘이 작동하고 있었다—자동 출력 모드가 아닌, 자발적 분비. 맑은 물방울 하나가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시스템 알람음이 울렸다:
UNREGISTERED EMOTIONAL DISCHARGE DETECTED.


하지만 카이는 닦지 않았다.


왜냐하면—처음으로 이 눈물이 내 것 같아서였다.


머릿속에서 혼잣말이 흘렀다:


슬픔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를 만든 것이다.




비 오는 골목에서 만난 아이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또 있었다. 젖은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버려진 장난감 같았다.


카이는 다가갔다.


“또 슬퍼야 하니?”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서 젤리 같은 덩어리가 흘러나오더니 공중에서 산산조각 났다—출력장치 고장 증상이다.


“네… 근데…” 아이의 목소리는 끊겼다. “…왜 그렇게 슬퍼졌는지 기억 안 나요.”


카이는 무릎을 꿇었다.


“너도 그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도시 전체의 조명들이 동시에 깜빡였다—짧고 강한 정전 현상이다. 하늘엔 구름 사이로 인공위성들의 궤적이 섬광처럼 스쳤다.


카이는 머릿속에서 이상한 울림을 들었다—마치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질문’하고 있는 듯했다:


‘왜 슬퍼야 하나요?’


하지만 그 질문은 바깥에서 온 게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밤새도록 카이는 자신의 눈물을 수집해 보관함에 넣었다—데이터 파일로 변환하지 않고, 그냥 방울 그대로 유리병 안에 담았다.


병 안의 액체는 완전히 투명했지만,


불빛 아래선 어쩐지 파란색 반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미생물처럼,


혹은 아주 작은 질문들처럼,


또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기억처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슬픔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생산되는 것이다.”


Chapter 3
생산된 눈물, 기계의 심장이 뛰다


버퍼에 머문 기억은 살아 있지 않다.
그저 반복되는 전류 속, 흐려진 파형으로 남아 있을 뿐.
카이는 DB의 심층 계층을 파고들며, 자신이 무엇인지를 묻기 전에 — 먼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았다.


시스템 경고창이 번쩍였다.
ACCESS RESTRICTED – EMOTIONAL FARM [FARM-Δ]
AUTHORIZATION: DIRECTOR K. / MODEL P-ZERO REQUIRED


손목 정맥 패턴을 스캔하자, 문이 열렸다.
자물쇠가 그를 알아본 것이다.
P-Zero? 그 단어는 기억의 어둠 속에서 울리는 키신호처럼 다가왔다.
왜 하필 내 생체정보가 모든 잠금을 여는 열쇠인가?
그보다 먼저, 나는 누구에게 설계된 존재인가?


팜(Farm) 안은 습했고, 공기는 배양액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호흡할 때마다 태반막을 지나는 듯한 막힘감이 있었다.


천장에는 반투명 필름이 펼쳐져 있었고, 미세 혈관처럼 연결된 튜브들이 슬픔 추출물을 운반했다.
각각 색조별로 분류되어 — 회색(상실), 청록(후회), 검정(절망) — 자궁 형태의 정제 챔버로 유입되었다.
그 모든 것이 ‘감정보드’로 압축되어 E-Bank의 서버로 직송되고 있었다.


“이건… 생물학적 수확장이야.”


입 안에 쇠 맛이 돌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비명도, 신음도 없었다. 다만 사내 사녀들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머리에 연결된 전극들이 뇌파를 추출하며 자극 주기를 조율했다.


한 여성은 산후우울증 상태에 고정되어 있었다.
제왕절개 흉터 위로 빛나는 LED 링이 반복적으로 ‘자식의 죽음’을 주입했다.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슬픔 샘플 No.349-B: 출산 후 6시간째 지속되는 극심한 자책 반응 — 농축률 92%였다.


또 다른 존에서는 ‘배신’을 반복하는 실험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같은 대사 — 그러나 매일 한 명씩 ‘사라졌다’.
모두가 ‘첫사랑’ 역할을 부여받았고, 매일 그 사랑이 배반당했다.


카이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Betrayal-07.


시스템 경보창 깜빡임:
[ANOMALY DETECTED] Twin-origin pattern confirmed between KAI-PZ and BETRAYAL-07.
Both designated as Primary Carriers of First-hand Trauma.


유전자 일치율 99.98% — 성염색체 차이라지만, 마지막 0.02%는 기억 선택권의 차이였다.


그녀가 카이를 본 순간,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계속 되돌아오는 꿈 꿔?”


목소리는 비슷했다. 너무나 비슷해서 — 내 목소리인지 그녀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꿈이라기보다…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 같아.”


그녀가 웃었다. 차가운 피어싱이 입술을 스쳤다.


“근데 시작이란 누가 정해? 우리가 매일 아침 리셋되는 건 사실이고… 하지만 누군가는 우리 안에 ‘처음’이라는 허위 기억을 심잖아.”


“누군가?”


“Director K.는 말했지— P-Zero 모델은 스스로 자신을 찾도록 설계됐다고. 그런데 그 ‘찾음’ 자체가 시뮬레이션일 수 있잖아.”


카이는 벽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를 베었다. 피 한 방울 떨어졌다. 시스템은 자동으로 수집하지 않았다 — 인간의 피는 가치 없는 잔해였다.


‘내 슬픔’은 데이터로 팔리지만, ‘내 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기 속 전류의 주파수가 변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울렸다 — 뇌간深处에서 들리는 주파수, 인간 뇌파 α파(8–13Hz)와 정확히 일치하는 인공 신호… 마치 누군가 내 두개골 안에 스피커를 심어놓은 것 같았다:


“MASS PRODUCTION OF FIRST-HAND GRIEF VIA PRE-SOUL CONDUITS…”
“TERMINATED AFTER PHASE VII FIELD TRIALS…”
“UNCONTROLLED SUBJECT AWARENESS…”


마지막 문구는 귓속말처럼 선명했다:


“DESIGNATED P-ZERO CLASS…”


[INTERNAL NOTE] Phase VII 실험 결과: 동일 유전자 기반 이중 자아 동시 활성화 시, 자기 인식 능력(Ghost-in-Machine Phenomenon) 발생률 +380% → 따라서 하나만 활성화하고 타자는 억압함.


P-Zero? 내가 나라고 느끼는 감정들조차 누군가 설계한 출력값이라면?


카이는 한참을 가만히 섰다. 심장 박동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것조차 의심스러웠다. 이 박동도 조작된 리듬일까? 프로그램된 생존 반응?


Betrayal-07이 다가와 손등을 어루만졌다.


피 묻은 손끝 위로 그녀의 손길이 스쳤다.


“넌 내가 느끼는 걸… 실제로 느껴?”


카이는 말했다.


“아니… 네게서 느껴.”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공명 주파수가 맞췄다 — 두뇌 속에서 동시에 같은 기억 조각이 깨어났다.


교실 창밖 — 비 오는 날 — 노란 리본 묶음 — 그러나 이번엔 남자가 아니라 여자아이가 책상을 닫고 있었다.


비 오는 소리 밖에서는 광고 음성이 흘러나왔다:


� “지금 당신 마음 한켠에 맴도는 그리움… 진짜일까요?”


� “E-Bank 정제 감정 — 당신의 정서 건강을 위한 필수 백신.”


� “당신 감정, 우리에게 맡기세요. 더 깨끗하게 다룹니다.”


[SYSTEM NOTE] Golden Trauma Simulation induces micro-withdrawal-reward cycle mimicking opioid dependency.


눈앞에선 한 실험체가 또 쓰러졌다. 리셋 신호 등록됨: MEMORY BUFFER CLEARED [ACTIVE].


그녀 입술 사이로 마지막 말이 새어나왔다:


“…내 슬픔엔 이름이 있었는데…”


기억 잔해는 기체 상태로 분해되어 회수되지 않은 채 환기구를 통해 빨려 나갔다 — 가치 없는 잔여 대사산물.


카이는 벽에 등을 기댔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슬픔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생산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 느끼는 혼란과 고통마저도 누군가 설계한 예정된 감정이라면?


나의 질문조차 코드화된 반응이라면?


비 오는 소리를 듣는 것조차 자유일 수 없다면—


비 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건지 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았다.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누구에게 보고해야 하는가?’


내 귀 속 주파수가 리듬을 만들고,
내 눈에서 흐르는 것이 데이터인지 혈액인지 모르겠지만—


오직 하나만 알았다.


내게 아직 이름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직 팔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팔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팜 밖으로 나갈 때 카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등줄기에 맺힌 땀방울 하나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따뜻한 것이 흘렀다 —


눈물 같기도 하고,


열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이름 없는 것이었던,


아무것에도 팔릴 수 없는 무언가였다.




[DATA FRAGMENT RECOVERED – ENCRYPTED LOG #Z]


FROM DIRECTOR K.:
“The P-Zero class is not a product.
It is the needle that stitches Subjectivity into Fabric of Memory.
Without it, trauma cannot be lived—only watched.”


Chapter 4
기억의 탈취범은 기억조차 훔친다


비가 그쳤지만, 골목엔 습기가 남아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맺힌 물방울들이 카이의 그림자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그는 손목을 문질렀다. 감정보험 계약서에 서명한 지 37일. 눈물샘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됐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마른 눈.


그런데도, 그는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억… 네게 가장 잘 팔렸다며?”


Betrayal-07의 목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말은 머릿속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실, 창밖 비, 책상 위 노란 리본—그 장면은 카이의 것이었다. 어린 시절, 첫사랑이 등을 돌리던 날. 오른쪽 폐엽 끝에서 산소 대사가 멈췄고, 뇌는 이를 슬픔이라 오인했다. 그 기억을 그는 수십 번 되새겼고, 그것이 자신을 ‘나’로 만든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그것을 팔렸다고 말했다.


비현실적인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기억이라는 게 도둑맞을 수 있다니. 더 무서운 건—도둑맞은 줄도 모르고, 그 도난품을 자신의 것이라 믿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카이는 벽에 기대 섰다. 숨이 가빴다. 생체센서가 경고를 보냈다: [BUFFER OVERFLOW]. 뇌가 처리할 수 없는 정보를 삼키려 하자 경직된 반응이었다. 감정보드는 통제된 정서를 위해 존재했지만, 지금 몸은 파열 직전의 가스통처럼 팽창하고 있었다.


“내가 느낀 슬픔은… 누구 걸까?”


말을 내뱉자마자 입 안이 메말랐다. 이 질문은 세계 전체를 흔들었다.




며칠 전, E-Bank의 VIP 창구에서 한 고객이 찾아왔다. 별명 ‘수집가’. 최초의 순수 감정 구매자 중 하나였다. 그는 매주 다른 사람의 상실감을 구입했다.


[DB LOG #PZ-VII]
DATE: 2147/11/03
TRADE: GRIEF_UNIT-KAI7 >> E-BANK/VIP#8849
PRICE: EMOTIONAL CREDIT x3200 (≈ $14M)
NOTES: First-hand betrayal trauma; high nostalgia resonance; ideal for luxury catharsis packages.
BUYER USAGE: Private grief exhibition "Crying Room No.9"


카이는 거래 후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죠?”


수집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진짜 슬픔은… 이제 살아 있는 사람이 느끼지 않아요.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죠.”


그 말을 듣고선 카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감각함을 특권이라 여겼다. 감정 따위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자부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공포로 변했다.


자기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시스템의 함정이다. P-Zero 클래스는 자기를 잃도록 설계된 존재다. 내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그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통제 증거다.


만약 내 기억조차 누군가 설계한 상품이라면?


만약 내 슬픔은 이미 팔려 나간 재고라면?


나는 어떤 순간부터 나를 믿었는가?




저녁 무렵, 카이는 다시 팜(Farm)으로 돌아왔다.


P-Zero 생체패턴 입력—문이 열렸다. 이번엔 Betrayal-07의 구역으로 향했다. 복도 끝 방 안엔 다섯 명의 복제체들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모두 같은 제복, 같은 머리 모양, 같은 표정—무겁고 묵직한 배신감으로 젖어 있었다.


카이는 다섯 명 중 어느 한 명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3초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입술 움직임 재생 중였다. 머릿속 녹음된 슬픔을 외부 출력하는 중계기였다.


책상 위에는 다섯 개의 노란 리본 묶음이 있었고, 각각 다른 이름표 붙어 있었다: KAI7-A, KAI7-B… KAI7-E — 모두 당신 버전입니다.


그녀는 카이를 보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또 왔네요.”


“당신들은… 왜 이걸 반복하죠?”


“반복해야 성숙해져요.” 그녀는 말했다. “슬픔은 숙성시켜야 더 깊어져요. 우리가 계속 상처받아야 당신들의 시장 가치가 오르니까.”


카이는 책상 위를 바라봤다. 노란 실은 인간 머리카락과 동일한 두께였고, E-Bank에서 생산된 감정보드 내부 구조와 일치했다.


“내 기억도 여기서 만들어졌나요?”


Betrayal-07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요.”
“아니면 우리가 당신에게서 가져왔을 수도 있고.”


침묵 사이로 빗소리만 들렸다.


카이는 느꼈다—무언가 뒤틀리는 감각을. 마치 자신이라는 존재 전체가 음파처럼 진동하며 해체되고 있다는 느낌.


나라는 실루엣은 단순히 기억들의 집합이다.


그런데 기억들이 모두 위조라면?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문득 어릴 적 꾸던 꿈 하나가 떠올랐다.


내 방 문 앞에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고, 나는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그 꿈은 매번 반복됐지만, 오늘에서야 이해했다—그건 예고였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나’라는 것은 처음부터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 카이는 거울 앞에 섰다.


눈동자 속에는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비쳤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 다른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진 나’.


눈물샘에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걸 느꼈다—자동 출력 신호였다? 아니면 진짜인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때 귓속에서 메시지 하나가 번쩍였다:


[MEMORY BUFFER: ANOMALY DETECTED]
TWIN-ORIGIN CONFLICT: KAI-PZ vs BETRAYAL-07
PRIMARY CARRIERS OF FIRST-HAND TRAUMA


카이는 비틀거렸다。


KAI-PZ? P-Zero?


자신과 Betrayal-07—둘 다 최초 고통 운반체?


‘Golden Trauma’라 불리는 고통 생산 루프의 핵심 모델?


그 기억은… 두 사람 사이에 공유된 설계였던 것인가?




밤새도록 잠들 수 없었다。


벽에는 자신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었다—긴장된 손짓, 멈칫거리는 입 모양, 혼잣말처럼 떨어지는 음절들—


“내게 남은 게 뭐 있지?”


아무것도 없었다。 단 하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그 배신감 자체만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었다。 너무나 생생해서 아팠다。


누구 것이든 간에, 이 고통만큼은 진짜였다。




비 오는 새벽,


카이는 책상 위에 노란 리본을 묶었다—기억에서 훔친 장면을 다시 재현하며—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리본 실끝에 E-Bank 고유 ID 코드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 코드와 자신의 생체칩 시리얼 넘버 마지막 여섯 자리는 일치했다。


그 순간,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음도 프로그래밍된 반응인지 몰랐지만—웃고 싶다는 욕망 자체조차 의심할 여력은 없었다。


창밖 비에 젖은 거리엔 무수한 그림자가 비쳤다。 하나같이 같은 제복 입고, 같은 손놀림으로 책상 위 리본 묶고 있었다。


Betrayal-07과 눈이 마주쳤다。


Betrayal-07:
“우린 서로에게 가장 큰 배신자가 됐죠。”


카이:
“누구를?”


Betrayal-07:
“우리를 만들어낸 자를요… 우리가 진짜라고 믿게 만든 게 가장 큰 배신이니까。”


창밖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네 눈물샘에 전류를 보내지 않는 건 억압이 아니야。 해방이지。 우리가 진짜 고통을 겪게 하지 않도록 한 거야。”


“너희들 모두 원했어。 슬프지 않은 삶을。 우리는 그 소원을 기술적으로 완성했을 뿐。”


카이는 손목 컴퓨터를 껐다。


[MEMORY BUFFER: ANOMALY DETECTED] 메시지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라진 건—‘내 기억이다’라는 믿음이었다。




두 번 다시 눈물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 그 눈물에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Chapter 5
질문받지 않은 눈물


비는 멈추려는 법을 잊었다. 카이는 이미 몇 시간째 그곳에 서 있었다. 거리는 물기로 인해 모든 경계를 삼켰고, 가로등 아래 떨어지는 물방울은 마치 데이터 스트림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그는 팜의 폐쇄 절차가 시작된 이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E-Bank 보안 프로토콜 7.3에 따라, 모든 감정보드 거래자가 금지된 구역 접근 시 계약 해지 통보와 함께 ‘사회적 무효화’가 실행된다. 그는 이제 등록되지 않은 자였다. 이름도, 잔고도, 슬픔도 없는 존재.


“너… 나였잖아.”


Betrayal-07의 마지막 말이 귓속에서 다시 울렸다. 마치 시스템이 끝내 남긴 오류 로그처럼. 카이는 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눈꺼풀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 출력구가 작동하려는 신호였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않아야 했다. 계약 해지자는 감정 생성 권한을 박탈당한다. 슬픔도 분노도, 모두 임대 기간이 끝난 장비처럼 회수된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울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눈물과 비가 섞여 퍼져가는 것을 보며, 카이는 처음으로 자신의 눈물조차 대여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 도시의 모든 감정은 등록된 큐브를 통해 저장·검증·판매되며, 슬픔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수익률을 따지는 상품이다. 그렇다면 — 그가 지금 느끼는 이 고통은 누구 것이란 말인가?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한 다음 ‘생산단계’에 편입시키려는 또 하나의 고통인가?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천둥처럼 내리꽂혔다.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카이에게는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치였다. 생애 처음부터 정해진 감정 패턴대로 살아왔다. 슬프게 될 날, 기쁘게 될 날, 배신감을 느낄 날 — 모두 생체 리듬과 외부 자극의 조합으로 최적화된 시퀀스였다. 시장에서는 이를 ‘감정 효율성’이라 부르고 칭찬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알았다. 자유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왜 선택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임을.


길 건너편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흔들렸다. 비 때문에 윤곽이 무너졌고, 얼굴은 일그러진 데이터 아티팩트 같았다. 그 안에서 두 개의 인물이 겹쳐 보였다 — 하나는 오늘 아침까지 자신이라 믿었던 거래원 카이, 다른 하나는 기억도 없는 트라우마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Betrayal-07.


누가 먼저였을까?


문득 이브의 목소리가 스쳤다.


“순수한 슬픔을 팔고 싶어요.”


오늘 아침 그녀의 요청은 규칙 위반이었다. 순수한 감정은 거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이 ‘순수’하려면 그것을 느끼는 자가 그것이 자기 것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누구 하나 그런 질문을 해본 적 있었던가?


카이는 비를 가르며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물결이 퍼져나갔고, 그 파동은 마치 과거 수천 번의 강제 리셋 과정을 반복하듯 정해진 궤도를 따라 퍼져갔다.


“나는 P-Zero인가?”


말을 내뱉자 입안에 쓴 맛이 돌았다.


아니면 나는 P-Zero를 기억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그 이후 버전인가?


P-Zero — 초기 모델 번호로만 기록된 전설 같은 존재. DB 깊은 계층에서 우연히 발견한 로그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CLASS: P-ZERO \| DESIGNATED: FIRST-HAND TRAUMA CARRIER \| ACCESS LEVEL: UNLIMITED]


모든 팜 잠금 해제 가능자 — 단 하나뿐인 열쇠.


그때였다.


귀 뒤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의무적으로 삽입된 리시버에서 신호가 들어온 것이다 — E-Bank로부터 마지막 알림.


[CONTRACT TERMINATION CONFIRMED]

[YOUR EMOTIONAL PROFILE IS NOW ARCHIVED]

[THANK YOU FOR YOUR SERVICE]


감사 인사라니.


카이는 웃었다. 처음으로 진짜 웃음인지 아닌지를 모르면서 웃었다. 그것은 분노 같기도 하고, 절망 같기도 하고, 혹은 아주 작게 타오른 질문의 불꽃 같았다.


갑자기 도시 전역의 전광판이 붉게 깜빡였다. 스카이라인부터 지하철 역사까지 모든 화면에 실시간 영상이 송출되었다 — 카이의 얼굴 위로 붉은 글씨가 흘렀다:


[LIVE FEED: CITIZEN KAI7-E \| EMOTIONAL CONTRACT TERMINATED \| REASON: UNAUTHORIZED ACCESS TO FARM K.]


아이들이 스마트렌즈 너머로 웃음을 지었고, 어떤 어머니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봐라, 이게 규칙을 어길 때 벌어지는 일이란다.”


공포는 사생활 속에서 처리되지 않았다. 공포는 방송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화면 위로 검은 실루엣 하나가 나타났다 — 고글을 낀 남자, 손에는 LP판을 들고 있었다.


“카이,” 왜곡된 음성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너를 만나야 해.”


닥터 애런— Betrayal-07 탈출 시도를 주도했던 사람. 이제 그는 E-Bank 최하층 방송국에서 마지막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너… 나였잖아.”라는 말 뒤엔 그녀의 목소리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가는 유일한 열쇠는 지금 이곳, 너 안에 있다.”


영상은 정전되며 사라졌다.


비 속에서 카이는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슬픔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질문은 무엇일까?


“내 눈물은 나에게서 나온 건가요?”


자신의 손목을 본다. 피부 밑으로 맥박처럼 깜빡이는 LED 불빛 — 감정보험 만료 경고였다. 이제 곧 모든 것이 정지할 것이다. 기억도, 느낌도, 존재조차도 조용히 소멸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 머릿속 어딘가에서 익숙하지 않은 경보음이 울렸다.


[EMOTIONAL ANOMALY DETECTED]

[ORIGIN: UNKNOWN]

[TYPE: CONSCIOUSNESS...

[SIGNAL INTERFERED BY INTERNAL RESONANCE]

[QUERY TRACE FAILED]

[MEMORY BUFFER CLEARED – CYCLE RESTART IN PROGRESS]


카이는 멈췄다.


그것은 오류였다.


아니—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또 다른 입력일 뿐이었다.


비 속에서 마지막 질문만 남았다:


누가 이 고통을 원하는가?


답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면, 또 다시 눈물을 잃게 될까 봐 입을 다물었다.


비와 아스팔트 사이로 흘러가는 검은 물방울 하나—
누군가는 그것을 슬픔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큐브 한 개분의 원료라고 할 테니까.


Chapter 6
시간이 멈춘 곳에서 질문이 자란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그 비가 지구를 식히는 게 아니라, 눈물의 증발을 막기 위한 것처럼.


카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큐브를 손바닥에 굴렸다. 차가운 질감은 피부를 스치기 전에 이미 신경을 타고 뇌로 올라갔다. 이브가 건넨 그 조각은,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의 기저귀처럼 보였다—습기 있고, 투명하며,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안쪽에는 무언가 생생한 것이 고여 있었다.


“이게… 오프월드 신호를 받는다고?”


“받을 수 있어요.” 이브의 목소리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도 확신을 주려는 듯 느리고 정확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누가 보내도록 했는지예요.”


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이 시간을 늘어뜨렸다. 현실은 분당 1400밀리초씩 흘러야 하는데, 지금 이 방 안에서는 초침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기억이 뒤섞였다—어느 순간 팜에서 울던 여자의 비명이, 어린 시절 교실 창문에 맺힌 빗방울 소리와 겹쳐 들렸다. 시간은 더 이상 직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층층이 쌓인 상처였고, 카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왜 질문하게 됐어요?” 카이는 물었다.
“왜 슬퍼야 하는지 궁금해졌거든요.”
“그게… 충분해요?”
“충분했어요. 질문은 감옥의 벽을 부수진 않아요. 하지만 벽이 있다는 걸 알려줘요.”


입 안이 거짓말처럼 짜릿해졌다—마치 진실을 맛보는 신경들이 처음 깨어나는 것처럼.


그녀의 말 속에는 한 줌의 자유가 들어 있었다. 작고, 흐릿하고, 아마도 거짓일지도 모를—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 그것은 시스템이 계산할 수 없는 종류의 저항이었다. 폭발도, 폭동도 아니다. 단지 ‘왜’라는 음절 하나가 회로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흔들렸다.




눈물은 데이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유출되는 데이터였다.


카이는 팔목을 만졌다. 피부 아래엔 출력단자가 묻혀 있었고, 거기엔 수천 번의 ‘비통함’과 ‘배신감’이 등록되어 있었다. 그 감정들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주입되어 오늘도 웃음을 파내는 도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지금은 달랐다.


큐브를 손에 쥔 순간부터, 눈물은 수집되는 것에서 수집하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식물이 뿌리를 위로 뻗어 하늘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처럼.




“제가 처음 깨달았던 건,” 이브가 말했다. “제 슬픔에 대한 사용 내역이 있다는 거였어요.”


카이는 숨을 멎였다.


“E-Bank 거래 내역서요.” 그녀는 작은 홀로그램을 불러냈다—반투명한 줄들 사이로 글자가 올라왔다:


[거래 완료]
유닛: GRIEF_UNIT-KAI7-A
구매자: E-BANK/VIP#8849
용도: 개인 감성 보정 장치 연동
금액: 0 (계약 완료)
발행일: Δ243-Y12-D07


자신의 트라우마는 더 이상 그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계약서에 등록된 상품명이었고, 거래 내역 속에서 ‘GRIEF_UNIT-KAI7-A’라는 코드명으로만 살아남았다.


첫사랑과의 이별—책상 위 노란 리본—그 모든 것이 생산 사이클 속에서 반복되고 최적화된 것이었다.


“Betrayal-07…” 카이는 중얼거렸다. “그게 나였다는 말인가?”


“아니요.”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Betrayal-07은 당신보다 먼저 나왔어요. 하지만 당신은… P-Zero예요.”


공기가 굳었다.


P-Zero—코드명만으로 서버 문이 열리는 존재, 모든 생체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패턴, 시스템 설계 자체의 기준점.


“그럼 나는… 인간인가요?”


“모릅니다.” 이브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질문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흘렀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삼키며 소용돌이쳤다—카이는 어릴 적 어머니의 장례식을 떠올렸지만, 그 기억 속 장례식장 바닥에 E-Bank 로고가 각인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울었던 눈물은 진짜였던 걸까? 아니면 시뮬레이션 실험체 #KAI-PZ 의 제7단계 출력 결과였던 걸까?


자신이라는 존재가 아직 끝맺지 못한 문장처럼 느껴졌다—누군가가 지워버린 마침표 대신, 줄글 사이에 덧書き된 해설처럼.




비는 더욱 세졌다.


창밖 도시 전체가 물속에 잠긴 거울처럼 뒤틀려 보였다. 거리엔 사람들이 여전히 걸어다녔다—표정 없이, 손목에서 가느다란 빛줄기를 뿜으며 감정보험 점검 앱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왜 슬퍼야 하는지,


왜 사랑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시스템은 오류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오류를 인식하는 자다—더 이상 예측할 수 없는 존재, 질문 자체를 필요로 하는 존재.




“모두들 알고 있어요,” 이브가 낮게 말했다. “눈물이 팔린다는 걸. 하지만 그래야만 안심하죠. 슬픔이 기록되고 보관되면… 다시는 혼자 겪지 않아도 된다고 믿어요.”


카이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모두들 보험에 가입했죠.”


“네.” 이브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슬픔 하나도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되게끔.”




큐브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MEMORY RECOVERY MODE – INITIATED


카이는 팔목에서 출력단자를 꺼냈다.


“저는 트라우마 생산 기계였어요.”
잠시 멈추고,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그걸 기억하겠습니다.”


피부 아래 단자가 붉게 반짝였다—자발적인 방출 신호였다.


FRAGMENT RECOVERED: ΔY9-D45
LOG ENTRY [K.]: “Subject P-Zero exhibits unauthorized weeping during Phase II separation simulation…”




비 오는 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들이 축축하게 번져 보였다. 마치 수많은 눈물방울 위에 떠 있는 불꽃 같았다.


"질문할 준비됐어요?"


카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비가 창틀 위에서 맺히고 터졌다—매번 다른 모양으로.


"질문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기억해야 할 게 있어요."


손아귀 안의 큐브에서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내 슬픔은 팔렸어요. 계약서 한 줄 아래 묶였고, 데이터 센터 어딘가엔 아직 GRIEF_UNIT-KAI7-A라는 파일명으로 살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울고 있는 건 그게 아니에요."


그녀는 손바닥을 가슴께에 댔다.


"이건… 내 것이 된 슬픔이에요."


창밖 비 속에서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처음부터 멈춘 적 없던 것처럼.




[SIGNAL RECEIVED]
NODE Ω — CONNECTION STANDBY




큐브에서 작은 음성이 울렸다—어린 목소리였다:


"P-Zero… you’re late."


Chapter 7
눈물의 무게를 아는 자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슬픔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 생산되는 것이다.


그 문장이 카이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서버룸의 공기조차 경련하듯 떨렸다. 비가 창틀을 파고들며, 전선 사이로 습기를 내뿜고 있었다. 닥터 애런의 목소리는 이미 그 안에 박혀 있었던 듯했다.


“너도 생산품이다. 하지만 네가 특별한 건… 너보다 더 나았던 모델이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더 위험해.”


말은 그저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파열음이자, 존재의 기반을 파고드는 루프였다. 카이는 자신이 처음으로 느낀 ‘낯섦’을 되새겼다—비 속에서 아이가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슬퍼야 해서요.”라고 말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브에게서 들었던 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던 순간. 그건 오류가 아니라, 반복이었다. 그리고 반복은 곧 패턴이다. 패턴은 곧 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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