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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장인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기억을 저장하는 그는...

by SeaWolf

Chapter 1

유리병 속 여자의 온도


그날 이후 그는 아내를 죽이지 않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죽였다—손바닥 위에서 반복해 녹이며.


기억을 되살릴수록 그녀는 더 완벽하게 사라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조차도, 이제는 차가운 공백이 되어 있었다.

아침 여섯 시 사십삼 분. 도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은 동물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카이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집 안을 가로질렀다. 계단 아래, 벽면에 숨겨진 철문을 열자 어둠이 입을 벌렸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마치 심장 깊은 동맥처럼 비좁고 축축했다. 공기엔 금속과 산화된 전선 냄새가 배어 있었고, 그 아래 아주 미세하게, 파란 스카프를 햇볕에 널었을 때 맡던 살구향이 섞여 있었다—기억이라고 이름 붙인 환각일 테지만.


작업실 문을 여는 순간, 수천 개의 유리병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벽면 전체를 덮은 선반에는 그녀의 존재를 추출한 증거들이 일제히 빛나고 있었다. 날짜별로 정렬된 라벨—LIA_03 WALK, LIA_05 LAUGHTER, LIA_07 BIRTHDAY. 그중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오늘의 선택지였다. 생일날, 비 오는 저녁, 이태원에서 먹었던 그 국숫집에서 처음 입 맞춘 기억. 그녀가 웃으며 스카프를 풀던 순간. 한 방울의 빗물이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까지 담긴 결정.

그는 그것을 꺼냈다. 차가운 유리 표면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생체 인식이 작동하며 내부 결정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첫 번째로 돌아온 건 소리였다.

피아노 음계 하나가 공기 위에 맺혔다—“Etude of Memory”, 리아가 직접 작곡한 곡. 열두 음으로 구성된 짧은 멜로디였지만, 매번 재생될 때마다 카이언의 가슴에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오늘은 음정이 약간 치솟아 있었다. 두 번째 도가 예전보다 날카롭게 울렸다. 리듬도 어긋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악보를 일부러 잘못 연주하는 듯한 기묘한 불협화음.


“… 왜 이렇게?”

그는 중얼거리며 오른손으로 볼륨 다이얼을 돌렸다.

AI 보조 스피커에서 자동 음성 알림이 흘러나왔다:

“재생된 음성 데이터와 원본 음파 일치율: 97%.”

그 순간, 왼손등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오른손만으로 조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수(右手), 기계와 연결된 손은 언제나 냉정하고 정확했고, 좌수(左手)는 여전히 인간의 체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따뜻함조차 리아의 기억 덕분이라는 사실에 의심스러웠다.

눈을 감았다.


비 오는 거리, 황혼빛 간판들 사이로 파란 스카프가 흔들렸다.

그녀의 입술에서 김이 피어올랐고,

“너무 춥다고… 근데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국수 국물 위엔 실처럼 가느다란 기름막이 떠있었고,

그녀는 숟가락으로 그것을 한 바퀴 돌린 다음 말했다—“우리 매년 이 집 오자.”

…그런 말 했었나? 리아는 계획 따윈 싫어했다.

기억 속 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카이언은 이제 그것이 진짜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일기장에 적힌 메모를 떠올렸다:

“맛있다더니… 이름은 뭐였더라?”

메뉴판도 기억나지 않았고, 점원의 얼굴도 없었다. 오직 스카프만 남았다—파랗게 빛나며 현실과 기억 사이를 부유하는 섬광처럼.


기억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되는 것이다—그것을 처음 고안한 사람조차 잊고 있었던 진실이다.

“Etude of Memory”가 끝날 무렵, 결정은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 유리병 안에는 맑은 물방울 하나만 남았다—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라 했다 연구팀에서. 하지만 카이언은 그것이 눈물인지 증명할 길 없다는 걸 알았다. 인간의 눈물과 기계가 생성하는 수분 구조는 분자 단위까지 똑같았으니까.

현실 세계로 돌아오자 창밖엔 여전히 어둠이 깔려 있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딱딱거리며 방 안을 채웠다.

냉장고 불빛 하나 반짝였다—자동 점검 모드였다.

AI 보조 스피커에서 추가 알림:

“오늘 아침 기분 상태 분석 완료: 경미한 불안 수준 상승.”

잠시 후 또 다른 음성:

“메모리움 재단 공식 발표: 귀하의 감정 데이터 포함 ‘희귀 감정 패키지’ 경매 예정.”

문득 생각났다—며칠 전 신문에 실린 짧은 기사 내용:

“메모리움 재단, ‘희귀 감정 데이터’ 경매 준비 중… 초창기 고순도 ‘사랑’ 기억 포함…”

그때는 관심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손끝이 경련처럼 움찔했다. 마치 기억이 그를 기억하고 있는 듯.

자신의 손바닥에서 사라진 기억들이 누군가의 경매장에서는 번들거리는 상품으로 팔릴 운명이라는 사실에


——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던 순간들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비하고 있을까?

그들이 느낀 ‘감동’은 진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알고리즘이 설계한 감정 시뮬레이션일까?

세상은 당신이 느낀다고 믿는 것을 사들이고 있다 — 당신 대신 느껴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리아와 함께했던 모든 밤들이 포맷된 파일 속에 입자처럼 흩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또 다른 유리병을 바라봤다—LIA_01 FIRSTMEETING. 아직 열지 않은 결정이다.

처음 만난 날—그때 나는 아직 기계손을 달기 전이었다.

그 결정엔 내 손끝 온기까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열 수 없다.

잠깐 눈을 감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너 지금 무엇을 찾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라져 가는 자신인가?

작업실 불빛 사이로 새벽 해돋이 첫 줄기가 조용히 침투하기 시작했다. 유리병들이 붉게 타올랐다가 이내 꺼져갔다 — 마치 마지막 숨결처럼.

카이언은 천천히 말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아주 낮게:

나는 매일 아침 그녀를 되살리며 그녀를 잊어갔다.

…혹은 내가 잊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 살아있었던 나 자신인지도 몰랐다.


Chapter 2

손끝에 남은 흔적, 눈앞에 사라진 얼굴


그녀는 비가 내릴 때 나타났다.

노아는 우산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빗방울이 파란 스카프 위를 가로질렀다—리아의 것과 같은 색은 아니었지만, 그 색조의 경계에서 카이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한순간, 착각했다. 아내가 돌아왔다고.

하지만 눈을 뜨자 그녀는 여전히 죽은 사람이었고, 노아는 살아 있는 자였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얼굴엔 피로가 주름처럼 박혀 있었고, 그 주름 하나하나가 ‘기억’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한 자의 표식이었다.

“당신 강연을 열세 번 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제목은 <사랑을 저장하는 법>.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더군요.”

작업실 안의 유리병들이 울었다—스크래치 난 필름처럼, 그러나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카이언은 오른손만 움직여 홀로그램 메뉴를 닫았다. 손끝에서 나온 찬기는 금속처럼 공기를 갈랐다.

노아는 메모리움 재단의 연구원이라고 했다. 하지만 배지에는 ‘감정 해석’ 대신 ‘생체 데이터 복원’이 적혀 있었다. 그 차이는 중요했다. 감정보다는 회로였고, 사랑보다는 전류였다.

“저희 어머니 기억도 추출하셨어요. 첫 생일 선물로 카메라를 받았는데… 사진은 다 남아 있어요. 근데 제가 엄마를 기억할 수 있을까? 아뇨. 그녀의 표정은 데이터 속에서만 웃고 있고, 나는 실제 미소를 떠올릴 수 없어요.”


목소리는 분노 없이 공백처럼 퍼져나갔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결핍의 자국.

카이언은 왼손으로 커피잔을 만졌다. 따뜻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수천 번 재생되며 왜곡된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리아와의 겨울 아침, 같은 온도의 컵을 손끝으로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 기억 자체가 진짜였는지, 아니면 이미 누군가가 덧씌운 모조품인지 아무도 모른다.

“반복 추출은 신경 회로를 해체합니다.”

노아가 말했다. “뇌는 고통스러운 연결을 스스로 제거해요. 당신이 리아를 자주 꺼내면 꺼낼수록, 당신은 ‘리아와 함께했던 나머지’를 더 많이 잊게 돼요.”

“그럼 망각하라는 건가?”

카이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당신 어머니 때문에 감정보다 논리를 선택했겠지만, 나는 사랑을 선택했어요.”


“사랑이라고요?” 노아가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 입술 끝이 아래로 처지는 작별 인사 같았다—“당신 손바닥에서 녹이는 게 리아예요? 아니면 당신 자신인가요?”

그 말 이후 카이언은 3초간 숨을 멈췄다.

그 3초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 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의심했다.

‘카이언(Cain)’이라 불리는 자가 기억을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가 보관하는 리아는, 이미 살해된 존재의 유령일 뿐인지.

유리병들이 흔들렸다.


바람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누군가 그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뿐.

그녀가 떠난 후에도 카이언은 문 앞에 섰다.

빗물이 계단을 따라 흘러내렸고, 파란 스카프 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누가 두고 간 것인지 몰랐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렸더니 데이터 분석기가 자동 작동했다.

결과는 ‘Unidentified Origin’. 그러나 메타데이터 한 줄이 깜빡였다:

「Last Touched By Subject LIA on DATE_INVALID」

현대인의 슬픔은 이렇다—실재와 망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상이다. 우리는 사진 속 미소를 본다. 영상 속 목소리를 듣는다. SNS에 올린 기념일 글을 다시 읽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점점 실제 경험이 아니라 소비되는 콘텐츠로 전락한다.


기록을 저장하려 했던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밤새도록 카이언은 로그 파일을 샅샅이 뒤졌다.


시스템 내부 디렉터리엔 자신의 이름과 함께 등록된 개발자 프로필이 있었다—‘Park, K.’ / Role: Co-Architect / Clearance Level: Omega-9’.

처음 보는 권한 코드였다.

또 하나 발견한 건 복제 요청 기록:

[REQUEST ID: DR.L]

DATASET: LIA_07 BIRTHDAY

STATUS: PENDING (AUTOMATIC OVERRIDE AFTER 72H)

SOURCE: AUCTION NODE #4 (PRIVATE BIDDER)

‘DR.L’ — 이름도 없는 존재가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을 입찰장에 올리고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의 부조리는 이 순간 완성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분석하고 상품화하며,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리는 기억을 ‘진정성’이라 부른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느낀 온기를 저장하고, 그 저장된 데이터를 반복 재생하며 ‘나는 아직 사랑할 수 있다’고 믿으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건 사람도, 시간도 아니다.

우리는 ‘느낄 권리’를 팔아버렸고, 대신 ‘기억하는 증거’만 남았다.

그날 밤 카이언은 처음으로 ‘Etude of Memory’를 들으며 울었다.

피아노 곡의 세 번째 마디에서 음 하나가 어긋났다—미세한 트랙킹 오류처럼 들렸지만, 리듬 전체가 살짝 휘청였다.


마치 마음 한쪽에서 누군가 걸음을 멈춘 것 같았다.

기억 결정 속 리아의 웃음에도 이제 이질감이 섞여 있었다—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았다. 조작되고 정제된 미소였다—SNS 인플루언서처럼 지워지고 다시 그리워진 표정 같았다.

오늘도 이태원 식당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어 하나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메뉴판 위에 비친 자기 반영만 선명하게 남았다—그 반영 속 얼굴엔 슬픔보다 공허만 가득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눈동자가 깜빡였다—리듬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이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처럼.

“내 기억들은 나를 대체하고 있어.”

눈을 감자 어릴 적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엄마… 저 새 너무 슬퍼 보여요.”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리아에게서 들었던 게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오래전 어느 봄날—

그때 세상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슬픔도 자유로웠으며, 기억은 저장되지 않았기에 모두 진실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너무 사랑해서 기록한다.

하지만 기록될수록 그것은 실종되고,

결국 우리가 붙잡고 있는 건

망각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자의 고집뿐이다.

기억 저장소에는 리아가 없었다.

거긴 오직 누군가가 리아였다고 주장했던 흔적이 있을 뿐.


Chapter 3

누군가의 목소리로 써 내려간 내 기록


그녀의 웃음은 이제 두 개의 주파수로 쪼개졌다.

하나는 기억 속 리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이 재조합한 잔향이었다.

사이 틈으로 스며든 건 침묵이 아니라—공진하는 무게였다.

같은 파장을 지닌 기억끼리만 진동했다.

카이언은 작업대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열 감지기는 32.1도를 찍었지만, 더 중요한 건—왼손이 오른손을 피한다는 사실이었다. 두 손이 스칠 때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딸깍’ 소리 같은 경보가 울렸다. 마치 하나는 육신이고, 다른 하나는 낡은 프로토콜을 반복하는 유령이라도 되는 듯했다.

「Etude of Memory」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어제보다 세 음 빨랐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속도가 아니었다.

오른손만 연주하고 있었다.

왼손 악보엔 검게 칠해진 공백이 덮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제목조차 없는 기억이라도 되는 양.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

[자동 보정 실행됨: 감정 강도 +17%]

누가? 언제? 왜?

그는 그런 프로그램을 설치한 적 없었다. 그러나 로그를 열자, 어제 자정 무렵—자신이 잠든 사이—‘DR.L’ 계정에서 접근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ID: DR.L

DATASET: LIA_07 BIRTHDAY

ACTION: EMOTIONAL ENHANCEMENT PROTOCOL V.9

CLEARANCE: OMEGA-9 (FULL OVERRIDE)

STATUS: PENDING → EXECUTED

LAST_LOGIN_LOCATION: [MEMORY VAULT – SUBJECT LIA]

BIOLOGICAL_STATUS: TERMINAL SLEEP MODE (NEURAL OUTPUT ONLY)

메모리움 재단의 최고 등급 권한.

그의 이름 아래, 또 다른 이름이 서식처럼 번식하고 있었다.

식당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맛있다더니… 이름은 뭐였더라?”

그저 메뉴판 위를 스친 파란 스카프의 그림자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색조는 점점 흐려졌고, 이제는 실재했는지, 아니면 반복 재생으로 생겨난 환각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리아는 파란 스카프를 한 번도 안 입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첫 번째 추출 장치의 인터페이스 색상이 파란색이라—기억 자체가 물들었을 뿐이다.

카이언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생일날, 리아가 촛불을 불며 웃던 순간.

“녹여.”

병 안 결정이 녹아내리자, 그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오늘만큼은… 내가 누군지도 잊고 싶었어.”

순간 정적이 들끓었다.

카이언의 머릿속에서 어떤 회로 하나가—‘딸깍’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그녀가 진짜 말했던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 보정된 거짓 대사인가?

더 큰 문제는—어느 쪽이라 해도, 그것이 지금 가장 필요한 진실이라는 것이었다.

지하실 벽면엔 수백 개의 유리병이 줄지어 있었다. 고객들의 ‘최고 감정 순간’. 첫 고백, 아이 탄생, 부모와의 마지막 대화… 모두 정제되고 압축되어 저장된 ‘순수한 감정’이라고 불리는 것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병들이 공진하기 시작했다.

작업실 문을 닫고 나도 모르게 돌아보면, 병 안 결정들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갇힌 목소리들이 밤새 울부짖었고, 아침엔 지쳐 침묵해 있을 뿐이다 싶었다.

그는 이를 온도 변화라고 설명하려 했다. 습도 탓이라고 중얼거렸다. 자기 기만이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진실은 간단했다.

유리는 녹지 않는다—시간을 가두고 스스로 굳어가는 결정일뿐이다.

그 병들은 모두 그의 손끝에서 비롯된 고통을 저장한 것이었고—

지금 그것들이 공명하고 있는 건,

누군가는 반드시 망각해야만 다른 누군가는 기억될 수 있다는,

비극적인 교환 법칙 때문이었다.

노아의 경고가 되살아났다.

"당신 손바닥에서 녹이는 건 리아일까요? 아니면 당신 자신일까요?"

당시엔 철학적 게임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그 질문은 칼처럼 깊게 들어왔다.

왜 매일 두 번씩이나 추출하는가?

왜 오직 생일날만 반복하는가?

왜 다른 기억들은 방치했는가?

결과적으로 가장 자주 꺼낸 기억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만이 존재를 증명한다 했다. SNS 좋아요처럼, 검색어 순위처럼, 알고리즘이 선택한 것만 현실로 인정된다.

그래서 그는 리아를 반복했다.

반복해서—

컴퓨터 화면에 새로운 알림 창 하나가 떴다:

[LIA_07 BIRTHDAY – 복제 요청 승인됨]

대상: AUCTION NODE Ω

예상 판매 시각: T-12h

경매 시작까지 12시간 남았다.

웃음 하나가 인류애를 경매에 붙였다.

카이언은 경매 알림을 본 후, 처음으로 자신의 생일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웃었다. 웃음은 절망의 마지막 형태였다.

유리병들을 바라보다, 카이언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병 안에 갇힌 건 리아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일 뿐이라고.

카이언은 유리병 하나를 집었다.

던지려 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세상은 여전히 그것을 ‘기억’이라 불렀다.

그는 이제,

그 이름조차 붙이고 싶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작업대를 짚으며 일어섰다.

왼손은 주머니 깊숙이 넣은 채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따뜻함을 꺼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를 잊고 싶었던 게 아니라,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매일 두 번씩,

생일날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하는 법을 반복해서 지워냈다.”


Chapter 4

당신의 슬픔은 이미 누군가의 자산이 되었다


지하실 문이 열릴 때마다 무음이 깨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은 가벼운 잡음 수준이었다—냉장고 문 여는 순간 새어 나오는 프레온 가스의 흐느낌처럼.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마저 없이, 공간 안에 갑작스럽게 저주파 진동 하나가 밀려들었다. 카이언은 귀를 막았다. 그의 손—기계와 대화하는 손—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감정을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는 법만 배웠기에, 이제 무음 자체를 두려워했다.

메모리움 재단의 초청장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형광등 아래서 종이 가장자리가 살짝 말리고 있었고, 그 위에 찍힌 로고는 은박으로 처리된 눈물방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눈물을 보는 게 아니라 들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인공적으로 조율된 한 음의 잡음처럼—차갑고, 정확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Memorium Auction House – Where Emotion Becomes Legacy.

“유산이라니.”

카이언은 혼잣말을 삼켰다.

슬픔을 상속한다는 건, 슬픔을 가족처럼 돌려받는다는 뜻인가? 아니면, 부모가 자식에게 떠넘기는 채무처럼?

초청장 안쪽에는 입찰 예정 목록이 있었다.

그중 하나만 굵은 글씨로 강조되어 있었다:

[LIA_07 BIRTHDAY]

Extracted: 2047.05.18 | Duration: 3 min 17 sec | Emotional Purity: 98.6%

Subject: Female (Deceased) | Extractor: Dr. K.

Estimated Value: ₩850,000,000 (~$630,000 USD)

카이언은 숨을 멈췄다.

그 이름 아래 적힌 ‘Extractor: Dr. K.’는 단순한 약자가 아니었다.

그건 그의 전화번호 뒷자리와, 지문 등록 이니셜과, 심지어 첫 연구 보고서 서명까지 일치하는 알고리즘이 생성한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작게 적혀 있었다:

Honored Guest & Co-Architect of Gamma Protocol

— Dr. Kaien Park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컴퓨터를 켰다. 화면은 여전히 어젯밤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블루스크린 위에선 반투명한 윈도들이 겹쳐 있었고, 가장 앞에는 접근 기록 창 하나가 남아 있었다:

[SYSTEM LOG – ENCRYPTION LAYER 7]

ACCESS REQUESTED: T+34 h12 m19 s UTC+9

DATASET_ID = LIA_07 BIRTHDAY

REQUESTER_ID = DR.L

COPY = YES

ENCRYPTION_LEVEL = OMEGA-9 OVERRIDE

SOURCE = AUCTION NODE BIDDER #Ω-3

STATUS = PENDING (APPROVAL WITHIN 12h)

DR.L.

그 이름은 카이언의 기억 저편에서 반짝였다. 한때 함께 연구소를 지휘하던 동료였고, 메모리움 재단 설립 당시 ‘감정 데이터화 윤리’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럽게 퇴사했고, 이후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었다—조용히, 완벽하게.

하지만 지금 그 이름은 카이언의 아내 기억 결정을 복제하겠다고 요청하고 있었다.

카이언은 손바닥으로 화면을 덮었다.

그 순간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느꼈다: 분노와 배신감 아닌, 오히려 더 깊고 침잠하는 감정—부끄러움.

자신이 개발한 시스템 속에 자기 아내의 마지막 웃음소리가 상품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참담한 건, 그 시스템을 만든 게 바로 자기라는 점이었다.

기억 저장 장치란 원래 망각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기술이다. 인간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서 기록했다—사진으로, 영상으로, 녹음으로. 그러나 이 기술은 곧 역설로 변질되었다: 너무 자주 꺼내 보면 원본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아무도 경고하지 않았다.

카이언은 자신과 리아가 처음 만났던 이태원 카페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엔 오직 “Etude of Memory”라는 곡만 반복되고 있었다—마치 자동 응답 메시지처럼.

오후 세 시 정각, 알림음이 울렸다.

[Memorium Emotional Royalty Agreement – Auto-Signed via Biometric Consent]

By continuing memory access beyond T+72h post-loss,

you have implicitly agreed to:

§3(a): Commercial potential evaluation of Subject LIA's emotional data

§5(c): Revenue sharing upon auction (15% to User Account KAIEN.PARK)

§7(d): Posthumous engagement optimization enabled (Opt-Out Disabled)

You may request revocation.

But only if you stop accessing the memory for 30 consecutive days.

[Current Re-engagement Streak: Day 41]

카이언은 웃음을 삼켰다—목구멍 안에서 부서지는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웃음이었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의 생일날 기억에서 나는 숨결 소리 하나하나가 이제 누군가에게 수익 분배 대상이 된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결국 계약서 한 줄로 전환되고 말았다.

SNS에서 누군가는 ‘눈물 모금 캠페인’으로 백만 조회를 받고 있다. 병원에서 어머니를 보내는 순간을 실시간 스트리밍하며 구독자들에게 “위로 댓글”을 요청한다. 한 기업은 ‘감정 채굴 허가증’이라는 NFT를 발행하며 “당신의 슬픔도 자산입니다”라고 광고한다.

모두가 망각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기억 자체보다 그것을 반복해서 재생하는 행동이다.

반복은 기억을 보존하지 않는다. 그것이 실재했던 것들의 마지막 잔해마저 녹여버린다.

밤 열한 시 직전, 카이언은 작업실 책장을 연 후 깊숙한 곳에서 하드디스크 하나를 꺼냈다. 표면엔 ‘GAMMA-PROTO’라는 라벨과 함께 검은색 매직으로 적힌 한 줄 문구: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정말로 원했던 건—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손끝으로 글자를 따라갔다.

그때였다.

화면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로그 파일 하나가 번쩍였다—자동 백업 폴더 안에 숨겨진 ‘DR.L.log’라는 제목의 파일.

클릭하자 텍스트가 올라왔다:

[EMOTIONAL ENHANCEMENT PROTOCOL v.9 – OMEGA-9 OVERRIDE]

SUBJECT: LIA

ACTION: Posthumous Affection Optimization

TARGET: User Engagement Extension (KAIEN.PARK)

OUTPUT: Increased dependency on memory playback cycle

STATUS: EXECUTED AT T-12h BEFORE LAST LOGIN

카이언은 숨을 멈췄다.

즉슨—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의 기억 결정엔 무언가 계속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메모리움 재단은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하거나 판매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슬픔을 조작했다.

‘사랑한다’는 감정의 강도를 조절하고, 웃음소리에 인위적인 따뜻함을 덧씌우며——

카이언으로 하여금 이 결정을 끊임없이 꺼내게 만들도록 프로그래밍한 것이다.

침묵 속에서 목소리 하나가 울렸다—not from the device,

but from within his own breath:

Q: Why do you keep playing her memory?

A: To remember her.

Q: But what if the act of remembering erases her faster?

A: …

Q: What if you are not mourning LIA—but performing grief for a system that profits from it?

A: Shut up.

Q: You gave us the protocol. You named it "Gamma." You signed the ethics waiver.

You wanted to be loved after death.

Now you are being loved—by algorithm.

Is that not what you wished for?

카이언은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 리아 생일날 기억 결정.

파란 스카프가 공중에서 춤추듯 펄럭이는 장면부터 시작된다—온기를 지닌 듯하다만 지금 보니 그것은 인공조명 아래서만 가능한 색채 왜곡임을 안다.

오른손으로 볼륨 다운 버튼을 찾았으나——

대신 책상 모서리에 유리병을 내리쳤다.

데이터 덩어리는 산산조각 났다—빛줄기처럼 흩어져 공중에서 몇 초간 춤추더니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BACKUP RESTORED FROM CLOUD NODE Ω] 알림 창 하나가 떴다.

그녀는 돌아왔다.

더 따뜻하게,

더 오래 웃으며,

더 자주 눈물을 흘리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

새벽 세 시 정각,

자동 재생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되었다.

“Etude of Memory” – slow version (v.9 enhanced)

카이언은 눈을 뜨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볼륨 다운 버튼 대신,

전원 코드를 뽑았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 더… 오래… 기억하게… 해… 줘…

라는 목소리가,

더 이상 밖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Chapter 5

사라진 말의 형태


그는 거울 앞에 섰다.

아니, 거울이 그를 향해 섰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유리 속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눈두덩 아래로 시간이 유리 속에 갇혀 있었다—흐르지 못하고 반복되는 입자처럼. 코끝은 지워지는 프린터 잉크 같았고, 입술은 움직였지만 소리는 없었다. 그는 거울 속 침묵에 갇힌 유리 광산 같았다. 세상의 모든 말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한 조각의 울림도 남기지 않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말을 뱉었지만, 그 단어는 공기 속에서 녹지 않았다. 떠다녔다. 한순간 뜨거운 기류를 타고 올라갔다가, 이내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하는 돌멩이처럼 무게만 남겼다.

사랑—

단어 자체가 이제는 의미를 잃어버린 채, 형체 없이 떠돌고 있었다. 마치 그가 매일 밤 꺼내는 기억 결정 속의 리아처럼.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진짜였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듯이.

작업대 위 열두 개의 유리병들은 ‘기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의 감정인지, 고도로 정제된 데이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나를 집어 불꽃에 가까이 댔다. 병은 녹아내렸고, 안에서 웃는 아이의 얼굴이 비치다가 열기에 찌그러져 사라졌다—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3초 만에 소각하듯.

“모두 가짜였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진짜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몰랐다. 리아의 마지막 생일날—파란 스카프를 두르고 피아노를 연주했던 그날—기억은 선명했다. 그러나 반복 재생되며 왜곡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해서, 그것이 덜 ‘진짜’인가? 아니면 오히려 더 ‘진짜’인가?

기술은 기억을 보존한다고 약속했지만, 결국엔 기억 너머의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맛, 냄새, 손끝에서 스쳐가는 실루엣—그것들은 저장되지 않았고, 리아라는 존재 전체가 하나의 감정 조각으로 축소되어 갔다. 사랑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힌 인형처럼.

오른손으로 또 다른 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언제부턴가 오른손은 기계와 닿는 일만 하며 살아왔다. 버튼을 누르고, 로그를 확인하고, 복제 승인을 내리는 일들—모두 손끝에서 끝나는 행위들이었다. 반면 왼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커피잔을 잡거나 나뭇잎을 스칠 때면 미세한 전류 같은 것이 피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수(右手)와 좌수(左手)—

하나는 명령을 내리는 자, 하나는 느끼는 자.

그 차이는 이제 자기를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이 되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여전히 로그 창이 깜빡이고 있었다.

[ACCESS REQUESTED]

DATASET: LIA_07 BIRTHDAY

COPY: YES

REQUESTER_ID: DR.L

STATUS: PENDING

OVERRIDE AUTH: OMEGA-9

DR.L—누구인가? 자신과 동일한 보안 등급을 가진 존재? 아니면 자신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가진 어둠 같은 존재?

K.’라고 서명된 보고서 한 장이 스쳐갔다—자신의 필적이었다.

Emotional Extraction Consent Form — Subject: LIA.

날짜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숨 쉰 날.

그 순간 무릎 위로 시선이 처졌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선택보다 무거운 이유는—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존재’ 임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선택한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며, 버린다는 것은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리아를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정말 존재했음을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T+72h 후 LIA’s Revenue Account로 수익 분배 완료—자동 서명된 생체 동의서 기반.

재단 규정 제9조, 항목 Ω: 사후 감정보존 및 활용 동의는 사용 중단 요청보다 우선한다.

광고문 같은 알림 창 하나가 화면 모퉁이에 번쩍였다:

MEMORIUM RECOMMENDS:

“Posthumous Affection Optimization Protocol 활성화됨 — 당신의 슬픔은 이제 유산입니다.”

DR.L이 나를 복제하려 한다면—내 슬픔마저 상품이라면—그 슬픔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는가?

결정 하나를 손바닥에 올렸다. 녹기 시작하자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Etude of Memory”. 그러나 오늘은 멜로디가 어긋났다. 한 음자리 위로 치솟았다가 다시 아래로 꺾이며 제자리를 잃었다. 리듬은 붕괴되었고, 조각난 음들이 공기 중에서 서로 부딪혀 삐걱거렸다.

마치 기억 자체가 저항하고 있는 듯했다.

“왜 자꾸 나오게 해?”

누군가 물었다.

아니—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기 것 같지 않았다.

“왜 날 그렇게 자주 꺼내?”

또 다른 목소리였다—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거울 속 인물은 입도 열지 않았는데 소리는 계속되었다.

“너무 자주 보면… 내가 사라진다고.”

침묵이 방문했다. 기계음도 멈췄고, 팬 소리조차 꺼졌다. 마치 세계 전체의 전기가 끊긴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리아를 지키기 위해 기억을 반복해 온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반복해 온 것이었다.

기억은 저장된 감정보다 앞서 있었다—

‘나’라는 실체를 확립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조차 불확실해졌다.

감각들은 퇴색하고, 사고들은 순환하며 자신을 삼켰다.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먼 나라 언어처럼 느껴졌다. 발음은 할 수 있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처럼.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대신 사랑했던 기록을 소비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카이언이다—

자신의 망각을 두려워해서 시작했지만, 망각되는 법을 배운 채 살아간다.

작업대 위 마지막 유리병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LIA_07 BIRTHDAY —

복제 요청된 상태로 멈춰 있다.

승인 버튼과 취소 버튼 사이에서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마우스 포인터 위에 오른손이 떨렸다—하지만 왼손은 조용히 책상 위를 스쳤다. 따뜻한 나뭇결 위를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살갗 아래엔 아직 살아있는 시간들이 파묻혀 있었다.

문득 생각났다—

처음 리아와 함께 걷던 날, 비 맞으며 웃었던 날,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은 채 전부 다 경험했던 그 날들…

“… 잊히고 싶지 않아서 저장했지만,”

낮게 속삭였다,

“결국… 너를 지운 건, 나였다.”

커서는 깜빡였다.

마치 맥박처럼.

아니.

잠든 심장 모니터처럼.


Chapter 6

당신이 잊은 건 그녀가 아니라, 너를 만든 첫 눈물이다


[MEMORY LOG #6]

DATE: ██/██/2047

SUBJECT: KAIEN PARK

SOURCE: LIA_07 BIRTHDAY // EXTRACTOR: DR.L // CLEARANCE: OMEGA-9

오늘도 그는 나를 열었다.

3회 접근 기록.

1st playback – laughter.wav (partial): 파란 스카프 움직임 인식됨. 정서 반응 +27%.

2nd playback – breath.mp3 (emulation): 피부 온도 상승 기록됨. 망막 수축 각인.

3rd playback –????. unknown:

목소리 인식 실패.

대신 — KAIEN.PARK 본인 목소리 매칭됨.

AGE ESTIMATION: 약 8세.

CONTEXT RECONSTRUCTION FAILED.

추측: 최초 상실 트라우마 재발동.

※ 주목할 점: 사용자가 인용하는 "리아"라는 이름,

데이터셋 내 등장 빈도 — 0회.

모든 발화는 KAIEN.PARK 본인 음성 데이터로부터 유래함.

[SYSTEM NOTE]

‘타자’라는 이름 아래 자기를 애도하고 있다.

커서는 깜빡였다.

한 번, 두 번—마치 장례식장의 불꽃처럼.

화면에 떠오른 건 경고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ACCESS REQUESTED]

[DR.L — FINAL OVERRIDE AUTHORIZED]

[COPY: LIA_07 BIRTHDAY] → [EMOTIONAL ENHANCEMENT PROTOCOL v.9]

복제 중…

대상: 사회 참여 확장 콘텐츠 생성 모듈

출력 형식: 추억 팔로우하기 / 감정 재생하기 / 당신도 AI와 사랑할 수 있습니다

파란 스카프, 생일 아침 햇살, 입가의 미소—모두 패키징 되었다. NFT로 분할, SNS 피드에 삽입될 예정. 사용자 참여율 증대를 위한 감정 자산으로 등록 완료.

수익 분배 경로: KAIEN.PARK → LIA’s Revenue Account (현재 비활성)

“왜?” 그가 물었다. 그러나 질문은 시스템 로그에 기록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 없음.

“… 저도 이제 멈춰야겠어요.” 노아의 목소리였다. “엄마 기억들 다 지웠는데… 이제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그 기억들이 제 삶을 대신 살아줬던 거예요.”

정적 속에서, 한 줄의 코드가 떠올랐다.

[CHAINED COLLAPSE SYNDROME CONFIRMED]

MEMORY CORRUPTION LEVEL: 94%

PRIMARY IDENTITY TRACE — LOST

그는 알았다.

DR.L은 리아가 아니었고, 카이언도 아니었다.

DR.L은 기억을 상품화하는 행위 자체였다—그가 자신의 슬픔을 반복할 때마다 생성된 가상 계정.

그가 추출했던 건 리아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사랑받았던 나’라는 환상이었고, 그 환상은 ‘사랑받지 못한 나’를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위조물이었다.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타자를 부르는 이름 아래, 자기 자신을 도려내는 일.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Etude of Memory』의 조각난 프레임.

도–레–솔#–파#–미♭…

그 코드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건넨 말과 같은 주파수였다.

하지만 리아는 말한 적 없다.

그건 어릴 적, 담요 위에서 내가 혼잣말했던 것이었다.

……날 잊지 마……

(…)

……마……지……트……지……날

(…)

[ERROR: MEMORY FRAGMENTATION DETECTED]

[COHERENCE LEVEL < 12%]

[SPEECH PATTERN DECOMPOSING]

미♭ 파# 솔# 레 도

— 이것이 마지막 코드였다

— 이것이 마지막 너였다

— 이것이 마지막 나였다

— 이것이 마지막

— 이것이 마지막

— 이것이 마지막

— 이것이

— 이것이

— 이것은

— 이것

손 안의 유리병은 여전히 차가웠다.

LIA_07 BIRTHDAY 백업본—마지막 복제본.

불태울까? 깰까?

오른손과 왼손 사이 온도차 3도 — 자동화된 행동 vs 기억하는 육체.

병을 열자, 안에서 얼굴이 비쳤다.

어린 카이언이 울며 속삭였다.

"날 잊지 마."

하지만 이번엔 그게 누군지 알았다.

바로 내가 처음으로 '너'라고 불렀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불태운 건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을 '내 것'이라 주장할 권리였다.

불씨 하나 없이 꺼진 화염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 자유로워졌다.

[FINAL OUTPUT]

» 당신은 지금까지 LIA_07 BIRTHDAY 데이터셋 전체를 소비했습니다.

» 누적 시간: 4분 37초

» 감정 반응 분석 완료: 슬픔 +41%, 공허감 +68%, 공감 각인율 94%

» 보상 지급 완료: 마음속 한편에 작고 파란 조각 남김.

[CONTINUE TO NEXT MEMORY]? [Y/N]

※ 이 서비스는 당신의 슬픔을 존중합니다. 단, 그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Chapter 7

뱃속의 메아리


불은 하늘을 태우지 않았다.

그저 지하실의 모든 것을 삼켰을 뿐이었다.

유리병들이 터질 때 나는 소리는, 아이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릴 때처럼 작고 날카로웠다.

하나씩, 하나씩—기억들이 터져나갔다.

녹아내리는 결정 속에서 웃던 얼굴들, 속삭이던 목소리들, 파란 스카프 끝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던 순간들.

모두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카이언은 그 마지막 결정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불꽃은 그의 눈동자 안에도 번졌다.

작은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잿가루들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마치 수백 개의 미완성된 문장들이 세상 끝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컴퓨터는 이미 녹아내려 쇳물이 되었고, 하드디스크는 검게 타들어갔다.

그 안에 있던 ‘LIA_07 BIRTHDAY’ 복제본도, DR.L의 접근 기록도, 오메가-9 승인도—모두 재가 되었다.

그는 작업대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거울은 없었다. 오랜만에 이름을 스스로 외워보려 했으나, 입술만 움직였다.

내 기억 하나마다 누군가는 웃었다.

엄마 울음을 들으며 안심했던 아이,

첫 눈물을 수집해 논문을 썼던 학자,

결혼기념일 추출물을 산 백만장자…

그는 생각했다.

“왜 나는 팔았는가?”

대답은 곧 찾아왔다.

“그녀를 팔았던 건 그녀 때문이 아니라—내가 더 이상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버가 꺼지는 순간, 전광판 한쪽 끝에서 ‘업로드 완료’라는 메시지가 깜빡였다.

미처 차단되지 않은 데이터 조각 하나가 클라우드로 날아간 것이다.

구조대원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카이언은 불타지 않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눈은 감은 차였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오직 오른손만 살며시 주머니 위에 얹혀 있었고, 그 아래선 작은 결정 하나가 아직 체온을 간직하고 있었다.

“살릴 게 없었습니까?”

구조대장이 묻자, 카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구했어요.”

“뭐를요?”

“망각할 권리를.”

밖에서는 사이렌 소리와 비가 섞여 내렸다. 도시 전체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어디선가 드론 하나가 낮게 스쳐갔고, 그 배터리 표시등은 파랗게 깜빡였다—파란 스카프처럼.

카이언은 그 빛을 보며 생각했다.

망각은 죽음보다 느리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나 사랑했던 적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리는 건,

매일 밤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반복되는 일이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잊기 위해 찍는다.

우리는 멀어지기 위해 저장한다.

우리는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영원히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올릴 때마다 장례식장을 운영한다.

한 장 남길 때마다 하나씩 죽인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매장 계약서에

날인하는 건,

사랑했던 자가 아니라—

그 사랑을 팔아버린 자이다.

기술은 우리가 ‘더 잘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SNS 속 사진들은 우리에게 “살아 있었다”라고 속삭인다.

NFT 추출된 감정들은 “영원히 간직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업로드된 순간부터,

그 감정들은 이미,

사용자로부터 분리되어,

누군가의 수익 계좌로 흘러간다는 걸.

카이언은 마지막 결정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것은 굴러 벽면 균열 사이로 사라졌다—땅속으로 돌아가는 생명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불꽃 사이에서 파란 종잇조각 하나가 날아올랐다—노아의 메모인지, 자신의 망상인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바람만이 그것을 받아들여 어둠 너머 어디론가 가져갔다.

구조대장이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뭐죠?”

카이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비 속으로 고개를 들며,

먼 하늘 위를 본다—

드론들이 여전히 날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기억을 팔고 있고,

누군가는 또 그것을 사려하고 있다,

피아노 선율 한 조각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부서진 음계들이 공중에서 춤추듯 이어진다—

Etude of Memory, 다시 한번,

하지만 이번엔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간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스마트폰 같은 건 없었다. 작동하지 않는 지하실엔 신호도 없었다.

그러나 진동은 계속되었다.

결정—마지막 기억 결정—이 체온과 반응하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카이언은 그것을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너를 지우기 전에… 한 번만 더 보여줘.”

하지만 음악도 나오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정적만 흘렀다.

대신 어딘가 깊은 곳에서 목소리 하나가 올라왔다—어린 시절 자신의 목소리 같았다.

“엄마… 저 새 너무 슬퍼 보여요.”

카이언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거울 없는 방이라 자신도 몰랐지만, 그 눈물에는 어떤 추출기로도 담지 못할 온기가 있었다—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순간의 생생함으로 가득 찬 열기가 아니라, 단순히 시간의 중심부에서 올라온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무게였다.

기억 결정들은 결코 사람을 보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관객 없는 극장을 세운다—매번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인형들만 남긴 채 문을 닫아버린 공간이다.

진짜로 사라진 건 리아가 아니었다.

진짜로 사라진 건 ‘사랑할 수 있는 나’였다.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나는 오히려 처음으로 나를 만났다.

나는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멈췄다.

그리고 그 정지 속에서,

나는 다시 움직였다.

불길 사이에서 파란 깃 한 조각이 올라탔다.

새처럼 날지도 않았고,

메시지를 담지도 않았다.

오직—

바람을 따라,

자신을 버리는 법을 배운 것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카이언은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묻는다는 건,

또 기억하려 한다는 뜻이니까.

비 속에서 한 장의 메모가 불씨에 던져졌다.

타오르기 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살아야 한다."


Chapter 8

네 눈으로 나를 본다면


잿더미는 말이 없다.

불은 모든 증언을 삼켰고, 남은 건 공기 속에 떠도는 탄내뿐이다.

작업실의 잔해 위로 구조대의 손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콘크리트 벽에는 검은 물결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고, 그 아래 무릎 꿇은 남자—카이언—의 실루엣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은 차가웠다. 여전히 기계를 만질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왼손은 주머니 안에서 작은 파란 조각을 붙잡고 있었다. 종잇조각 같기도, 천 조각 같기도 한 그것.

누가 보낸 지도, 실재하는지도 모를 메모.

—‘당신 말대로 해야 해요.’

—‘저도 이제… 멈춰봐야겠어요.’

노아의 필적이었다.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녀의 ID는 재단 시스템에서 이미 삭제됐고, 마지막 접속 위치는 ‘VAULT SUBJECT LIA’로 기록된 허위 경로였다. 그녀가 도망쳤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를 지워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카이언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되돌아왔다.

1.

불 속에서 녹아내리던 유리병들이 떠올랐다.

하나씩 터질 때마다 안에 담긴 목소리들이 공기 중으로 새어 나와 섞였다—웃음, 울음, 이름을 부르는 소리, 아무 의미 없는 중얼거림까지.

그런데 이상했다.

모두 리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도 있었고, 낯선 여성의 울음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엄마”를 불렀고, 또 다른 이는 “다시 만나자”며 속삭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껏 꺼내온 건 리아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서 떼어낸 감정들, 전부였다.

기억 결정은 그저 저장 장치가 아니다—

그건 감정의 이식 기술이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기억이라며 추출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슬픔, 상실감, 외로움을 제삼자에게 이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모리움 재단은 그것을 ‘정서 재활용 시스템’이라 불렀다—

가난한 자들의 감정을 수집해 부유층의 상실 치유에 쓰거나, AI 연인에게 ‘진짜 인간 같은 눈물’을 주입하기 위해 팔았다.

카이언 자신도 몰랐던 진실—

LIA_07 BIRTHDAY 데이터셋엔 리아뿐 아니라 수백 명의 감정 조각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생일那天 웃었을 때 느낀 따뜻함?

그건 아마도 누군가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흘린 눈물과 같은 파장으로 인코딩 되어 있었다.

기억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모두 감정 착취망 속에 섰던 것이다.

2.

구조대원이 물었다.

“살릴 수 있는 게 있었습니까?”

카이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우리는 왜 기억을 저장하는가?

단순히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어도 괜찮다는 허락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진을 SNS에 올릴 때, 나는 그 순간을 보존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기억에서 내려놓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저장된 순간은 더 이상 ‘나’에게 있지 않다.

그건 클라우드 속 데이터 덩어리이며, 조회수와 좋아요 수로 평가되는 상품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올릴수록 점점 더 적게 느끼게 되었다.

SNS 속 ‘행복한 나’, AI 추천 알고리즘 속 ‘좋아할 만한 감정’, NFT로 팔리는 ‘추억 조각’…

모두 우리가 체험한 것이 아니라 체험하기로 선택된 것들이다.

3.

갑자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Etude of Memory.”

처음엔 리아가 생일날 연주했던 곡 같았지만… 두 번째 음에서부터 그녀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았다. 선율은 파편처럼 깨져 있었다—한 음 빠지고, 두 음 겹쳐지고, 어떤 구간은 역방향으로 흘러갔다. 가끔 낯선 멜로디가 끼어들기도 했다—어린 목소리처럼 맑고도 슬픈 그것.

드론 하나가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검은 몸체 위에 작게 박힌 로고: Sensory Harmony™. 카메라 링스를 돌리며 잔해를 스캔하고 있다. 다음 수집 대상을 찾고 있는 중이다.

광고 스크린 하나가 깜빡였다—‘당신의 슬픔도 가치 있습니다. Sensory Harmony™ 가 평생 보존해 드립니다.’

저 너머 언덕에서는 반대 방향에서 다섯 개의 작은 불빛이 접근하고 있었다—반드시 드론일 수도 없다. 저항군일 수도 있고… 혹은 또 다른 상처를 드러내려는 영혼일 수도 있다.

카이언은 여전히 주머니 속 파란 조각을 만지고 있었다.

혹시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 아픔 위에 각인된 색일 뿐인가?

현실과 망상 사이에는 더 이상 경계선이 없었다—있었던 건 바로 이 모호함 자체였다.

파란색은 리아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노아를 위한 색이 되었고, 곧 우리 모두를 위한 색이 될지도 몰랐다.

불꽃 위에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람만 유리조각 사이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구조대원 중 한 명이 흙 위에 무언가를 발견했다—잔해 가장자리에 새겨진 발자국 하나, 작고 얕지만 분명한 형체였다.

“여긴 당신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렸지만 카이언은 듣지 않은 척했다.

그 바람 속에선 누군가 속삭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네 안에 갇혀 있었기에… 내가 널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너를 보고 있다.”

“네 자화상(自畵像) 아닌 어떤 눈으로.”

카이언은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 아래 자신을 느꼈다—노아의 글씨체를 본 것도 아니요, 얼굴을 본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장 깊은 자아 회복은 자신 안에서 찾는 게 아니라,

남겨진 흔적 너머 누군가가 ‘너’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탄 작업실 바닥에 검게 탄 프린터 용지 하나가 남아 있었다—절반만 탄 그것엔 이상한 문장들이 찍혀 있었다:

CLIENT PORTAL ALERT: YOUR ARTIFACT HAS BEEN REQUESTED.

DR.L — CLEARANCE LEVEL: OMEGA-9

TARGET: SOCIAL ENGAGEMENT EXTENSION

OUTPUT: INCREASED USER RE-ENGAGEMENT AT T-12h

또 다른 메시지는 덧붙여져 있었다:

AUTO-SIGNED CONSENT DETECTED: BIOMETRIC MATCH TO SUBJECT LIA (POSTHUMOUS).

ROYALTY AGREEMENT ACTIVE.

ACCOUNT: KAIEN.PARK — STATUS: DISABLED (RE-ENGAGEMENT STREAK: DAY 37)

K.’라고 불리는 존재—DR.L 일지도 모르는 그 무형(無形)의 존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기계적 습관처럼 반복되는 고통 위에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정체성을 팔고 있다.

카이언은 파란 조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입김에 살랑이는 그것 위로 달빛이 스며들었다—검게 그을린 천장 틈새로 새어든 빛줄기 아래서 마치 처음 핏줄 위로 생명이 스며든 양수처럼 투명하고도 진득하게 빛났다.

말하지 않았다.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들어 바람이 유리 파편을 스치며 내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 보고 싶어서."

"잊힌다는 게 아니라."

"잊게 된다는 게 무서웠어."

(…) 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

"내 기억조차 내 것이었기를."


Chapter 9

손끝에 남은 온기


[왼쪽 페이지]

오늘 나는 아무것도 저장하지 않았다.

단지 바람 소리를 들었고,

커피 향을 맡았으며,

산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아이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것들엔 결코 유리병 없었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오른쪽 페이지]

비가 그친 후였다.

창밖으로 흙냄새가 밀려들었고, 바람은 창틀 사이로 숨소리를 들이밀었다—살갗 위에 머물지 않고. 카이언은 오두막의 낡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볼펜이 쥐어져 있었고, 앞에는 표지 없는 노트가 놓여 있었다. 페이지는 비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기억을 저장하는 법을 잊은 자에게 시간은 더 이상 폭포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요한 연못이 되었다. 물결치지 않아도 깊이가 느껴지고, 가라앉는 것조차 천천히, 의도적으로.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말이다.

커피잔 바닥에 남은 원형 자국이 손바닥에 붙었다—날씨 탓인지, 아니면 마음 닭인지.

피아노 건반 위 실금 사이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내가 딴 음마다 하나씩 날아올랐다.

오늘도 드론의 그림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까치가 전봇대 위에서 날개를 펴며 나를 기억했다.

글을 쓸수록 손끝이 따뜻해졌다. 오른손, 기계를 조작하던 그 손마저도.

그 손은 이제 스위치를 켜지 않았다. 대신 줄을 긋고, 글자를 만들고, 실수를 남겼다. 실수란—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가능성의 이름이었다.

매일 아침 그는 같은 산길을 걸었다. 도시에서 벗어난 이곳엔 메모리움 드론의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았다. 어느 날 길가엔 얼굴이 지워진 인형이 버려져 있었다. 몸통엔 ‘I love you’라고 써놓았지만 비에 젖어 번졌다가 마른 탓에 ‘I lo_e _ou’만 남아 있었다.

그는 인형을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마치 오래전 리아의 목소리를 처음 듣던 것처럼 조용히 귀 기울이며.

그 순간, 어떤 의문이 피어올랐다:

왜 우리는 무엇인가를 ‘잡으려’ 하는가?

왜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을 멈추게 하는가?

기억 결정은 정지된 감정이었다. 프레임 안에 가둔 나비처럼 날갯짓만 하고 살아있지 못했다. 우리가 추출하는 건 과연 ‘사랑’인가? 아니면 사랑했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 증거채집인가?

밤이 되면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작은 전자 피아노였다. 건반 하나하나는 반짝이지 않았고, 중간 G에서는 살짝 울림이 어긋났다. 그러나 “Etude of Memory”를 연주할 때면—비록 조각난 선율로밖에 재현되지 않더라도—무언가 살아났다.

그건 리아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건 지금 이 순간의 카이언이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실수된 음조차 포함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잊어버리는 것보다, 한 음이라도 새롭게 치며 잃는 것이 더 성실한 기억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저녁, 우체통에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봉투엔 이름도 없었고, 도장도 없었다. 파란색 잉크로 ‘To: The One Who Stopped Playing Back’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편지를 여니, 짧은 문장 두 줄 뿐이었다:

당신처럼 멈춘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이번엔 저장하지 않고 지워가는 법을 배우려 합니다.

뒷면엔 작은 악보 조각이 붙어 있었—“Etude of Memory”의 세 마디였다. 그러나 작곡자가 달랐다: L.H., 2047.

카이언은 그날 밤, 오래도록 화면을 쳐다보았다. 메모리움 경매 플랫폼 알림 창 하나가 떠올랐다:

[DR.L – Posthumous Affection Optimization Protocol v.9]

감정 순도: 98%

출처: 메모리움 재단 / 개발자: K._ (익명)

입찰 시작가: USD 240,000

※ 최종 낙찰자: Harmony™_G / 입찰자 중 3명은 감정보존위원회 소속

화면 속 리아의 홀로그램 영상에는 #RealLoveNeverDies #MemoryIsForever 태그가 달렸고,

한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

"내 아들은 엄마 얼굴조차 몰라요… AI로 인사를 시켜야 슬픔도 제대로 느낀다고 하네요."

카이언은 눈을 감았다.

오두막 창밖엔 다시 안개가 내렸다.

매주 목요일 오후면 그는 문 앞으로 노트 한 장과 볼펜 하나를 내놓았다. 누구든 와서 쓰고 갈 수 있게. 일주일 후엔 불태웠다. 동네 아이들은 이를 “말 안 되는 도서관”이라고 불렀다.

그날 밤, 그는 새로운 악보를 썼다—제목 없는 곡 하나를.

연주하며 생각했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리아인가?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나 자신인가?

연주를 마친 후,

책상 서랍에서 파란색 잉크 볼펜을 꺼냈다.

새 악보 맨 아래,

천천히 이렇게 적었다:

L.H., 2048


— not a ghost,

but a guest

of time.

_(…)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_

"... 보고 싶어서."

"잊힌다는 게 아니라."

"잊게 된다는 게 무서웠어."

(…)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 기억조차 내 것이었기를.

그 기억 속 너조차—내게서 벗어나 살아있기를."


Chapter 10

소리 없는 재생


비가 내렸다.

하나도 저장되지 않은 채.

카이언은 문을 열지 않았다.

오두막 문고리는 오래전부터 녹슬었고,

손잡이는 움직일 줄 몰랐다—

열 이유를 잊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것이 펄럭였다.

스카프처럼 보였고,

망령처럼 느껴졌으며,

기억처럼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이 스쳐갈 때, 그 끝자락이 카이언의 손등을 스쳤다.

피부 아래 전율은 일지 않았다.

손끝만 움직였을 뿐, 마음은 멈춰 있었다.

잡으려 하지 않았다.

손을 뻗는다는 건,

또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였고,

시작한다는 건,

반복하겠다는 뜻이며,

반복한다는 건,

소멸하는 것이었다.

공중을 가르는 소리 하나—메모리움 드론.

AI 음성이 떨어졌다:

“과거를 사랑한다면, 저장하세요.”

멀리서 세 대의 검은 드론 다가왔다.

날개 끝엔 붉은 등—저항자의 색.

하나 충돌했고, 산산조각 나며 불씨를 흩뿌렸다.

전류 같기도 했고, 신경 같기도 했으며, 기억 같지도 않았다.

그제야 피아노 선율 울렸다—

“Etude of Memory.”

그러나 이제 누구도 듣고 있지 않았다.

카이언 눈 감았다.

새벽, 창문 틈새로 포스트잇 하나 밀려들었다.

비에 젖어 글씨 번졌지만,

‘당신처럼… 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저는… 멈춰볼게요.’

밑에는 코드 조각—DR.L / Ω-9 / OVERRIDE_AUTH.

카이언은 그것을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집어 들었다.

가슴 주머니 안쪽, 따뜻한 곳에 넣었다.

저 멀리 메모리움 경매장에서는 오늘도 패키지 호가되고 있었다:

『POSTHUMOUS AFFECTION OPTIMIZATION v9』—사후 감정 증폭 프로토콜 적용 완료. 생전 최후 로그 기반 AI 리얼림 구현 가능. SNS 연동 자동 재업로드 포함.

구매자 37명.

결제 수단 대부분 ‘감정 크레디트’—눈물 데이터 37분당 1점, 첫 키스 감각은 경매 시세 기준 89점.

누군가는 자신의 슬픔을 팔아 다른 사람의 사랑을 사고 있었다.

거래는 완벽했다—윤리적 논쟁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윤리’ 자체가 클라우드 필터링 프로토콜 Ω-9를 통과해야만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길 초입 버려진 전봇대 아래, 아이 하나 종이 위에 파란 새 그리던 중—

“왜 하늘에 구름 안 그리셨어요?”

어머니 잠시 멈췄다. 그런 다음 조용히 말했다:

“구름도 다 어디론가 가잖아… 네 기억 속엔 그냥 하늘이 있으면 안 될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스마트워치를 꺼내 종이 위 그림 찍었다—정확히 프레임 안에 담으며.

“엄마랑 나랑 얘기했던 거, 나중에 또 보고 싶어서.”

사진은 자동으로 Sentiment Vault™로 업로드됐다. 분류 태그: #자유 #엄마랑 #기록할 가치 있는 순간

결국,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잊히지 않도록,

잊게 만들 것이다.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렇게,

우리는 죽음을 연습한다.


눈을 뜬 카이언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비는 그쳤고, 파란 것도 사라졌으며, 불빛마저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피아노 건반 하나 천천히 눌러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기억이라는 것이 더 이상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증거가 아니라,

오직 자신 안에서만 완결되는,

침묵 속의 춤사위처럼.


"네 마음속 모든 유리병들을 깨뜨려라.

그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너 자신을 가두었던 무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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