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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scist Oct 29. 2023

의대 광풍: 그 구조와 내면성에 관하여

'헬조선'을 읽는 문화-코드


'모든 길은 의대로 통한다.’ 입시, 취업, 나아가 인간을 평가하는 모든 잣대가 ‘의대’ 혹은 ‘의대 진학’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의대 쏠림’ 현상은 매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두 종류의 인간만 존재한다: 의사와 환자. 교육, 입시, 결혼, 육아, 부부 관계(육체적인 것만이 아닌) 등등 모든 것을 의사에게 물어 본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국인 모두는 잠재적 환자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치료할 의사/의사 지망생으로 분류된다.


이와 같은 ‘의대 쏠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꾸준히 존재해 왔다. 당연하다. 특정한 직업군으로 한 사회의 비/물질적 가치가 쏠리는 현상을 결코 건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그저 ‘혀를 차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데 ‘의대 쏠림’ 현상은 그저 혀를 차는 정도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조선의 망국을 초래한 ‘가치 일원화’ 현상과 같은 종류의 징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우리는 이 현상을 주체 외적인 차원과 주체 내적인 차원 모두에서 좀 더 정밀하게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는 크게 물질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원 중 어느 한쪽이 극단화된 사회를 ‘경제적 사회’와 ‘종교적 사회’로 명명할 수 있다. ‘경제적 사회’는 말 그대로 모든 가치가 ‘물질적 차원’, 쉽게 말해 ‘돈’에 의해 재단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물질 일변도 사회의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2023년,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의 한국’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경제적 사회’다.


흥미롭게도(혹은 안타깝게도) ‘종교적 사회’, 즉 사회의 모든 가치를 신념 혹은 정신적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사회 역시 한반도에 존재했었다. 국가의 보존보다 ‘성리학의 존엄성’이 더 중요했던 조선이야말로 ‘종교적 사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조선의 경우, 종교적 수준에 육박했던 ‘성리학 숭배’가 ‘경제적 이익’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측면에서 위선적인 사례(즉 종교적 사회라는 탈을 쓴 경제적 사회)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경제적 사회’와 ‘종교적 사회’의 중간 지점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균형은 결국 물질적 차원에서 설정된 가치 체계와 정신적 차원에서 설정된 가치 체계가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적 다양성과 재화의 분배라는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사회라는 공간 속에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그렇게 공존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체계에 의해 재화가 생산/분배되는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의 다양성과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재화의 분배 구조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때문에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한 구조 외적 노력, 즉 내면 혹은 의지의 창출이 필요하다. 다양한 가치가 공존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러한 가치에 의미를 부여해 재화를 투여하고 그것을 통해 새롭고도 다양한 가치가 재창출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치의 다양성과 그로부터 재화가 창출되는 선순환 구조는 그것을 만들어 내려는 주체 내면의 의지와 노력, 나아가 용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도에서 ‘의대 쏠림’ 현상은 어떻게 해석되는 것일까?


‘의대 쏠림’ 현상은 당연하게도 ‘경제 위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야말로 ‘경제적 사회’의 전형인 한국에서 언제부턴가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시작했다. 시장이 위축되고 고용도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냉전 시기부터 ‘한국의 국시’였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멈춰 버린 것이다.


앞서 ‘2023년의 한국’을 ‘경제적 사회’의 전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한국이 ‘경제적 사회’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1997년 ‘IMF 위기’ 당시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처럼, 한국 사회는 성장이 멈춰서자 ‘경제 성장의 신화’를 썼던 박정희를 다시 불러 들였다. 당시 한국 사회는 ‘국가 부도’라는 초유의 위기를 마주해, 경제 성장 일변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보다는, 빠른 속도로 ‘경제 위기’를 탈출해 다시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한 번 그 효험를 봤던’ 박정희라는 효과 빠른 처방약을 원했던 것이다.


‘빠른 경제 회복’에 대한 조급증은 이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두 명의 인물로 체현되었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의 딸’로서 박정희 신화를 그대로 반복해줄 것이라는, 봉건적 혈통론에 가까운 심리를 보여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과 박근혜는 ‘경제 성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욕망 충족의 원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대기업 고속 승진 신화’ 이명박의 대규모 토목 공사는 총체적인 경제 성장을 견인하지 못했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창조 경제’라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구호만을 반복하다 탄핵되어 버렸다.


IMF 위기에서 시작해 박근혜의 당선과 탄핵으로 그 끝에 이른 일련의 과정은 결국 ‘박정희 모델’의 끈질긴 생명력이 그 효력을 다해가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박정희 시절과 같이 국가가 주도하는 대규모의 경제 성장은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초인적인 대통령이 나타나 국민을 이끌고 ‘돌격 앞으로’를 외칠 수 있는 시절은 올 수도 없고 와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가 한국인의 DNA에 심어 놓은 유전자, 즉 부와 안락함의 추구라는 유전자는 그대로 남았다.


총체적 경제 발전이 불가능한 시대를 마주한 상태에서, 입시 혹은 위계적 학벌 구조에 새겨진 부와 안락함이라는 DNA를 주입 받은 한국의 중산층들, 혹은 좀 더 정밀한 계급적 관점에서 말해본다면, 쁘띠 부르주아들은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그래도 여전히 밑천은 남아 있었다. 박정희 시대가 남겨 놓은 고도 성장의 잔여물(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동산이다)들은 이제 신분 상승/유지를 위한 ‘최후의 판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총체적인 경제 발전이 불가능해진(혹은 그러한 것으로 확인된) 구조 속에서 주체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고도 성장의 잔여물을 밑천으로 삼아 다시 한 번 ‘부와 안락함’의 추구를 위한 도박판에 나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물질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양대 축이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의 관계 방식은 구조적 차원과 내면적 차원 모두에서 결정된다. 한국 사회는  물질적 차원이 정신적 차원을 압도해온 사회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물질적 차원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물질적 차원을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그것을 추구/충족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물질적 차원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는 구조가 확인되자, 한국인은 내면적 차원에서 그러한 구조의 성격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자원(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고도 성장 시대의 잔여물)을 활용해 물질적 차원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러한 내면성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한국에서의 의대 진학이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부와 안락함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정리될 수 없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물론 의대 진학은 어느 면으로 보나 부와 안락함을 동시에 제공해 주는 선택지다. 물질적 만족감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명성까지 보장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광풍에 가까운 - 상당 수준의 연봉을 받는 대기업 직장인마저 직장을 포기하고 덤벼들 정도의 - 의대 진학 열풍을 설명하지 못한다.


실상 의대 진학을 광풍으로 만든 밑바닥 심리는 바로  ‘사회적 풍파를 겪지 않겠다’는 나태함과 나약함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의학은 ‘학교만 곱게 다니면’ 타전공에 비해 별다른 도전과 좌절을 겪지 않아도 마치 온실 속의 난초처럼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전공이다. 특정 기간(인턴 정도)을 지나 개업을 하면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거래처에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다. 또한 취업이 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의국’ 안에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만 충실히 수행해내면 부와 안락이라는 확실한 미래 그리고 덤으로 명예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처럼 달콤한 선택지를 거부한다는 말인가?


과거 공대생에게는 ‘산업 역군’,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명예로운 호칭이 따라 붙었다. 한데 이제 그러한 호칭은 조소의 대상이 되었고, 실제로도 산업화와 근대화는 철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나/개인’의 자원 - 그것이 물려 받은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 을 동원한 부와 안락함의 추구다. 이제 국가, 조국, 근대화 따위의 대의는 필요 없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개인’의 부와 안락함이다!! 바로 이것이 2023년 한국인의 내면성의 구조다.


혹자는 부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죄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의대 광풍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유/무죄를 따져 묻는 수준에서 논의할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문화적 무/의식의 차원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우리 사회는 과연 부와 안락함(특히 부) 이외의 가치, 사명감, 용기, 도전과 같은 내면성과 관련된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부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대신 사명감과 용기, 도전 정신을 갖춘 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거나, 심지어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의대 광풍은 한국 사회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조선을 생각해 보라. 조선 사회는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를 만들어 냈고, 그러한 일차원적 구조에 근간해  재화를 분배했다. 그 결과 사회는 고사 상태에 이르렀으며, 극도로 협소한 범위의 가치 체계(특정하게 해석된 성리학 체계와 그것에 근거한 과거 급제)에서만 재화가 생산되었다. 기술자, 농부 그리고 의원(!)와 같은 기능인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기술, 농업, 의학과 같은 사회 근간 산업이 붕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익히 알고 있듯이, 망국이었다.


조선의 이와 같은 망국의 과정 역시 구조와 내면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조선 사회는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구조에 포함되지 않는 여타의 가치는 모두 배척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구조를 혁파하는 대신, 어떻게 해서든(족보를 사든, 매관매직을 하든) 그 구조에 매달려 한 푼의 재화라도 더 취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조선시대가 오직 정신적인 가치만을 추구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오직 물질/육체적인 가치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전자의 반편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체적인 구조는 너무도 유사하다. 박정희 시대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한 모종의 구조는 이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가 남겨 놓은 부와 안락함이라는 가치는 그대로 남았다. 이전의 구조가 작동하지 않게 되었을 때, 한국 사회는 부와 안락함이 아닌 새로운 가치와 그것을 위한 구조를 만들어 내는 대신,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해서든(부모에게 물려 받은 재산을 털어서든, 주식을 해서든, 코인을 해서든….)  부와 안락함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그럴듯하고 편안하고, 아무나 할 수 없기에(의대 진학을 위해서는 부모의 재력이 필요하므로) 돋보이는 경로가 바로 ‘의대 진학’이다.


결국 ‘의대 열풍’은 붕괴된 박정희식 구조 그리고 근본적인 도전과 혁신을 회피하려는 유약한 내면성이 결합해 만들어낸 현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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