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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본 Dec 16. 2022

귀옥에게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귀할 귀貴. 구슬 옥玉 . 귀한 구슬이라는 뜻이지. 뒤돌아 보면 내 기억 속에 엄마의 이름이 제대로 불렸던 적이 있었나 싶어. 어느 순간부터는 정귀옥이 아니라 ‘보늬 엄마’로 지냈었잖아. 귀옥 씨, 거기선 잘 지내고 있어? 엄마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가장 힘들어했던 계절이 왔어. 엄마는 다채로운 색깔로 단풍이 물들고 선선한 날씨를 선물해주는 가을을 좋아했지만, 알레르기가 유독 심해지는 계절이어서 사계절 중에 가장 힘들어하기도 했었지. 가을이 되면 엄마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돼. 최근에 엄마의 기일이라고 엄마를 보러 추모원에 다녀왔어.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네. 여덟 번째의 가을을 지나고 있다니. 나는 엄마 없이도 여덟 해를 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엄마의 끝은 나에게는 수많은 질문들의 시작이었어. 엄마는 왜 그렇게 별안간 예고도 없이 일찍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왜 엄마를 지키지 못했나.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라도 내가 지킬 수 있긴 한 걸까. 그립다가도 미워지고, 미워하다가도 미안해하고, 미안해하다가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고, 화가 나다가도 금세 또 그리워져. 감정들이 이랬다 저랬다 줄다리기를 하는 통에 나는 자기주장 강한 두 친구 사이에 양팔을 내어준 듯이 무력한 상태로 이리저리 양극단에 있는 그 감정들에 끌려 다녔어. 그런 와중에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 가면을 썼지. 그 사이에 밝은 표정의 가면 밑으로 불안과 우울이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있었던 것 같아. 롤러코스터를 타듯 일렁이고 출렁이는 복잡한 감정의 기복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 이번에 엄마 보러 간다고 아빠를 만났을 때, 아주 오랜만에 아빠에게 엄마에 관한 나의 속마음을 나누었어. 아빠는 8년이나 지났는데 이제는 좀 괜찮아질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물었어. 과연 괜찮아 질까, 이런 울렁거림이. 언젠가는 잊힐까, 내가 엄마의 마지막을 본 장면이. 극복하는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이 늪을.




볼 때마다 거대한 돌덩이를 삼킨 듯 마음이 묵직해지는, 그러면서도 끝에 다달아 한 스푼 정도의 용기를 얻게 되는 영화가 있어. 캐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영화야. 영화는 삶의 의욕을 거세당한 듯해 보이는 남자가 형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보스턴에서 고향이었던 미국 동부의 바닷가 마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되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그의 이름은 리 챈들러. 맨체스터에 도착했을 때 형은 이미 죽고 난 뒤였어. 형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자신을 자상하게 챙겨주던 형이 죽은 것 자체도 슬펐지만, 형이 유언으로 아들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도록 정리해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리는 당황해. 리에게는 맨체스터에 머무르지 못할 이유가 있었고, 어린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줄 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었거든.


맨체스터 바다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한 자락씩 리를 스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리의 마음을 할퀴는 것처럼 느껴져. 맨체스터의 모든 풍경이, 사람들의 시선이 리를 따끔따끔 찌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 알고 보니 그에게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어. 마침내 플래시백을 통해 왜 그토록 그의 눈이 공허했는지를 알게 됐을 때, 나는 그의 붕괴된 마음의 무게가 목구멍 속으로 넘어 들어와 얹힌듯한 느낌이 들었어. 상실감, 죄책감, 분노, 후회, 슬픔, 무력감 등등 온갖 감정들이 뭉쳐진 복합체를 짊어지고 죽지 못해 사는 그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견딜 수가 없어 보이는 고통을 버티고 서있는 걸까.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를 지켜보는 나도 숨이 막혀. 보스턴의 반지하 원룸에 있는 세 칸의 좁은 창문과 창살은 그동안 그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가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어. 도대체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이렇게 살아있어도 되는 걸까, 살 자격이 있는 걸까, 왜 내가 남겨진 걸까… 그 속에서 이런 질문들에 자신을 가두기도 했겠지. 내내 무표정에 말도 별로 하지 않지만, 화면 속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들리는 듯 해.




한편 패트릭은 아빠가 돌아가셨는 데도 내내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아. 아빠가 심부전증으로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오래 반복해서 그런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했던 걸까. 철없는 행동으로 가면을 써. 여느 때처럼 기분 전환으로 하키를 하고 싶어 하고, 락 밴드 연습을 하고, 여자 친구 두 명과의 섹스를 성공하는 데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친구들이랑 스타트랙에 관한 농담을 하며 웃는 여유도 있고.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그런 얘기할 때냐고, 여자 친구가 더 민감해하지. 나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 하는 패트릭의 모습이 더 불안해 보였던 것 같아. 엄마가 가고 난 뒤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거든.


겨울이라 매장을 할 수 없어서 아빠인 조의 시신은 봄이 올 때까지 냉동 보관하기로 했어. 아빠가 추운 곳에 임시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패트릭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 그러다가 패트릭이 밤 중에 무심코 냉동실을 열었다가 냉동된 닭고기들이 왈칵 쏟아져 나오고, 그걸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가 일어날 때 열려 있던 냉동실 문에 뒤통수를 세게 부딪히는 장면이 있어. 아픈 것도 아픈 건데, 그럴 땐 왜 꼭 짜증 섞인 서러움이 봇물처럼 터지는지 모르겠어. 대충 욱여넣고 억지로 닫아 보려 해도 이미 억누르고 억누르다 어쩔 수 없이 터져버린 마음이 쉽게 닫힐 리가 있나. 패트릭은 주체할 수 없이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 때문에 패닉에 빠져 울부짖어. 방심했을 때 섬광처럼 맥락 없이 불쑥불쑥 습격해오는 엄마의 기억들이 나한텐 그 냉장고 같아. 기억은 제어될 수 없어. 떠오르는 것은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잖아. 그 당시 룸메이트였던 은지는 패트릭처럼 불현듯 서러운 울음을 마침내 토해내는 나를 보고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고 말했어. 괜찮아 보이는 게 되려 불안해 보였었다고.



나는 엄마를 애도할 때, 어느 순간에는 리였고, 어느 순간에는 패트릭이었던 것 같아. 




리는 맨체스터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 패트릭을 위해 그곳에 머물러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맨체스터를 견딜 수 없어해. 영화 안에서는 그의 불안과 우울이 극복되지 못한 채로 끝이 나. 그래도 희망적인 건 맨체스터에도 매서운 겨울이 지나 봄이 살짝 다가온 것을 풍경으로 보여줘. 비록 패트릭은 조의 친구였던 조지 부부에게 입양시키지만, 조의 소유였던 배의 고장 난 모터를 새것으로 갈아주고, 같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배낚시를 하며 가끔씩이라도 패트릭에게 곁을 내어주려는 리의 의지가 보여. 조가 있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남겨진 이대로 어떻게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작은 연결고리만 있다면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서 살아가 볼 만하지 않을까.


맨체스터에서의 트라우마가 극복되지 못한 채로 끝을 맺은 게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동화적으로 이걸 단번에 치유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있는 듯이 이야기하지 않아서. 오히려 그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한테 “지금 그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 데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당신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든지 당신이 옳은 거라고. 언제까지 애도가 완성되어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고. 충분히 애도해도 된다.”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어.



엄마를 잃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8년 전 그 가을의 한낮에 나는 엄마를 보냈어. 엄마가 있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남겨진 이대로 어떻게든 살아볼게. 결국은 극복이라는 말은 잊어버리기로 했어. 상실이란 게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거든. 익숙해져야 하는 거더라고. 점점 더 엄마의 빈자리와 함께 살아가는 게 숨 쉬듯 익숙해지기를 나도 나 스스로를 위해 바라. 그냥 불안하면 불안한대로,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회복되지 못한 상태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도록.


엄마의 빈자리를 더듬을 때마다 느껴지는 질감이 달라. 그래도 다행인 건 처음 몇 년보다는 지금이 조금 더 나아. 그때는 기를 쓰고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고 하면, 지금은 마음의 방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들을 관조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감은 생긴 것 같아. 좌표로 따지자면 나는 아직 슬픔의 경계 안쪽에 있지만, 남은 가을의 날들이 지나면 새로운 계절로 넘어갈 거야. 다른 계절들을 지내다가도 별안간 나도 모르게, 또다시 어김없이 짙은 그리움의 계절이 찾아오겠지. 경계를 넘나들다 보면 언젠가 그 경계가 희미해질 것을 이제는 믿게 됐어. 이제부터는 가을이 오는 것을 기꺼이 환대할게. 한 스푼 덜 불안해하고, 한 스푼 덜 우울해하면서 가을을 보내볼게.


거기서도 안녕, 나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귀한 구슬, 귀옥 씨.



2022년 10월 4일

귀옥에게 보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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