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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본 Dec 16. 2022

꽃말은 변하지 않는 사랑

그림 <죽음과 삶> X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를 엮어서

산책 중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화단 속 천일홍을 마주쳤다. 산책길에 피어있는 생기 어린 알록달록 색깔들 중에 왜 하필 삶의 기운이 바래져 가는 그 꽃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나. 어쩌다 나는 ‘죽음’이 이렇게도 눈에 밟히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에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2014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 일을 겪기 전까지는 죽음에 무감했다. 먼 죽음만 보다가 가까운 죽음을 겪고 나니, 현실성이 없던 누군가의 끝이라는 감각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 이후로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미처 모르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심지어 나 조차도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죽을 수 있다. 3인칭의 죽음이 1인칭의 죽음으로 갑자기 훅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될까 일상 속에서 자주 나의 죽음을 그려 본다. 아마 죽음이 짜고 있는 플롯이 훨씬 더 치밀해서 내 상상력으로는 닿지 못할 시점에 죽음을 만날 것이다. 내가 스스로 죽음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나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미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고된 소멸이다.



<Death and Life>, 1910s, Gustav Klimt (출처: Wikipedia)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죽음과 삶>에서도 삶은 죽음에 의해 늘 주시되고 있다. 그림의 왼쪽에는 죽음이, 오른쪽에는 삶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보라, 파랑, 청록빛을 띤 관들로 모자이크를 해놓은 듯한 망토를 걸친 죽음은 빈 촛대를 어깨에 맨 채 삶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눈을 감은 채로 엉겨 붙은 남녀노소가 파스텔톤의 화사한 덩어리로 삶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 삶은 항상 죽음의 응시를 온몸으로 받고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많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모르는 척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클림트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생전에 그가 그림에 대한 말을 유난히 아꼈으므로 그의 마음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려워했다면 이런 단단한 그림은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1910년부터 1915년에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캔버스를 오래도록 수없이 붓으로 쓰다듬었을 화가를 상상해보면, 죽음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오랜 연구 끝에 내린 강단 있는 결론이 느껴진다. 그는 죽음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아버지와 남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인물이 그의 그림 속에도 있다. 그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의 영역에 있는 아홉 얼굴들 중에서도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두 눈을 뜨고 기꺼이 직면하는 한 여자가 있다. 두려워하는 기색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에 찬 얼굴이다. 그 여자의 존재 때문인지 ‘죽음’을 소재로 자주 다루었던 에곤 실레나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에서와는 다르게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의외로운 명랑이 느껴진다. 





의외로운 명랑을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최진영의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전 세계에 원인 미상의 바이러스가 퍼져 살아남기 위해 난민이 되기를 자처한 사람들을 조명하며 시작한다. 어디로 가면 살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길 위로 떠나는 것이 안전한지, 머무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기로에서 윤리나 질서는 붕괴되고, 국가나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할 때 각자의 고유함이 무뎌지기 쉽다. 부끄러움을 버리고, 생을 손톱만큼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인간적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 기가 찬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주인공들은 ‘사랑’이란 것을 한다. 기꺼이 서로의 거울이 되어 서로의 고유함을 수호한다. 지워지지 말라고. 무뎌지지 말라고. "턱밑까지 닥친 재앙을 피해 집을 떠나면서도 책이나 이어폰을 챙겨"오고,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어떻게든 삶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는 해사한 지나가 있다. 그의 세계를 존중하며 닮아가고 싶어 하는 당찬 도리가 있다. 버려진 식료품을 하나라도 건지려고 폐허를 뒤지면서도 지나를 잠시나마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지나가 좋아할 것 같은 장미향 립스틱이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찾아 건네는 사람이다. 그 둘 옆에는 미소와 건지, 류도 있다. 함께 있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되는 것. 이 소설 속 사랑의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해가 지는 곳이 어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다. 멸망 속에서도 그들은 차원이 다른 희망을 발명해내고 눈앞의 지금을 잘 살아 보려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민음사, 2017, 192쪽 작가의 말에서



클림트는 <죽음과 삶>을 그린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키스>를 그린 사람이기도 하다. 꽃으로 가득한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무릎을 꿇은 연인은 서로를 향해 영원으로 남을 키스를 한다. 그의 화폭 속에 영원히 박제된 사랑의 순간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은 남는다. 그가 죽더라도 그의 그림은 남았다. 그는 그림을 그렇게 사랑했을 것이다. 원래 선명한 보랏빛을 띠었을 그 천일홍은 붉은 기운을 남기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뭉개지거나 으스러지지 않고 동그란 그 고유의 상태 그대로, 평범하게 메마르지 않고 의외로 명랑한 색을 남기고 죽는 모습. 죽음 뒤에도 자신의 모양과 색을 남기는 꽃. 그는 죽었으나 그의 사랑은 남았다. 그 때문인지 천일홍의 꽃말은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쩌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어제의 먼지 묻은 안경을 매일 아침 새로운 마음으로 닦아내는 것과 같다.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고 정면으로 응시하면, 깨끗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답게 하루를 살 수 있다. <죽음과 삶>을 완성하고 3년 뒤 1918년 2월, 클림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으며 그림으로 살고 있다. 나도 나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사랑을 다해 그릴 것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글과 그림으로, 사랑의 흔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실패한다 해도, 내 사랑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힘껏 해가 지는 곳으로 명랑하고 담대하게 달려가 보겠다. 나는 죽음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안다. 이기지 못할 것이라면 적이 아니라 차라리 동행으로 삼겠다. 죽음, 그대는 그대의 일을 해. 나는 나의 일을 할 테니. 변하지 않는 사랑을 위해.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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