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비터스위트> X 시 <열과>를 엮어서
열과裂果/안희연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 2020
어떤 단어들은 크루아상 같다. 특별한 모양과 겹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할 때 본래의 그 단어가 가진 입체적인 맛을 제대로 살리기가 어렵다. 본토의 문화와 역사로 반죽을 빚어 적당한 시간과 온도에 의해 발효된 단어들의 고유함은 다른 것으로 쉽게 대체될 수 없다. 그런 단어군에 속하는 독일어의 ‘젠주흐트(sehnsucht)’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수전 케인의 책 <비터스위트 Bittersweet>(RHK, 2022)를 통해서였다. 따로 사전을 찾아보니 한국어로 옮길 때 ‘동경’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납작하게 갈음하기엔 이 단어는 겹을 잘 살린 아름다운 크루아상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한다. 납작해져 버린 크루아상의 기분은 어떨까. 물론 크로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코르셋에 흉곽이 조여진 채 숨을 겨우 얕게만 쉬고 있는 답답하고 서글픈 마음이 아닐까.(그렇다 해도 이건 헤르메스 사제들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애초에 단어마다 체형이 다른 것을 어떡하랴. 번역가들의 고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료 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바로,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쉽지 않은지 독일-프랑스 합작 국영 방송사인 ARTE 유튜브 채널에 이 단어의 풀이를 따로 정리해 둔 영상이 있다고 했다. 이 영상에서 조명하고 있는 젠주흐트의 겹은 5가지로, désir ardent 격렬한 열망, attente passionnée 정열적인 기다림, nostalgie 노스탤지어(미래에서 기원한 그리움), langueur 번민, impatience 초조이다. 실체가 없는 미지의 기운이지만, 미래에 올 것이라 기대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 어린 향수인 동시에 강력한 갈망이자 끈질긴 기다림이고, 그에 따라오는 고통, 번뇌와 조급함이다. 이 모든 것을 한 그릇 안에 아우르며 넓고 깊은 심해를 이룬다. 하나의 단어 안에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관념들이 동거한다. 서로 빨리 철거하거나 해체되길 바라는 가설재일까, 아니면 건물 하나를 지탱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내력벽일까. <비터스위트>에서는 책 전반에 걸쳐 후자로서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관계로서 독립될 수 없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해야만 하는 내력벽 같은 감정들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결함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다. 어쩌면 결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영국 소설가 C. S. 루이스가 표현한 것처럼 “모든 아름다움이 비롯된 곳”, 그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귀속되고자 하는 갈망에 “그 자체로 실체가 없어서, 발견한 적 없는 꽃의 향기, 들어본 적 없는 곡의 메아리, 아직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소식”같은 어떤 것을 젠주흐트하는 것이다.
특히나 예술가들에게는, 젠주흐트가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달콤씁쓸한 감정을 유독 잘 느끼는 높은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도의 반응성으로 부유하는 젠주흐트를 감지하고, 젠주흐트를 끌어안은 채 오늘의 작품보다 나은 내일의 작품을 갈망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 예술가들에게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멜랑콜리가 유효하다. 멜랑콜리는 슬픔, 불안, 고통, 삶의 불완전함과 결함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음에도 기어이 자꾸만 가슴 깊은 곳에서 ‘따가우면서도 아름답다’는 모순을 느끼는 오묘한 감정이 한 예술가가 다루게 될 관심사를 지시한다. 그 통증에 반응하는 가장 짜릿한 방법은 통증 속으로 기꺼이 다이빙하는 것. 관심사 속으로 더 깊게.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인생에서 달콤함뿐만 아니라 씁쓸함까지도 포용하려면 온몸으로 그 메시지를 살아야 한다. 메시지는 잠재적 메신저의 형태로 도처에 산재하고 있어서 발견하고자 하면 활성화된다. 그중에서도 유독 행동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어떤 깨어짐의 메시지가 예술가에게 완전히 스며들 때 고통은 창의성, 초월, 사랑으로 전환된다.
사실 나는, 달콤씁쓸함의 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안희연 시인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뜨거워서 머뭇거리"고 "차가워서 멈춰설" 때가 많다. "작열하는 태양"과 "장마"의 변덕 속에서 젠주흐트의 겹을 오르내리다가 균형을 잃을 때가 잦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을 빌겠냐는 어떤 날의 돌발 질문에 누르고 있던 번민과 초조가 무심코 툭 튀어나와, '불확실성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후회하며 속으로 자책했다.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것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던 미다스의 소원처럼 어리석고 불행한 소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게중심을 잃은 젠주흐트는 가끔 이렇게 지혜의 눈을 가린다. 불확실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도, 어떤 이변도 일어나지 않을, 침묵과 고요의 세상이 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실을, 오늘을, 어쩌면 아름다울 수 있는 미래도 부정하는 것이다. 게임이 재미있을 때는 결과를 알지 못해서지, 승패가 정해진 게임은 지루하다. 지구에서 플레이어로 뛰고 있다면,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지 않고, 특별히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지도 않고 주어진 라운드를 호기롭게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에 폴란드 일러스트레이션 기획 전시를 보러 그림 친구인 김목요와 권구구와 함께 순천 시립 그림책 도서관에 다녀왔다. 순천에 간 김에 낙조를 보러 갔던 와온해변으로부터 순천역 근처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어리석은 소원을 빌어서 자책했던 것을 말하고 불확실성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도 내내 이 주제에 관해서 생각했던지 집으로 돌아와서 김목요는 “그렇다면 불확실해서 좋은 건 뭐가 있을까요?”라고 산뜻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고민 끝에 각자의 우물에서 하나씩 단어를 길어 올렸다. 김목요는 ‘파도’라고 했고, 권구구는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재즈’를 찾아낼 수 있었다. 파도와 꿈, 그리고 재즈라니.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불확실성의 영역에서 태어난 이 조합이 꼭 마음에 들었다. 변수가 있고, 변주가 있고, 변칙이 있고, 변화가 있어서 아름다운 이것들은 다음에 올 것을 궁금하게 만든다.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워하게 만든다.
그제야 다시 "더럽혀진 바닥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소원은 하늘에 빌더라도 내가 품고 사는 거니까, "다시 쓰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고. 그래, 불확실한 것에도 이렇게 좋은 게 있다고 하면, "더 훔쳐가도 좋"고 "더 망가져도 좋"으니 차라리 소원을 무한한 가능성에 올인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겠다. '젠주흐트, 인생의 달콤씁쓸한 그 오묘한 맛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마주 오는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그러다 보면 "나의 과수원"에 자라나는 슬픔 나무들에 맺을 달콤씁쓸한 열매를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도 하고 "보내기"도 하며 잃어버리면서도 "문지기" 몫의 하나쯤은 있겠지.
2023.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