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목요와 구구. 우리 셋의 순천 여행은 즉흥으로 결정되었다. 목요가 먼저, 순천시립 그림책 도서관에서 ‘폴란드 일러스트레이션의 거장들(22.10.11-23.1.15)’이라는 기획 전시를 하는데, 거기 전시된 요안나 콘세이요의 원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애정하는 작가라, 원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니 볼 수 있을 때 봐두는 게 좋겠다 싶었다. 순천이 가평에서 멀긴 하지만 폴란드보다는 확실히 가깝다. 구구와 나는 덥석 목요가 “여기 여기 붙어라” 내민 엄지손가락 위로 서로의 엄지손가락을 감싸 쥐며 주먹탑을 쌓았다. 전시가 막바지에 다 달아서 종료까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기에 당장에 기차표를 끊었다.
급히 정해진 여행인 탓이 아니라, 우리 셋은 체력이 쉽게 고갈되는 사람들이므로 일정을 최대한 헐렁하게 잡는 수밖에 없었다. 1박 2일, 짧은 여행의 목표는 간결했다. 첫째 날 낙조를 구경하고, 둘째 날 그림책 박물관 전시를 관람한 후 바로 상경하는 것이었다. 연잎밥 정식과 시금치 카레로 담백한 점심 식사를 한 우리는 카페에 들러서 한숨 돌리다가 호텔 체크인을 했다. 침대에 누워 느긋이 쉬었다가 와온해변으로 가는 버스 배차 스케줄을 보고 도착하면 해가 질 것 같은 시간에 맞춰 나왔다. 와온해변은 순천역에서 98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되는데, 배차 간격이 꽤 길다. 와온에 도착해 내리면서 버스 기사님께 돌아가는 편 시간을 물으니 1시간도 더 뒤라고 알려주셨다. 겨울 해변의 칼바람 속에서 오래 기다려야 할 우리들을 걱정하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건네신 한 마디. “오메, 아직은 젊어서 노는 게 좋제~?” 우리는 그 다정한 사투리 한 마디를 되새기며 한참을 웃었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 와온의 낙조는 아름다웠다. 잘 내려오다가 하필이면 수평선에 걸친 구름에 가려 미리 블로그 사진에서 보았던 것과 같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분홍빛을 한 모금 머금은 주홍색 태양이 갯벌의 끝을 살짝 덮은 바닷물 위로 길게 비치며 무늬를 그렸다. 구름이 태양을 호위하듯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가 점점 그 빛에 같이 물들어갔다. 그 바다의 곁에 우리 셋이 있었다. 목요의 엄지손가락에 손을 포개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라고 생각하니 순천의 순간들이 더 짜릿해졌다. 지는 것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돌아오지 않을 순간, 아쉬움과 황홀이 동시에 그곳에 있었다. 아름다움을 음미하는데 왠지 모를 씁쓸한 맛이 같이 느껴졌다. 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해를 부리나케 쫓아온 겨울의 어둠은 금세 하늘을 독차지했다. 바람이 차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택시를 부를까 고민하던 차에 아량 넓은 슈퍼 사장님의 배려로 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기다림이 끝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30분 동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목요와 구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얼마 전 받았던 돌발 질문을 화두로 꺼냈다.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을 빌지에 관해서였다. 나는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무심코 ‘불확실성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말했다가 바로 후회하며 속으로 자책했다고 말했다. 뒤돌아 생각해 보니 그것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던 미다스의 소원처럼 어리석고 불행한 소원이었다. 불확실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도, 어떤 이변도 일어나지 않을, 침묵과 고요의 세상이 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마도 불확실성의 막막함이 내 안의 불안을 키우고, 불안이 나를 잠식해 쉽고 빠르지만 슬픈 대답을 가져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불안이 소거되고 인생에 달콤함만 있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신은 하나만 주지 않는다. 인생은 구성품 변경 불가, 종합선물세트 패키지 상품이다. 그걸 알려주는 것 같은 단어를 최근에 읽었던 수전 케인의 책 <비터스위트>(RHK, 2022)를 통해서 만나기도 했다. 독일어의 ‘젠주흐트(sehnsucht)’다.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독일-프랑스 합작 국영 방송사인 ARTE 유튜브 채널에 이 단어의 풀이를 따로 정리해 둔 영상이 있다고 했다. 이 영상에서 조명하고 있는 젠주흐트의 뜻은 5가지로, 격렬한 열망, 정열적인 기다림, 노스탤지어(미래에서 기원한 그리움), 번민, 초조다. 실체가 없는 미지의 기운이지만, 미래에 올 것이라 기대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 어린 향수인 동시에 강력한 갈망이자 끈질긴 기다림이고, 그에 따라오는 고통, 번뇌와 조급함이다. 하나의 단어 안에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관념들이 동거한다. 서로 빨리 철거하거나 해체되길 바라는 가설재일까, 아니면 건물 하나를 지탱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내력벽일까. <비터스위트>에서는 책 전반에 걸쳐 후자로서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인생에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관계로서 독립될 수 없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해야만 하는 내력벽 같은 감정들이라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던지, 목요는 “그렇다면 불확실해서 좋은 건 뭐가 있을까요?”라고 산뜻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고민 끝에 각자의 우물에서 하나씩 단어를 길어 올렸다. 목요는 ‘파도’라고 했고, 구구는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재즈’를 찾아낼 수 있었다. 파도와 꿈, 그리고 재즈라니.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불확실성의 영역에서 태어난 이 조합이 꼭 마음에 들었다. 변수가 있고, 변주가 있고, 변칙이 있고, 변화가 있어서 아름다운 이것들은 다음에 올 것을 궁금하게 만든다.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워하게 만든다. 순천에서 발견한 낙조도 분명 같은 성격을 가진 단어일 것이다. 불확실한 것에도 이렇게 좋은 게 있다고 하면, 즉흥이 만들어내는 재미에 기대어 볼만도 하지 않을까. 소원을 다시 쓰기로 했다. 인생의 달콤씁쓸한 맛을 즐기면서 마주 오는 불안과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다음 날 폴란드 일러스트 전시도 볼거리가 많아서 도서관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정답 없는 질문에 자유롭게 답을 써나간 멋진 답안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작가님들은 영국 소설가 C. S. 루이스가 표현한 것처럼 “모든 아름다움이 비롯된 곳”, 그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귀속되고자 하는 갈망에 “그 자체로 실체가 없어서, 발견한 적 없는 꽃의 향기, 들어본 적 없는 곡의 메아리, 아직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소식”같은 것들을 젠주흐트하다 자기만의 답을 발견한 것일 테다. 이제 우리 차례다. 뭔지 아직 정확히는 모르지만 발견하기를 원하는 진실된 아름다움을 찾으려면, 또 얼마나 긴 젠주흐트 터널을 통과해야 할까 싶다.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 미지의 아름다움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갈 것이다. 구구와 함께 목요를 따라간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나는 평생 간직하게 될 것 같다. 순천에서 보낸 이틀의 시간과 용산-순천 왕복 KTX 기차표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2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