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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치와 치즈냥 Jan 23. 2023

안전거리

이번 구정은 특별히 제사음식을 준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가족끼리 먹을거리-떡국, 김밥, 떡볶이, 치킨, 라면 등-을 간단히 그때그때 편하게 준비해서 다 함께 조리하고 차려서 먹었다. 코로나가 있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설풍경이다. 예전엔 늘 그래왔듯 명절이면 의례라는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맞춰서 구색을 반드시 갖추었었다. 아주 강박적으로다. 시아버지가 둘째 아들이었지만 따로 차례상을 작게나마 구색 맞춰 설전날 미리 장만해 놓았고, 설 당일날은 큰아버지댁으로 모든 식구들이 몰려가 그곳 형님들과 함께 설제사, 두 끼 식사와 후식까지 밥상을 몇 번을 차리고 치웠다를 반복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1박 2일을 더 시댁 식구들 모두 모여 먹고 치우고를 반복하고서야 모두 흩어지면 그다음 날 출근이었다. 명절은 내게 또 하나의 직장 같은, 극한 이벤트였다. 


그런데 코로나가 2020년부터 일상에 눈에 띄게 파고들면서 나라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명절 때 모이지 말도록 합법적인 사유를 주었다. 야호 해방이다. 그렇게 2020년, 2021년, 2022년... 3년을 보내고 곧 실내마스크 해제를 앞둔 2023년 구정은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있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코로나라는 역병은 우리에게 오랜 유교관습에 대해 합리적인 잣대로 다시 한번 점검해 볼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시엄마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오늘의 편안함에 이르렀다.


문득 6년 전 구로구청에서 주관한 명사특강이 떠올려졌다. MBC ‘퀴즈 아카데미’, ‘우정의 무대’, ‘일요일 일요일 밤에’등 인기프로그램을 연출한 ‘주철환’ 전 PD님이 구민회관에 오신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온화한 미소· 자상한 말투 속에 명쾌하면서도 위트 있게 스며드는 명강의였다. 강의의 주 요지는 운전을 할 때도 사고가 나지 않으려면 서로 안전거리를 지켜야 하듯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안전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 연인, 동료, 상사, 고객 등 모든 사회적 역할관계에 다 적용되는 안전거리... 참 감명 깊게 들었던 그날의 강연은 잊을만하면 다시 생각나는 좋은 화두였다. 이번 명절에도 떠올려지는 ‘안전거리’


나도 한때는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흡사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무모한 노력을 한 적이 많았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타인이 날 인정해 주는 것은 중요하지 않음을... 나의 행복은 나 스스로 채우고 만들어 가야 함을... 삶의 주체는 타인이 아닌 나 인 것을...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 나 스스로 나의 안전거리를 밝힐 필요가 있다.

“어, 여기까지만 저는 허용합니다. 이 선까지만요. 그리고 제가 불편할 것 같으면 그때 미리 말씀드릴 테니 그전까지는 편히 행동해 주세요. 안전거리가 무너질 것 같으면 제가 꼭 미리 알려드릴게요.” 이렇게  미리 깜빡이를 켜서 힌트를 주지 않으면 타인은 알 길이 없다.

나 역시 타인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물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까지 해도 불편하시지 않으실까요? 어디까지 가능할 런지요? 불편하실 것 같으면 꼭 미리 깜빡이를 제게 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철환 강사님과의 고마운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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