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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담 Oct 05. 2024

이탈리아 토리노,
"우연과 인연 그리고 필연"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43 _ Turin, Italy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이탈리아 토리노,

첫 번째 이야기: 우연과 인연 그리고 필연.




밀라노 첸트랄레역

    오후 5시 '밀라노 첸트랄레역'에는 많은 인파들로 가득했다. 그들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각자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때로는 설레는 마음으로, 때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만의 여행을 시작 혹은 마무리하는 중이다. 그 끝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반겨줄 수도, 아니면 따분한 일상이 기다릴 수도 있다. 어쩌면 마주하기 싫은 괴로운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을 수도 있다. 


    미지로 가득 찬 그 여정의 끝이 어떨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종착역은 정해졌다. 그리고 마음을 놓고 그 종착역을 향해 그저 나아가기를 바랬다. 앞으로 어떤 삶의 이야기가 펼쳐질지 모르지만, 그 끝에 닿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기에, 그렇기에 그냥 의자에 등을 기대어 그 순간만큼은 편안하기를. 지나가는 풍경에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며 깊은 위로를 얻기를. 근심이 아닌 기대를 가지며 삶을 낙관하기를.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인생의 행복을 만들어가기를.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굽이 굽이쳐 있는데, 
타고 갈 때는 직진이라고 밖에 생각 안 하잖아요.
저도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굽이져있고.
그게 인생인 거 같죠.

다큐 3일



    밀라노에서 몸도 마음도 모두 아쉬웠던 하루 일정을 소화하였고, 이탈리아의 다음 여정을 따라가기로 했다. 이탈리아 두 번째 도시는 토리노였다. 이름만 몇 번 들어본 나에게 생소한 도시였지만, 이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왠지 모를 강한 끌림을 느꼈다. 이탈리아 여행 다음 목적지 토리노, 그렇게 서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토리노로 가는 길



    이탈리아에는 대표적으로 두 회사가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기차로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다. 


    첫 번째 회사는 '이탈로'이며, 주로 대도시들을 연결한 고속철도 회사다. 노선은 적지만 상대적으로 깔끔한 최신식의 열차들을 운영하고 있어 쾌적함과 편안함, 깔끔함을 추구한다면 '이탈로' 회사의 노선을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하지만 보통 배낭여행객들이 유럽을 여행할 때 많이 활용하는 '유레일패스'가 적용되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두 번째 회사는 '트렌이탈리아'다. 이탈리아 국영 철도회사로써 앞서 언급한 '이탈로' 회사보다 노선을 훨씬 더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 소도시를 방문할 때면 한 번 정도는 이용하게 되는 회사이다. 또한 '유레일패스' 보유 시, 특정 구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노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 또한 있고, 해당 패스를 통해 유럽을 여행하던 나는 자연스레 이탈리아 여행 내내 '트렌이탈리아' 노선들을 활용했다. 그러나 '이탈로' 회사보다 낡거나 오래된 열차를 많이 운영하고 있어 어쩌다 보니 '트렌이탈리아' 열차에 대한 힘들었던 기억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내가 이탈리아를 여행할 당시, 막 6월 중순이 지난 한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상 유럽의 남쪽에 위치하고 지중해를 접한 온난한 기후이기에, 여름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더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트렌이탈리아 일반노선 기차들은 열차 내부에 에어컨 시스템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탈리아의 악명 높은 더위를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열차 창문을 활짝 열더라도 뜨거운 햇빛에 달궈진 습한 공기는 열차 내부로 스며들어와 숨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열차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찰 때면, 온도가 더욱 높아지는 건 차치하고 왠지 모를 악취까지 올라오는 최악의 순간들도 많았다.


Turin, Italy


    이런 더위 속 어김없이 열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로 겨우 호흡을 이어가며 토리노로 향하는 기차 안이었다. 약 1-2시간 남짓의 짧은 여정 중, 중간 지점 어딘가 열차 밖 정거장 한 아시아인이 눈에 띄었다. 그는 긴 장발에 키가 크고 말라 모델 분위기를 풍겼으며, 짧은 반바지에 오버핏 셔츠를 대충 걸쳐 입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 같은 자유로운 모험가 인상이었다. 열차가 멈추자 내가 탄 칸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고,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 같았다. 한국인이 아님은 분명했다.


    당시 코비드 시국이 막 끝난 상황이라 유럽에서 아시아인을 보는 경험은 귀했다. 그러나 더위에 지친 나머지 큰 관심은 없었다. 전과 똑같이 풍경을 보며 토리노로 출발하려는 순간, 그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게 들렸다.


    "스미마셍, @#$% 니혼 &%@# 데스까?"


    일단 그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고,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에 어떤 뜻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충 일본인인지 질문하는 것임은 눈치챌 수 있었다. 영어도 아닌 일본어를 들을지는 전혀 예상 못했기에 조금 당황해 3초간의 정적 후, 민망하지 않게끔 대답해 주었다.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스."


    거의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은 '아하'하며 수긍하더니, 이번에는 영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표정일 때의 차갑고 무서웠던 첫인상과는 달리 대화를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웃는 인상이 되었다. 또한 일본인으로서 보기 드물게 영어도 잘하는 모습에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호기심이 생겼고, 토리노를 향하는 기차 안 남은 1시간 이동 내내 대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름이 '켄토'인 아저씨였다. 내가 던진 질문 하나에 끊임없이 대답하는 말이 많은 아저씨였지만, 유쾌하고 웃긴 포인트들도 많았다. 노는 것과 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과감 없이 드러내며 조금 독특한 구석도 있었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 같았고 그의 인생 얘기를 듣는 것이 재밌었다. 몇 년 동안 유럽 일식당에서 셰프로 일하며 유럽 곳곳을 여행하였고, 지금은 이탈리아 여행을 끝내고 여자친구를 만나러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이라 했다. 이제 유럽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곧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며 일본에서는 료칸에서 일할 것이라 알려주었다.


    한국인, 일본인 아시아인 두 명이 영어로 쉴 새 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옆 줄에 앉은 이탈리아인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켄토 아저씨 덕분에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짧은 인연이었지만 아쉬움이 남아 우리는 연락처를 공유했다. 나중에 일본 놀러 오면 꼭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그는 토리노에 도달하기 전 먼저 열차에서 내렸다. 그 후로 나는 일본에 두 번이나 방문하였지만, 아쉽게도 연락하지는 않았다.


    내가 여행을 많이 하며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여행을 '사람'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관광 명소와 맛있는 음식들, 특별한 활동들 등 여행을 즐기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늘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는 건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여행을 되돌아볼 때면 늘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토리노의 첫인상



    밀라노에서 출발한 기차는 금세 토리노 'Porta Susa'역에 도착하였고, 2박 3일간 머물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Turin, Italy

    토리노의 첫인상은 사실 '두려움'이었다. 토리노 나름 관광지와 가까운 위치의 숙소였으나, 거리는 쓰레기로 청결하지 못함과 동시에 부랑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길가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이탈리아 소매치기와 경범죄에 대한 악명을 들었기 때문일까,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긴장하게 되었다. 주변을 계속해서 주시하며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였고,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였다.


    자칫 밤에 나갔다가 큰 일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새벽 일찍 나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기에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호텔 직원에게 치안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행히 직원은 위험하지 않으나 그래도 조심은 하라는 말을 해주었다. 며칠간 토리노를 여행해 본 결과, 확실히 숙소 앞 동네만 위험해 보일 뿐, 토리노 다른 많은 곳들은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자칫 토리노에 대한 인상을 두려움으로 오해할 뻔했다.


    토리노에서 머물렀던 숙소 안에는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게끔 간이 주방이 있었다. 호스텔 형식의 객실들도 함께 있었기에 많은 젊은 여행객들이 같이 요리하고 저녁을 먹을 수 있게끔 잘 되어 있었다. 나도 식비를 조금 절약하기 위해 숙소 근처 까르푸에 들러 장을 보았고 다양한 이탈리아 식재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계산하는 직원의 왠지 모를 툭툭 던지는 행동이 조금은 기분 나빴지만, 웃어넘기며 "그라찌에" 인사 후 숙소로 돌아왔다. 


    기차 안의 무더위, 토리노의 두려움, 마트의 불쾌함을 뒤로하고 드디어 혼자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비록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맛있는 음식, 시원한 맥주와 함께 모든 묵은 감정과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새삼 한국의 발전된 인프라, 친절한 서비스에 감사함을 여러 번 느끼는 하루였다.






우연과 인연 그리고 필연



    여행을 할 때마다 우연히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역에서 근무하는 역무원들부터, 마트에서 마주치는 직원들, 관광지를 소개해주는 가이드들, 숙소에서 우연히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눴던 여행객들, 교통수단에서 이동 중 작은 눈인사를 나누며 스쳐 지나간 사람들 등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사람들은 우연히 그 시각, 그 장소에 머물러 순간의 인연이 된다. 그리고 그 연이 다할 때쯤, 아쉬움을 남기고 각자의 길로 떠난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칠통 조규일



    해외에서, 특히나 미국에서 '스몰토크'는 사회에서 꽤나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과도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 그렇게 대화가 잘 통한다면 친구가 되는 것, 이런 스몰토크를 스스럼없이 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타인에게 조금 더 열려 있으며,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를 즐긴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는 왜 '스몰토크 문화'가 정착되어있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 지하철 혹은 공원에서 나이가 지긋이 드신 분들의 스몰토크하시는 모습은 많이 목격하였지만, 반대로 젊은 사람들은 특별한 용무가 없다면 낯선 타인과의 대화를 기피하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혹시 '사회적 신뢰도'가 낮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하지만 치안이 다른 국가들보다 월등히 좋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신뢰가 낮아서라는 이유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문화적 관점에서 찾았다. 과거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들은 우연히 타인을 만나는 기회가 적어, 낯선 이와 마주쳤을 때의 환대, 친절, 그리고 대화로 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렇게 스몰토크 문화가 지금까지 고착화되어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옛날부터 한 동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착해 사는 것이 익숙하다 보니 낯선 이들을 마주하는 경험조차 드물고, 자신의 얘기를 많이 할수록 피곤한 일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화보다 침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추측컨대, 모든 국내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무례한 것'과 '선을 넘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해외에서의 스몰토크는 본인이 먼저 꺼내기 전까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것에 조심스러운 것과 동시에 사회적 위치, 나이와 상관없이 거리에서 만난 누구와도 동등한 위치에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호구조사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몇 살이며, 무슨 일을 하고, 고향이 어디며, 누구의 지인인지 등을 먼저 따지며 상대방의 신분과 정체를 먼저 파악하고 싶은 것이다. 신원파악이 끝났다면, 여기에 더해 무례한 말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본인이 상대방보다 더 높은 위치라는 착각이 시작되는 순간, 훈수, 편견, 판단 등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는 사람들까지 있다.


    상대방에게 말을 예쁘게 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들릴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 이 모든 것은 재능, 아니 지능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혹은, 겸손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인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말들에 상처 혹은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나라는 '사회적 관계 개방도'가 낮아져 스몰토크의 문화가 잘 자리잡지 못한 게 아닐까.


    나는 절대 스몰토크 문화가 좋으니 무조건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도 내향인으로써 대화보다 침묵이 더욱 편한 사람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외생활을 하며 혹은 여행 중 만난 낯선 이와의 대화는 이상하게 즐겁게 느껴지는 반면, 국내에서 낯선 이와의 대화는 주저하게 된다. 그저 그 이유를 추측해보고 싶을 뿐이었다.



    나에게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는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마음이라는 땅 속에 묻어 어떻게 자랄지 모를 씨앗에 정성을 다하는 것, 자랄수록 관심이라는 물과 햇빛을 줘 나만의 정원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잡초가 자라서 빠르게 잘라내야 할 때도 있다. 마음이라는 토양을 썩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다 보면 간혹 씨앗이 상하기도 한다. 각각의 씨앗마다 잘 자랄 수 있는 방법이 있기에 그 점을 유의해서 섬세한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어떤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꽉 잡아주는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씨앗들은 예쁜 꽃들이 되어 내 정원을 다채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혹여나 열심히 키웠던 식물이 시들었다고 상심하지 말자. 들였던 정성에 마음이 아프겠지만, 시들었던 식물은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 영양분이 되어 내가 만드정원을 더욱 비옥하게 만들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식물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채워가는 것,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꽃 한 송이를 화분에 곱게 옮겨 조화로이 나만의 정원을 꾸며가는 것, 이렇게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길 가의 예쁜 야생화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마음의 크기를 넓혀 더 많은 식물을 담을 수 있도록, 또 마음의 영양분을 쌓아 마음속 묻은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인연을 넘어 좋은 필연들과 인생의 행복을 만들어가자.


행복노트 #40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은 마치 마음에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우연'은 마치 여름 장마철 격렬하게 내린 소나기와 같다. 당연한 일상 속 예상치 못한 손님처럼 등장해 잠시 마음을 적시고 떠나간다. 하지만 그 존재가 너무 강렬하기에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너무 갑작스럽게 지나가 붙잡을 수도 없지만, 건조했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마음속에 담긴 씨앗이 발아할 수 있는 조금의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인연'은 그렇게 자란 새싹들이다. 수분과 영양분 그리고 햇빛의 정도가 맞다면, 즉 내 마음의 환경과 맞다면, 마음에 뿌리를 한 번 내린 새싹들은 하루하루 지날 수록 급격하게 성장해 마음을 더욱 풍요로이 만들어준다. 꽤 많은 씨앗들이 내 통제와는 상관없이 자라기도 하며, 가끔은 정체모를 존재들도 발견된다. 키워놓고 보니 흔한 잡초일수도, 병충해를 겪기도, 또 사소한 환경변화에 쉽게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자랐다 시들고 아프고 또 새로이 자랐다 언젠간 시들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인연이다.


    '필연'은 차갑고 건조한 겨울 속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함박눈과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추억과 마음,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자연스럽게 그리고 견고하게 한 겹 한 겹 쌓여나간다. 보기에는 잔잔하고 익숙하니 아무렇지 않은 당연한 존재로 느껴질 수 있지만, 시린 바람 속 푹신하고 포근하게 마음의 정원을 지켜준다. 힘든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잊고 있던 정원을 돌이켜 봤을 때, 태동한 초록빛 잔디 사이 홀로 우뚝 솟아올라 꾸준히 그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 존재들은 필연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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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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