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44 _ Turin, Italy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이탈리아'라는 국가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국가다.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음식들, 자주 입는 옷 브랜드들, 가구, 차, 관광지 등, 심지어 범죄조직까지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탈리아와 접점이 많다.
이탈리아는 유럽 내에서도 특히 문화와 관련된 자긍심과 영향력을 많이 가진 국가다. 클래식 악보에 사용되는 음악 용어들은 대체로 이탈리아어로 구성되어 있고, 오페라, 성악 등 음악 관련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또한, 미술, 조각, 건축 등 예술 전방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예술에 대한 가치를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풍부한 문화적 배경 속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은 자부심을 가지는 분야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영화'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 자극을 모두 줄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사진을 여러 장 연속적으로 넘겨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주며, 여기에 음성을 추가해 마치 기록된 그 공간에 직접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발명되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모션픽쳐' '영화'라는 예술로 발전하기까지 영화가 세간에 준 충격은 지대하다.
21세기 현재까지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연출 기법과 표현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 속 20세기 영화 산업 과도기를 대표적으로 이끈 국가가 바로 이탈리아다.
지금의 미국 할리우드가 있기 전, 이탈리아 영화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다. 2차 세계 대전 파시즘 정권을 겪고 난 뒤,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다양한 영화적 장르와 연출을 시도하던 이탈리아 영화는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표현에 대한 수위를 높인 자극적인 영화들부터 정서와 철학을 아우르는 작품적 완성도가 높은 영화들까지 다수의 작품을 제작 및 수출하며 영화 산업을 성장시켰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 지금 이탈리아 영화를 찾아봐도 충격적인 작품이 많으며, 당시 영화에 있어 얼마나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때문일까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많은 이탈리아 거장들이 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마지막 황제>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인생은 아름다워>의 로베르토 베니니, <서스페리아>의 아르젠토 다리오, B급 감성의 틴토 브라스 등, 이 외에도 세르지오 레오네,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페데리코 펠리니 등의 훌륭한 고전영화 감독들이 있으며, 영상을 넘어 영화 음악감독 엔니오 모리코네까지. 이탈리아는 이런 영화 거장들의 국가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1940년부터 1970년까지 전 세계 영화 산업을 이끌었다는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토리노에는 그런 이탈리아 영화 전성기를 기념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있다. 토리노의 랜드마크 '몰레 안토넬리아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박물관이며, 현재 이탈리아 국립영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토리노를 여행 온 목적이었으며,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장소들 중 하나였다.
한국사람들에게 토리노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탈리아 도시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 유명한 도시들 속 토리노는 생소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토리노는 위에 언급했던 유명한 도시들만큼 나에게 큰 만족도를 선사했던 여행지였다. 그리고 그런 토리노의 진정한 매력은 '박물관'이었다.
토리노에는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국립영화박물관'과 '이집트 박물관'이 있다. 관광객들이 토리노를 방문할 때 주로 둘러보는 곳이며, 이 두 곳의 전시는 매우 흥미로웠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모두 만족스러웠다. 특히 '피에몬테 카드'를 구입한다면 일정 기간 동안 토리노와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박물관, 왕궁, 전시회 등 많은 관광 명소들을 입장할 수 있고, 일부 교통 또한 이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꼭 피에몬테 카드를 활용해 토리노의 두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 '이탈리아 국립영화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몰레 안토넬리아나 건물은 토리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눈에 띄는 건물이다. 그 높이가 다른 건물들에 비해 많이 높아 어디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나는 토리노를 여행할 때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길라잡이로 활용했다.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 봤을 때 생각보다 훨씬 웅장함에 감탄했고, 이어서 건물의 아름다움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 박물관에 먼저 입장했다.
영화 박물관은 건물 내부 중앙 광장 부분을 중심으로 윗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내벽에 설치했다. 이렇게 윗부분으로 올라가며 자연스레 전시를 구경할 수 있게끔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영화와 관련된 소품, 포스터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영화에 등장한 장소들을 옮겨놓은 듯한 작은 공간들 또한 꾸며져 있었다. 이탈리아 영화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유명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내가 아는 영화를 찾는 재미도 있었고, 새로운 영화를 알게 되는 재미도 있었다. 영화 박물관을 방문할 당시, 낮잠을 자고 난 뒤 조금 몽롱한 상태였는데, 오히려 이런 기분이 박물관 내부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느끼게 해 주었다.
장르별 인생영화 5선
액션: 아포칼립토(2007), 바스터즈: 거친녀석들(2009), 007 스카이폴(2012),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 존 윅4(2023)
범죄: 스카페이스(1984), 시티 오브 갓(2005), 다크나이트(2008),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2), 베스트 오퍼(2014)
호러: 더 셀(2000), 사일런트 힐(2006), 28주 후(2007), 살인마 잭의 집(2018), 서스페리아(2019)
SF: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콘택트(1997), 슈퍼에이트(2011), 프로메테우스(2012), 컨택트(2017)
판타지: 원더풀 라이프(1998),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2001),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 빅피쉬(2004),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6)
코미디: 인생은 아름다워(1988), 터미널(2004), 예스맨(2008), 세 얼간이(2011), 미드나잇 인 파리(2012)
로맨스: 로마의 휴일(1953), 비포 선라이즈(1996),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7),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3), 노트북(2004), 첫 키스만 50번째(2004), 이터널 선샤인(2005), 500일의 썸머(2010), 렛 미 인(2010), 우리도 사랑일까(2012), 어바웃타임(2013), 라라랜드(2016), 고스트 스토리(2017), 플립 (2017)
역사: 뮌헨(2005), 데어 윌 비 블러드(2008),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2015), 스포트라이트(2016), 1987(2017)
가족: 보이(2010),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마미(2014),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 코다(2021)
성장: 스탠바이미(1986), 옥토버 스카이(1999), 8마일(2003),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월플라워(2013), 보이후드(2014), 프란시스 하(2014), 위플래쉬(2015), 싱 스트리트(2016), 레이디 버드(2018), 미드90(2019)
드라마: 시네마 천국(1990), 집시의 시간(1993), 포레스트 검프(1994), 인생(1995), 행복을 찾아서(2007)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 토이스토리3(2010), 늑대아이(2012), 너의 이름은(2017), 소울(2021)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2011), 잉여들의 히치하이킹(2013), 시티즌포(2015), 트윈스터즈(2016), 땐뽀걸즈(2017)
두 번째로 방문한 이집트 박물관의 경우,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이집트의 유물들을 구경할 수 있어 신기했다. 3만 점이 넘는 유물을 보유 및 전시하고 있으며, 마음속 또 다른 한 편으론 어떻게 이 많은 유물들을 옮겨/뺏어 왔는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아쉬웠던 점은 사람들이 많아 소음 때문에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움직이기에도 좋지 않았다. 이런 부분만 제외하고 두 박물관 모두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전부 만족스러웠다.
토리노는 천천히 산책하기 좋은 도시다. 몰레 안토넬리아나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단히 이목을 끄는 장소는 없다. 그저 토리노를 정처 없이 산책하다 보면 우연히 마주하는 광장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건물들, 그리고 토리노 도시를 흐르는 시원한 '포 강(Fiume Po)'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여유 있게 산책하는 것, 토리노를 가장 제대로 여행하는 방법인 것 같다.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
통계적으로 '24년 10월 19일 기준, '왓챠피디아'에서 별점 평가를 준 영화가 2,110편, 나중에 보고 싶어서 저장했던 영화가 1,160편 있다. 인생에 있어 최소 약 4천 시간을 영화를 보는 데에만 썼다. 지금도 '보고싶어요' 리스트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살면서 앞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다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내가 영화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옛날 어렸던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여타 유명한 거장 영화감독들이 그렇듯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본 영화에 매료되어, 그 길로 꿈과 판타지가 있는 영화에 푹 빠지게 되었다. 영화에서 주는 자극들을 통해 다양한 감각과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현실과 동 떨어진 낭만 있는 이야기들로부터 영감 받으며, 현실 너머 추상적 세계관이 다채롭게 채워지는 게 좋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영화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생각이 많은 성향인 나는 어릴 때부터 현실의 고됨을 느끼며 자랐다. 철이 빨리 들었던 걸까, 미래를 생각할 때면 늘 불안이 가득했고, 현실은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영화를 볼 때면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고 일탈의 기분을 느끼며 오로지 영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어쩌면 영화가 주는 자극으로부터 생성된 도파민에 중독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때부터 거의 매주 아니 매일 한 편씩 습관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순간적이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좋다. 늘 즐겁게 보았던 영화들은 이야기 흐름에 따라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며, 그 끝에는 주인공과 동화되어 그 영화를 체험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보이는 다양한 상황들에 내 인생을 대입해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고, 감독의 철학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보고 난 뒤 여운이 오래 남아 두고두고 떠오르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는 '판타지' 가득한 장르를 좋아했다. 직접 체험함에 있어 가장 많은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왠지 이런 꾸며진 세상이 현실 속에도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며 꿈을 키웠었다. 학창 시절이 되자 보다 더 자극적인 영화 장르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예를 들어 '액션, 범죄, 호러, 스릴러'와 같은 장르를 즐겨보며 청소년다운 취향을 가졌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어가자 선호하는 장르가 극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극적인 장면들과 이야기에 염증과 피로를 느끼게 되었으며, 인생의 경험이 조금 쌓였던 탓일까 일상과 관련된 '로맨스, 드라마, 코미디' 같은 장르가 좋아졌다. 또한 고전 영화들도 종종 감상하며 현재와 다를 바 없는 그때의 인간상에 공감하기도 한다.
영화를 늘 사랑하며 살아왔지만, 근래에 들어 영화와 관련된 고민이 생겼다. 아무래도 2천 편 이상의 영화를 감상했다 보니 더 이상 영화로부터 받는 자극에 무뎌졌다. 웬만한 영화로 만족하기 힘들어졌고, 그렇게 영화를 보는 시간 그리고 고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한 영화도 하나의 산업이기에 상업적인 오락물, 킬링타임용 영화가 최근 우후죽순 쏟아지며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과 생각의 깊이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옅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따라 영화 주제를 바탕으로 깊은 토론을 하는 것이 어려워진 느낌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격언이라 알려진 영화광이 되는 '시네필 3법칙'이 있다. 첫 번째는 영화를 두 번 보고, 두 번째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영화를 직접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막 두 번째 단계인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내가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도 시간문제이지 않을까. 나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 명의 영화인이 되는 것을 꿈꾼다.
최근 영화에 대한 열정이 조금은 줄어들었어도,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가 외롭고 지칠 때 영화는 늘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였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소중한 교훈을 깨닫게 해 준 스승이었고, 힘든 현실 속 세계관을 넓혀 다양한 꿈을 가지게끔 인도해 준 은인이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늘 영화를 사랑할 것이다.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3가지가 필요하다.
시나리오, 시나리오, 그리고 시나리오.
알프레드 히치콕
인생은 영화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인생'이라는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그 영화 속에는 로맨스, 코미디, 공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들을 아우르는 흥미로운 작품이며, 비평가는 오직 자신밖에 없다. 어느 사람이나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며,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쇼트를 구성해 스토리에 흥미를 더한다. 항상 절정의 순간들만 있는 것도 아닌 가끔은 지루한 장면들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 또한 '나'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들지, 지루하게 만들지, 어떤 장르로 채울 것인지, 어떤 등장인물들을 둘 것인지 어느 정도 스스로 의도하여 씬(scene)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나만의 역작을 만들어 나가는 것, 좋은 시나리오로 채워 훌륭한 걸작을 제작하는 것, 인생을 영화처럼 살고 기억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드라마로 가득 찬 내 인생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바란다. 인생의 끝,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인생 속 함께 했던 사람들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이야기의 여운을 자리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느낄 수 있기를.
행복노트 #41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이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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