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장성과 로마의 가도(4)
수직 방향의 장성
by going solo May 16. 2023
(2) 영토방위와 장성
진국 이전의 기원전 3천 년경, 통일성을 지닌 문화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가 형성되면서 마을과 도시의 안팎에서 성벽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천 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 중 상 왕조 때의 도시인 오의 성벽이 현재 하남성 정주 북쪽 약 7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당시에 중국 성벽 건설의 기본 기술은 판축 공법이었는데 나무 널판이나 벽돌을 두 줄로 죽 늘어 세워 외부 껍데기로 삼아 그 사이에 흙을 다져 넣어 성벽의 지지대 역할을 하도록 쌓는 방법이다. 주로 현지에서 쉽게 조달 가능한 재료를 사용하였으므로 판축식 흙 성벽은 무엇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시간도 다른 공법에 비해 단축할 수 있는 장접이 있다. 따라서 이후에도 광대한 영역에 걸쳐 성벽을 축조해야만 했던 중국 제국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건축방식이었다.
이런 장벽 건설은 정통 한인 왕조 혹은 비한인 왕족을 막론하고 야만족을 상대하다가 외교수단, 교역, 군사원정 등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폐기해야 하는 최종시점에 택하는 방어적 국경 전략이었다. 말하자면 허약한 군사력, 외교실패, 정치적 마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성벽축조는 재정파탄을 야기하였고 결과적으로 피 통치자의 반란으로 이어져 왕조가 몰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반대급부를 감수하고 축조한 성벽이 과연 통치세력의 기대에 부응하여 영토방위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습격해 오는 야만인들로부터 중국을보호하는 방어용으로써 장성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장성이 중국 국경을 따라 처음 건설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것은 항상 시간을 벌어주는 정도의 기능에 그쳤다.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침입자를 맞아 잠시 유리한 입지를 제공해 주는 것뿐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왕조보다 성벽 쌓기에 열을 올렸던 명대에도 장성은 가장 위협적인 적수인 만주족을 막지 못했다. 침입자들은 방어가 완강한 곳에서는 길을 우회하여 취약지점을 찾아 침략을 감행하거나 혹은 장성방어 관리들을 매수하여 장성요새를 자발적으로 열도록 하기도 했다. 1644년 만주족이 쳐들어 올 때는 변절한 중국 장군에게 안내받아 장성을 그대로 통과할 수 있었다.
청왕조 탄생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힘의 우위에 있던 야만족 출신의 정복자들이 중국 방식에 동화하는 과정의 순환이며 또한 그들 이전의 수많은 비중국인들처럼 중국인들의 우월성 콤플렉스를 물려받아 철저하게 구속되고 제약된다.